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 - 마음으로 천하를 품은 여인
제성욱 지음 / 영림카디널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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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신라의 선덕여왕의 때인 모양이다.

드라마와 함께 선덕여왕에 대한 팩션의 소설들이 봇물 터지듯이 쏟아져 나오고 이미 출간된 책들도 두팔을 앞으로 나란히 하고 있는 듯 하니 말이다.

몇해전 김별아의 미실이란 책을 1억원 고료?당선작이라는 자극적 문구에 끌려 읽게되었는데 당시로서는 신라의 근친혼이나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의 혼인풍습도 어려운 마당에 미실이라는 인물을 이해하지도 받아들여지지도 않았던 기억이있다.

손에 잡은 책은 읽고야 만다는 신념하에 꾹 참고 다 읽긴 했으되 당시의 나로서는 충격이고 그것이 진실이라면 알고 싶지 않은 불편한 진실일 뿐이었다.

학계에서는 아직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 졌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진흥.진지.진평왕때의 미실이 선덕여왕 때에 큰 알력을 행사했는지는 알수 없다는 생각이다. 드라마는 역사적 사실의 바탕에( 간혹 사서의 한줄 기록에 뼈를 만들고 살을 덧붙여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경우도 더러 있지만) 흥미로운 이야깃 꺼리를 덧붙여 만든다. 드라마가 사실과 픽션의 경계를 명확히 하지 않는다면(명확히 할 수 도 없겠지만) 사실 많은 이들이 혼돈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충분히 있다고 여겨진다.

이런 생각의 연장선에서 선덕여왕의 일대기 위주로 쓰여진 책을 접하고 화젯거리가 되기싶고 재미 또한 있으니 관심의 대상이 되기 쉬운 드라마와 구분을 위해서라도 선덕여왕, 그녀만의 이야기를 읽어보는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신라의 여왕이자 이땅의 첫 여왕인 선덕여왕에 대해 배우고 들었을때 묘한 자부심이 가졌었다.

아마도 신라땅인 곳에서 그것도 최초의 여왕 이야기에 매혹되어 옛부터 여왕도(!)있었다는 은근한 자부심으로 코흘리개 남자아이들을 대했던 그때는 성골이고 진골이고 아무것도 몰랐을때니 그저 선덕여왕의 신비한 일화를 듣고 신기하고 재미있고 그랬었던것 같다.

 

632년 진평왕의 뒤를 이어 신라의 왕이 되는 덕만공주 선덕여왕은 삼국의 혼란스러운 시대와 수당의 변화하는 정세 속에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첨성대, 분황사, 황룡사 구층목탑 등을 건축하고 김춘추, 김유신 등의 인재를 등용함으로써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닦았다.

고구려의 연개소문과 백제의 의자왕, 수. 당의 패주들과 당당히 맞선 당대의 여걸이었으며, 백성을 마음으로 살피고 마음으로 아낀 여왕이었다.

이야기 속의 선덕여왕은 그녀가 왕이 되기까지 주변인물들과의 반목과 갈등을 지혜롭게 극복하고, 또한 그를 통해서 자신의 마음을 한층 성장하고 지혜와 현명함을 갖추게 된다.

언니 천명공주의 왕위에 대한 야심으로 선덕여왕과 갈등을 이루는 이야기의 구조가 흥미롭다.

또한 숙부 백반과 그 주변의 인물들이 다양한데 그들이 원하는 것 역시 왕위에 대한 야심이었으니 성골과 진골로 이루어진 신라 왕실의 폐쇄성과 그들만의 왕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선덕여왕의 이야기를 전개 함과 동시에 여러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 호흡이 길고 넓은 시선으로 구석구석 훑어 보는듯한 느낌이 든다.

600페이지 가까이 되는 방대한 분량의 이야기가 그 시선들 하나 하나에 담겨있어 저자의 수고로움이 과히 짐작되고도 남는다. 개인적으로는 남자인 작가의 눈으로 바라본 선덕여왕이라는 점이 조금 아쉽기도 하다.어디까지나 지극히 개인적인.

책중에서 수나라에 고구려 정벌을 요청하는 원광법사의 걸사표가 나오는 부분에서 당시의 수. 당과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미묘한 관계에 고개가 저어졌다.  사족을 달자면 나당연합군으로 삼국을 통일하고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지 못한 통일 신라가 못내 아쉽고 자못 분노했던 기억을 떠올리자면 지금 중국의 동북공정 같은 역사 왜곡 역시 불편한 마음을 감추어지지 않는다.

 

인평이라는 독자적 연호를 사용할 정도로 자주적이었던 선덕여왕.

마음으로 천하를 품은 여인, 선덕여왕- 그녀의 모습을 촘촘하고 빼곡한 글들이 내려 앉아있는 책 속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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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의 눈물 - 한니발보다 잔인하고, 식스센스보다 극적인 반전
라파엘 카르데티 지음, 박명숙 옮김 / 예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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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이탈리아의 피렌체.

아름답고 찬란한 문화 예술이 꽃피던 르네상스의 피렌체에서 일어난 잔인하고 끔찍한 살인사건.

살인사건을 뒤쫓아가는 마키아벨리의 숨막히는 발걸음과 20세의 마키아벨리를 그려내어 한순간도 긴장을 풀지 못하게 만들었다.

흔히 가장 보편적으로 알려진 군주론의 마키아벨리.

피도 눈물도 없이 냉정하고 냉혹하며, 결과를 위해 수단 쯤이야 그것이 옳은것이던 잘못 된 것이든 따지지 않는다는 마키아벨리즘.

아마 마키아벨리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겨우 그 정도 뿐일 듯 하다.

가끔 좋아하는 작가의 책에서 언급되던, 냉정하고 가차없는 주인공을 묘사하며 마키아벨리를 모델로 표현하던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이야 제목도 가물가물 하지만  당시 그 책을 통해 알게된 마키아벨리에 대해서는  꽤나 충격적이고도 부정적이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하지만 실상은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 이라는 옮긴이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이후의  마키아벨리에 대한 짧디 짧은 나의 생각은 시간을 지나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경우가 많아졌었다.

끔찍하고 잔인해서 더 매혹적인 첫장을 넘기자 마자 피렌체의 광장으로 무섭게 빨려들어가는듯 했다. 

 

15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피렌체에서 의문의 연쇄 살인사건이 일어나게 되고  그 사건을 뒤쫓는 젊은 서기관 마키아벨리가 등장한다.

잘 알려진(하지만 실상은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 마키아벨리를 떠올리다가 아직 20세의 청년 마키아벨리가 뒤쫓는 살인사건 속으로 흠뻑 빠져들고야 말았다.

잔인하고 끔찍한 살인사건의 핵심으로 다가갈 수록 책장을 넘기는 손가락은 지치지 않고, 호흡이 늦추어 지지 않은채 살인사건의 중심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피렌체의 역사를 잘 알지 못하지만 화려한 예술과 정치권력다툼, 음모, 역사의 이야기들을 추리와 스릴러로 창조해 만들어낸 젊은 저자의 필치가 너무나도 재미있고 흥미롭다.

왜 제목이 마키아벨리의 눈물일까 하고 책을 읽기 전에 잠시 생각했지만  반전에 이르는 결말을 접하고 나서야 생각이 얼마나 짧고 창조적이지 못한지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책을 다 읽고 다시 한번 빠른 속도로 읽으며, 곳곳에 숨어있는 암시와 복선을 찾고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의외의 곳에서 발견되는 작가의 유머가 신선하다 못해 짜릿하기 까지하다.

 

추리와 스릴러, 반전 그리고 허를 찌르는 유머를 즐기고자 하는 독자라면 마키아벨리의 눈물이 그 모두를 충족시켜줄것임을 확신한다. 사실 많이 기대하지 않았지만 마키아 벨리의 눈물은 엄청난 흥분과 흥미를 내게 선물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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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은충
슈카와 미나토 지음, 이규원 옮김 / 노블마인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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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불행 앞에서 겉으로는 깊이 공감하는 척 진심으로 위로 하는 척 하면서 돌아서는 얼굴에는 입꼬리가 살짝 올라갈때.

그럴 때는 살짝 어지러우면서도 묘한 감정에 휩싸이곤 한다.

나름 악인이라는 생각을 하고 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완벽한 선인 일 수도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일까.

때로 타인의 행복을 질투하고 나의 불행이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될까 헛된 걱정을 하는것을 자각하며 천성이 착하지는 않나보다 하고 생각이 들때가 있다.

근본적으로 타인과 나를 엄격하게 구분하기 때문에 타인의 행복과 불행에 울고 기뻐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때때로 인간의 본성에 대해 생각해 볼때가 있는데, 아니 거창하게 인간의 본성이라기보다는 나의 본성에 대해 생각해볼때가 있다.

그럴때마다 생각보다는 악의를 품고 있음에 적잖이 놀라고만다.

 

슈카와 미나토의 단편을 모은 수은충은 굳이 죄와 벌이라는 덧붙이는 말을 달지 않아도 뱃속 깊은 곳까지 이야기들의 본질이 전해져온다.

수은충- 악의를 느끼는 순간 목덜미를 따라 기어오르는 가공의 벌레-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각기 다른 끔찍하고 동시에 매혹적인 일곱가지의 이야기를 담고있다.

훔쳐보기 내지는 불행에서 한걸음 뒤 떨어져 그 불행을 지켜보는 비열한 짜릿함을 수은충은 여지 없이 선사해 주었다.

살인, 근친상간, 자살, 따돌림, 탈선, 그 무엇도 뛰어넘을 듯한 손자에 대한 사랑, 울증에 걸린 아내와 살아가는 남자의 이야기 - 주위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일이거나 정반대로 너무 쉽게 접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인간의 근본적인 악의와 파괴성  곧 수은충의 이름으로 펼쳐진다.

 

읽는 동안 벽 귀퉁이에 숨어서 지켜보는 듯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일곱가지의 이야기들의 인물들이 사건의 끝에 목덜미를 기어다니는 수은충을 느낀다면 나는 이야기들을 읽는 내내 뒷덜미를 타고 오르는 수은충을 몇됫박 쯤 털어내려고 했다.

그만큼 이야기들의 흡인력은 두려움과 끔찍함을 동시에 지닌 매혹적이면서도 매혹적으로 느껴서는 안될 것만 같은 각성이 자꾸 일어났기 때문이다.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 때때로 가지게 되는 악의가 파괴적인 결과를 낳는 이야기들이 과연 그렇게 멀리에만 있을까 하는 물음과 함께 숨어서 지켜보며 마치 저들의 약점을 잡아챈듯 입꼬리가 올라가는 웃음을 짓는 모습이 자꾸만 겹쳐졌다.

근본적으로 악하다고 생각되지 않는 이들이 보여주는 악의와 파괴성은 그 누구라도 평범함의 반대에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악함을 생각하게 만든다.

 

과연 작가는 어디에서 이렇게나 끔찍하지만 때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수은충의 이야기들을 생각했을까 하는 감탄이 나온다.

개인적으로는 상식을 뛰어넘는 손자에 대한 사랑을 담은 대울타리의 날과 아이들의 탈선을 담은 미열의 날이 인상적이었다.

한숨에 읽어내지 못하고 치밀어오르는 불편함과 울렁거림을 떨쳐내기가 힘들었다.

 

끔찍해서 매혹적이고 두려움이 가져다 주는 호기심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수은충에서 악의와 파괴성을 가진 인간의 본질과 본성에 대해서 깊게 생각할 만한 생각의 거리를 찾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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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길, 우즈베키스탄을 걷다 - 실크로드 1200km 도보횡단기
김준희 글.사진 / 솔지미디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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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우리 국가대표 축구팀과 축구를 하는 나라, 옛 소련이 붕괴하면서 독립한 나라, 실크로드가 지나는 나라, 구잘 같은 예쁜 여자들이 사는 이슬람의 나라.

과연 우즈베키스탄에 대해 알고 있는게 얼마나 될까 손가락을 펴며 생각해보아도 더도 말고 딱 요만큼만 떠오르는것을 보니 내게 실크로드의 그 나라는 참 멀고도 먼 나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구촌의 나라들을 여행하는 여행가들의 발자국을 따라 그들의 눈과 귀와 피부로 느끼는 것을 전해주는 티비 프로그램에서 중앙아시아의 나라를 만난적이 있었다.  화면에 눈을 고정하고 우리와는 다른 환경에서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사는 그곳을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가끔 죽기전에 꼭 가봐야 할 곳을 적어두는 너덜해진 수첩 귀퉁이 어딘가에 이슬람 사원이며 광장이며 마을 들을 적어두었었는데 펼쳐보니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 칸트라고 쓰여져 있다.

 

사실 사마르칸드는 내가 사는 이곳의 아주 오래된 여성복을 파는 가게 이름이다.

초등학교때 부터 있었으니 벌써 수십년이나 그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중인가보다.

자신을 위해선 수첩하나 사기를 망설이던 내 아버지는 어느날 길가에 버려져 있던 사마르칸트라고 쓰여져 있는 택을 한무더기나 주워 왔다. 아마도 가격을 붙이는 태그 였나본데 주워온 옷가게 가격표 사마르칸드는 아버지의 메모지로 수첩으로 오랫동안 흔하게 접하긴 했었다.

굳이 구차하게 이런 에피소드 까지 털어놓지 않아도 우즈베키스탄의 이질적이고 신비로운 풍광은 언제나 눈길을 사로 잡기에 충분하다.

 

우리의 여행자인 저자는 우즈베키스탄을 횡단하는 1200km 의 실크로드를  도보로 출발한다.

과거 육상 실크로드가 번성했을때 상인들이 낙타를 타고 통과 했을 사막, 수많은 상인들이 걸어서 지나다녔을 사막을 가로지르는 실크로드.

우리의 여행자는 용감하게도 도보를 선택했다. 그 땅속 깊은 곳엔 이미 옛 사람들의 발자국이 남겨져 있을 그 길을말이다.

사막을 경험해보지 못한 나같은 사람은 사막이 연상시키는 고독과 황량함, 두려움을 채 극복해 내지못할 것이다.

우리의 용감한 여행자는 사막을 지나며 우즈벡의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음식을 먹고 마시며, 그들이 잠을 자는 그 땅위에서 잠을 잔다.

이방의 사람에게 친절한 우즈벡 사람들, 이미 우리의 여행자 보다 먼저 도착한 기업이나 드라마의 한류가 아니었더라도 그가 만난 우즈벡 사람들의 친절과 호의는 넘쳐났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비스듬히 눕듯이 해서 음식을 먹는 느긋한 사람들의 순박하고 여유로운 마음들이 전해져오기 때문이다.

1200km 의 감히 가늠하기도 힘든 그 거리를 도보로 완성하는 우리의 여행자는 칭기즈칸과 티무르가 제패한 실크로드의 나라를 온전히 도보로 완성해 낸다.

 

우즈벡의 엉망인 수도시설에 펑펑 쏟아지는 한국의 수도꼭지가 그리웠고, 김치찌개와 편한 잠자리가 그리웠을 우리의 여행자는

사막을 걷고 또 걸으며 그가 흘렸을 진한 땀방울에 그곳의 모래바람을 담아 전해준다.

결국에는 터져버린 그의 운동화는 우리의 여행자가 얼마나 성실히 걸었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걸으며 만난 우즈벡 사람들과 마신 술에  어쩌면 같이 취하고 같이 잠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여행자가 물론  나같은 사람에 비할 평범한 사람이기야 하겠는가 만은 친숙하고 친근하게도 우리의 여행자는 그의 1200km실크로드 횡단기에 기꺼이 동행을 허락해주었다.

 

오래된 길, 우즈베키스탄을 지나는 실크로드

어쩌면 죽기전에 가보아야 할 곳 이라고 쓴 제목 아래에 한군데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을것이다. 

그러나 책을 덮으며 마음 한 곳에 그곳을 담아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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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성 - 무애도인 삶의 이야기
김광식 지음 / 새싹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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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의 눈을 가진 스님, 춘성.

언제나 불교 아닌 다른 종교를 가지고 살아 왔던지라 불교에서 전하고자 하는 것들을 알지 못했다. 그러니 자연히 수행하는 스님들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스무살 무렵에는 뒤늦게 사춘기가 오는지 매일 밤이 까닭모를 고민으로 힘들어했었다.

그때에 읽은 책들이 고은님의 화엄경과 내용이 상당히 파격적이었던 김성동님의 만다라 였다.

화엄경의 두툼한 부피에 기가 눌렸지만 나름 인내하는 도를 닦는답시고 한장 한장 읽어내려가던 기억이 난다.

만다라를 읽으면서 도대체 삶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떠나지 않았다. 만다라의 법운은 아직은 어렸던 내가 이해하거나 혹은 이해하지 못하거나 했던 기억만 남은 것을 보면 그 나이의 다른 종교의 나는 퍽이나 충격을 받았던것도 같다.

책으로 접하거나 방송을 통해 알게되는 속세에서도 저명한 스님들의 이야기를 접하게 되면 그들의 무소유와 나눔과 자비가 언제나 존경스러웠다.

스님이란 자고로 도인 같아야 하고 말씀이 별로 없으나 한번 가르침에 많은 이들이 깨달음을 얻고, 언제나 무소유를 실천하며 바른말 고운말을 쓰는 이 일것이다 하는 고정관념과 편견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종교인을 대하게 될때면 항상 그들에게 나와는 차원이 다른 성숙한 인간의 모습을 원하는지도모른다. 스님을 만나면 부처님을 원하고 목사를 만나면 예수를 원하는 그런 어리석지만 수줍은 바람처럼.

깊이 뿌리 박힌 편견을 가끔씩 확인 하게되지만 별로 스님을 만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이유로 운동하는 체육관이나 상점등에서 스님을 만나게 되면 가끔씩 어리석게도 실망한 적이 있었다. 그들에게 생활인이 아닌 도인의 모습만을 찾기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책 속에서 춘성 스님을 만나고서 내 못난 편견들이 얼음이  천천히 녹으며 물이 되듯이 그렇게 하나 둘씩 녹아 내림을 발견할 수 있었다.

너무도 유명한 만해 한용운 스님의 제자이고 그를 시봉한 스님이며 평생 이불을 덥지도 않았던 춘성.

입은 옷 한벌 외에 옷을 가진 적이 없고 물욕 또한 없어 주머니에 돈이 생기면 생기는대로 필요한 이에게 줘 버리는 바보 스님 춘성.

원색적인 욕 속에도 가르침을 담았던 진정한 무소유의 실천자이며 무애도인이었던 춘성.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말라시던 말씀에 그동안 세인들에게 거의 알려진바 없으나 호탕한 법문과 성품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다시금 세상에 알려지고 있다.

책속에서 만난 춘성 스님의 일화와 스님을 기억하는 이들의 증언은 무애도인으로 살다간 춘성을 세상에 일러주는 듯 하다.

스님의 원색적인 욕이 담긴 말들과 때론 무심한듯 던지는 스님의 말들은 그동안 내가 원하고 그려놓았던 편견 속에서의 스님의 모습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책을 읽으며 춘성 스님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이 기뻤다. 그러나 그보다 더 스님의 법문과 일화 말씀등을 통해 그동안의 편견속에서 어리석었던 나를 돌아볼 수 있음이 또한 기뻤다.

 

춘성이 입적한지가 오래고 그를 알던 사람들 또한 시간이 많이 흘렀다 한다. 춘성을 기억하고 기리기 위해 많은 자료의 조사와 먼길, 많은 사람들을 만났을 저자의 발걸음 발걸음 마다에 춘성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묻어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보름 가까이 책 속의 춘성 스님을 만났다. 그저 허투루 읽고 넘겨 버리기엔 책속 춘성의 가르침이 무거운 무게를 가졌기 때문이다.

누운 머리 맡을 몇날이고 지켜주던 춘성의 이야기.

 

범의 눈을 가진 스님의 모습에서 진정한 무소유를 실천한 무애도인의 삶을 감히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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