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푸르셰 지음, 김주경 옮김 / 비채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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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로운 유부녀 로르와 무기력하고 공허한 미혼남 클레망의 자기파괴적인 사랑이야기.

사회학과 교수인 로르는 ‘이 시대’를 논하는 심포지엄의 진행자가 되고 패널로 초청된 클레망과 어느 레스토랑에서 짧은 만남을 가진다. 둘은 곧 첫 눈에 반하게 되고 그대로 불이 붙고만다.
두 사람 모두 사랑과 열정이라는 감정과 죄책감과 수치심이라는 상반된 감정이 서로 공존한다. 로르는 죽은 어머니와 클레랑은 반려견‘파파’와 대화를 하며 감정을 서술한다.
둘은 같이 불타오르지 않고 각자 따로 타오르며 소멸한다.

어찌보면 결말이 빤히 보이는 불륜이야기지만 뒷 맛은 씁쓸하기만 하다. 불은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맨 처음 불꽃이 튀며 시작되었다가 세상을 태울 듯 활활 타오르기도 하고 언제 그랬냐는 듯 소멸하기도 하고, 결국엔 하얀 재로 남아버린다.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는 이 모든 것을 보여준다. 하얗게 남은 잿더미에서 나는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

둘 사이 점점 불이 붙으면서 갈수록 파국이 되어간다. 글쎄. 불륜남녀의 처참한 결말을 기대하고 읽긴 읽었지만 이 정도 까지 바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결말 덕에 책을 덮고도 한참 생각하게 되었다. 왜 그 편지는 로르에게 가고 만걸까. 하얀 재에서 다시 새싹이 자랐던 로르는 그 뒤에 어떻게 되었을까. 그의 딸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클레망의 어머니는 어떤 감정을 갖고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잔뜩 그을린 채 살아가고 있는 걸까.

책 마지막에 실려있던 옮긴 이의 글에서 이 시대는 타고남은 하얀 재같은 피로의 시대라고 했다. 그래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저마다 무언가를 위해 다시 뜨겁게 타오르기를 바라는 지도 모른다고. 신을 향해서든, 연인을 향해서든, 혹은 예술이나 욕망을 향해서든. 타오를 수 없다면, 하다못해 훨훨 타오르는 불길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기라도 원하는지 모른다 고 했다.
책을 읽는 내내 타오르는 불길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기분이 들었다. 결국 하얀 재로 남았지만 말이다.

올해의 마지막으로 읽게 된 책이다. 아주 잠깐이나마 열정과 냉정사이가 떠오르기도 했다. 결혼과 마지막 사랑. 혹은 그 후에 빠지게 된 사랑.
사랑이 뭐길래 사람을 이렇게 만드는 것일까. 나의 사랑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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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 이야기
기시 유스케 지음, 이선희 옮김 / 비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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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을비이야기 #기시유스케

일본 호러소설 일인자 기시 유스케가 쓰는 절망과 공포로 가득한 이야기

표지가 대놓고 이건 호러소설!! 하는 게 보여서 큰 기대 없이 읽었으나 이게 웬걸, 취향 저격 당했다.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완독했다.

책은 4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해진 운명대로 흘러가는 네 명의 주인공들이 순응하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며 제각각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렇게까지 발버둥 치며 저항했는데도 결국엔 그렇게 되다니, 나 역시 운명은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더욱 몰입해 읽을 수 있었다. 죽을 운명인 사람은 이 장소가 아니더라도 죽고, 살 운명인 사람은 무슨 일을 당해도 산다고 생각하기에 이 주인공은 어떤 최후를 맞이할까 추측해 보기도 했다.

사실 책 전부 좋았지만 그중 제일 마음에 들었던 단편은 두 번째 이야기인 '푸가'다 실종된 작가가 남긴 글을 바탕으로 초자연적 현상을 파헤친다. 그 작가가 남긴 글이 일기인지 소설인지 모호하게 시작한다. 간헐적으로 자고 일어나면 미지의 장소에서 깨어난다고 했다. 다른 마을, 숲, 해변까지.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눈의 ㄹ뜨는 게 두려운 나머지 운명을 거역하기로 마음먹는다. 출판사 관계자는 실종된 작가를 찾기 위해 그의 일기를 분석해 본다. 그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읽으며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어떤 방법을 썼을까 상상했다.

나라면 무서운 주술들을 쓰지 않고 그냥 매일 생존 가방을 메고 잠들었을듯하다. 항상 복대를 차고 핸드폰과 신용카드를 몸에 지니고 살지 않았을까. 이건 저항이 아니라 순응인 걸까.

작가는 피할 수 있는 운명이라도 최대한 저항하고 운명에 맞섰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세상 모든 생물 중에 인간밖에 없다고 했다. 그런 상황을 만들어 놓고 즐기는 아주 못된 신 같았다. 기대도 안한 책이 예상외로 즐거웠을 때는 정말 로또 맞은 기분이다. 읽는 내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궁금해 눈을 뗄 수 없었다. 작가의 다음 책인 '여름비 이야기'도 기대된다.
제일 먼저 읽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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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 밀크
데버라 리비 지음, 권경희 옮김 / 비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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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 모를 병으로 다리마비 증상을 겪는 어머니 ‘로즈’와 간호하기 위해 일상을 포기 한 딸‘소피아’의 이야기

우리는 우리의 시선이 강력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보지 않는 척을 하는 거야.

이혼을 하며 상실감을 느끼고 혼자 딸을 키운 엄마, 30살 어린 여자와 재혼을 하여 새 가정을 꾸린, 그리고 나의 존재를 부담스러워하는 아빠. 그리고 학업을 포기하고 엄마의 간병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딸.

왜 로즈가 다리마비 증상을 겪는 건지, 왜 절단을 요구하며 극단적으로 행동하는 것인지.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읽는 내내 궁금했다.

나 역시 누군가의 딸이기도 하고 제일 가깝다고 여긴 등장인물이 소피아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소피아의 관점에서 이해하며 읽었다. 로즈가 진짜 원하는 답은 무엇인지 계속 생각했다.
나도 소피아였다면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고 똑같이 괴로워했으리.
엄청난 회피형인 나는 더욱 긴 시간동안 앓았겠지.

평론가들은 탁월한 비유와 상징으로 가득한 책이라 극찬을 하였으나 난 내공이 부족한 탓에 단번에 알아차리기 힘들었다.
다 읽고 나서 아아 메두사. 이럴 뿐

묶인 강아지를 걱정하고 풀어주던 소피아는 강아지의 모습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을 것이다. 강아지와 같은 미래를 상상해봤다.

스페인 해변에서 벌어지는 잉그리트와의 이야기도 좋았는데 내용을 환시기킬뿐 아니라 소피아의 여러 모습을 살필 수 있어서 즐거웠다.

엄청난 갈등을 겪는 모녀지만 둘 사이는 미적지근하다. 소리 지르며 폭발하는 장면이 없다. 괴로워하며 묵묵히 서로의 곁을 지킬 뿐이다.

괴롭지만 서로를 놓을 수 없는 모녀. 사랑과 증오로 똘똘 뭉친 그들의 미래는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

물을 떠주는 장면에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책을 다 읽고도 자리에서 쉽게 일어날 수 없었고 계속해서 생각하게 만들었다. 소피아 행복해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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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교 시네마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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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리쿠 #육교시네마

7년만에 돌아온 온다리쿠의 단편집.
Sf, 스릴러, 호러 다양한 단편들이 실려있다.

내가 특히 좋았던 단편은 구근, 그리고 아마릴리스. 나폴리탄 괴담을 좋아하는데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행동을 조건을 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려운 금기가 있는것도 모두 흥미로웠다. 항상 이런 이야기를 읽을 때면 나라면 어떤 행동을 했을까 상상해보게 되는데 이야기 속 주인공처럼 다른 선택지가 없는 숨막히는 순간을 생각해보는 것만으로 온 몸에 소름이 돋는다.
왜 하필 구근이고 왜 하필 아마릴리스일까. 작가의 의도를 유추해보기도 했다.

책의 제목인 단편 ‘육교시네마’도 무척이나 좋았다. 과거의 추억을 육교위에서 본다는 아름다운 감성의 이야기. 다른 단편들과 사뭇 다른 느낌이다. 작가의 말에서 이야기 하듯 ’아주 나다운 단편‘이라고 한다. 다양한 각도로 세상을 바라보고 상상해 나간다.

작가의 말처럼 초콜릿 상자같다는 이번 책. 어떤 건 입맛에 잘 맞지만 어떤 건 좀 이상할지도. 무슨 초콜릿일지 직접 열어보고 맛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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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라와 아키라
이케이도 준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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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이도준 #아키라와아키라

 

동명이인 아키라와 아키라.

작은 부품공장의 아들로 아버지의 사업실패와 야반도주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아키라와 해운회사 경영자 재벌집안의 후계자로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아키라. 이름만 같을 뿐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란 두 아키라가 은행에서 만난다.

왜 그들은 은행원이 되었고 그들 앞에 펼쳐진 운명은 무엇인가.

 

책의 작가 이케이도 준은 대형은행에서 일한 경험을 살려 금융업계 등 기업 관련 소설에서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여 일본의 국민작가로 사랑을 받고 있는 소설가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1970년대에서 2000년 초반까지 일본을 배경으로 경제적 상황을 현실적으로 그려낸다. 거품경제의 붕괴로 인한 기업의 위기를 아주 실감나게 표현했다.

 

책 초반까지는 두 명의 아키라가 서로 경쟁하고 연적이 되어 착한아키라가 나쁜아키라를 물리치는 내용일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 착각이고 두 명의 아키라가 서로 도와 위기를 극복해나가는 과정이 주였다.

 

유년시절은 부품공장 아키라가, 은행원이 된 후에는 해운회사 아키라의 분량이. 이렇게 분량이 나누어져 있는 점도 아쉬웠고, 부품공장 아키라의 친구들에게도 정이 갔는데 그에 대한 분량은 증발해버린 점도 아쉬웠다. 이대로 사라지긴 아쉬운 조연들인데 너무 야박하게 정리한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책의 마지막 뒷심이 빠졌나 싶을 정도로 술술 잘 풀렸는데 오히려 기분 좋게 책을 덮을 수 있도록 유도한 거라 생각하겠다.

 

우리나라 은행원들도 책속 뱅커와 비슷한 일을 할지 궁금하기도 했다. 각각의 아키라가 상반되는 매력을 보여주는 것도 좋았지만 특히 부품공장 아키라가 본인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좋았다.

6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에 분식회계같은 생소한 단어들로 가득했지만 이 문제를 어떻게 돌파해 나갈까 궁금했고 집중하게 만들어 순식간에 읽을 수 있었다.

 

머리 아프지 않게, 기분 좋게 응원하며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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