엄마는 오늘도 열심히 노는 중입니다
김미경 지음 / 바이북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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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이후의 삶이 궁금했다. 제목에서 '엄마'가 '논다'라고 했다. 그것도 '은퇴 후'. 중년의 삶을 채워주는 에세이라 궁금했다. 이제 막 은퇴를 시작하는 선배는 어떤 삶을 준비했길래 은퇴를 설렘이라고 했는지.

오래전 공무원으로 은퇴하신 아버지는 10년간 초등학교 지킴이를 하시다가 얼마 전 진짜 은퇴를 하셨다. 부모님 세대가 거의 비슷하겠지만 갑자기 많아진 시간을 감당하지 못해 방황하던 아버지는 어머니의 손에 끌려 평소 좋아하지 않았던 등산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셨다. 그리고도 남는 시간을 보내려 한자 옥편을 펼치셨다. 눈도 침침하신데 아버지는 오늘도 매일 A4 10장 이상 한자를 쓰고 외우신다. 심심해서, 시간이 잘 가서.

저자도 공무원이다. 은퇴 전에는 다른 직장인과 다를 바 없이 승진 준비, 가정과 일터의 조화, 업무와 조직 생활의 집중 등 나름 보람되지만 바쁘고 나를 잃어버리는 노동자의 삶을 살았다. 은퇴를 몇 해 앞두고 나니 삶의 흔적에 정작 '나'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깨달았다. 제대로 나답게 놀아보지 못했구나.

저자가 택한 놀이법은 아주 간단하다. 책 읽고, 영화 보고, 전시회 구경하고, 걷기. 그리고 그것들을 하면서 느낀 점을 쓰기. 그리고 쓴 것을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과 나누기. 독서 토론이다. 어쩌면 별거 아닌, 흔한 취미라고 생각할 수 있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게 읽고 구경하고 쓰고 이야기하는 거니까.

그런데 주변에 은퇴를 했거나 앞두고 있는 선배들을 보면 이 책의 저자가 택한 놀이법이 얼마나 탁월한지 알 수 있다. 아버지처럼 남는 시간을 지루해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책을 읽지 않는다. 읽지 않으니 쓸 일도 없다. 만날 사람들도 한정되어 있지만 만나서 하는 이야기도 과거 추억 회상이 전부다. 기억나는 과거 이야기가 끝나면 처음부터 같은 이야기가 지루하게 반복된다.

그런데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전시회를 감상하고 나면 할 이야기가 풍부해진다. 같은 책을 읽어도 생각하는 부분이 다르고 경험된 삶의 적용이 다르기 때문에 할 이야기도 많아진다. 같은 책을 읽고 이야기 나누는 독서 토론은 같은 책을 읽은 터라 이야기의 핵심이 공통된 주제다. 일방적인 어느 한 쪽의 "라테는~"이 아니어서 듣는 쪽이 지루하지 않다.

독서 토론 멤버도 과거 친구들이나 직장 지인이 아니라 사회에서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이라 더 흥미롭다. 공무원 특성상 한 직장에서 오래 근무하다 보면 인간관계도, 사고 체계도 굳기 쉽다. 굳은 사고를 유연하게 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인풋이 필요한데 가장 가성비 좋은 게 책이다.

나도 가끔 생각한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면 라오스 무앙응오이 느아 같은 곳에 가서 잃고 싶은 책 실컷 읽고 산책하고 쌀국수 먹고 커피 마시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싶다고. 어쩌면 은퇴 후 가장 바라는 삶이 바로 그런 삶일지도 모르겠다.

책에서 인상적이었던 부분을 따로 정리해 보자면,

- 밥으로 기억되고 싶지 않았다. 안방의 장롱처럼 늘 그 자리에 원래 있는 존재로 인식되지 않기로 했다.

- 안방은 내 방이 아니고 식탁은 내 책상이 아니다.

- 먼저 살아보고 겪어본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인생을 배우는 중이다.

- 책을 읽다 보면 시간을 알차게 보냈다는 뿌듯함에 행복해진다.

- 전시회에서 정답 찾기를 포기하자 그림이 좀 편해졌다.

책을 읽으면서 좋았던 점은 에세이 중간에 저자가 읽었던 책 이야기, 감상했던 그림 이야기, 감명 깊게 봤던 영화 이야기가 저자의 삶 중간중간에 나와있어서 함께 감상하고 생각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소개하고 있는 많은 책들을 함께 읽어보고 싶고 전시회에 가서 언급된 그림도 감상해 보고 싶다. 영화도 보면서 '나라면 이 장면은' 어떻게 받아들일지 생각해 보고 싶다.

같은 취미,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같은 시간을 보내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삶, 은퇴 후 최고의 놀이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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