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가 품은 세계 - 삶의 품격을 올리고 어휘력을 높이는 국어 수업
황선엽 지음 / 빛의서가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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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가 품은 세계 - 황선엽



아홉 살 아이는 수시로 엄마인 내게 묻는다. ”엄마, 철이 뭐야? 철이 든다는 게 무슨 뜻이야?“ fe가 아닌 건 알겠는데 단박에 튀어나올 말을 못 찾아 어버버 하며 머리를 굴렸다. ”정확한 뜻은 아닐 것 같은데, 엄마가 생각하기엔 어떤 시기에 어울리는 태도와 자세를 일컫는 말인 것 같아. ’한 철‘이 한 시기를 뜻하는 말이거든“ 추가적인 질문과 대답으로 어느 정도 궁금증이 해소된 아이는 다시금 또 물어온다. ”엄마, 그럼 양치질은 왜 양치질이라고 하는 거야?“

이른 새벽 일어나 무심히 책을 읽다 말고 양치질의 어원에 대한 챕터에서 눈이 번쩍 떠졌다. (양치질 설명이 어려워 네이버 사전 검색했을 때 나온 단순한 의미만 전달하고는 대답을 마무리했었다) ’양치‘를 한자어로만 생각했기에 ’양‘자를 뜻하는 기를 양(養)에서 아이에게 무어라 설명해야 할지 몰라 버벅였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양치‘의 어원에 복잡한 사정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 어찌나 개운하던지!)

양치라는 말은 ’양지‘라는 말이 변환된 것이고 양지는 버드나무 양(楊)과 가지 지(枝) 뜻으로 ’버드나무 가지‘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양지를 한 번 더 검색해 보면 ’나무로 만든 이쑤시개, 불교도들에게 냇버들 가지로 이를 깨끗이 하게 한 데서 유래‘했다는 뜻이 쓰여 있다. 오래전 이를 깨끗이 하기 위해 버드나무 가지를 씹던 것에서 유래된 양지 질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지‘자가 ’치‘ 자로(한자어로 치아) 인식되며 변하게 된 단어이다.

이 부분에서 저자는 말한다. 단어는 시대상에서 자연스럽게 변한다고. 기원이 흐려지고 익숙한 문화의 영향을 받아 변하는 단어는 바꿔 부르는 것에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고로 여전히 무람없이 사용되는 일본어를 다시금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1996년 문화체육부에서 대체어로 고시한 돼지고기 너비 튀김, 돼지고기튀김은 무엇을 뜻하는 단어일까? (돈가스가 일본어라는 사실 자체를 처음 알게 된 1인, 충격이었다)

결국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에서 삶의 과거와 오늘, 나아가 내일까지 톺아볼 수 있다 말하는 저자의 메시지가 의미 있게 다가왔다. 양치질의 어원도 모르고, 아이에게 그것을 설명해 주지 못하는 내가 잘못된 게 아니라 단 한 번도 그것에 의문을 가져보지 않은 게으름을 마흔이 훌쩍 넘은 지금 넘치게 헤아려본다. 단순하게 단어를 정확하게 아느냐 모르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단어의 변천사 속에 깃든 지난 삶 속의 그들을 떠올려보고, 변화되거나 혹은 변화되지 않은 단어들 속에 숨겨져 있는 의도와 맥락까지. 두루두루 넓혀 생각해 볼 수 있는 혜안을 얻었다.

잠시 후 아이가 일어나면 꼭 말해주고 시다. 버드나무 가지를 뜻하는 양지에 대해서. 더불어 요지와 이쑤시개까지 아이에게 설명해 줄 생각이다. 그것은 모르던 것을 알게 되었다는 안도가 아닌 단어 하나에도 마음과 정성을 기울여 나와 나를 둘러싼 세상을 한 번 더 떠올려보는 의미 있는 시간이라는 사실을 아이와 이야기 나누고 싶다.

@readers_gr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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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의 시대 - 다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자연에서 배울 수 있는 것
프란스 드 발 지음, 최재천.안재하 옮김 / 김영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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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의 시대 - 프란스 드 발

브라이언 헤어의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의 머리위를 고공행진중이다. 한국에서 10만부 이상을 팔며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렸다는 그 책은 운이 좋게도 ’김영하 북클럽‘을 통해 만났었다. 처음 책을 읽었을 때만해도 소화하기가 조금 어려웠는데 얼마전 재독은 무척이나 흥미롭고도 감동이었다. 이후 동물의 친화력을 다루는 책들을 두루 접하면서 나름대로의 사유를 충분히 건져낼 수 있었다.

최근 읽게 된 <공감의 시대>는 2009년 출간된 책으로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보다 이전에 세상에 나왔다. 2017년 최재천교수님이 번역해 한국어판으로 세상에 나온 책은 기대이상으로 무척 흥미로웠다. 개정이 되면서 부제가 바뀌었다고 한다. ’공감본능의 진화‘ 에서 ’다정한 사회‘로 바뀐 부제에서도 느껴지듯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이 책은 비단 ’동물‘의 이야기에만 국한 되지 않는다. 책 속에서 만난 문구 ’무엇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가?‘에 조금 더 눈길을 머물면 이 책으로 저자가 하려는 말들이 십분 공감 될 것이다.

많은 동물이 열거되면서 그들의 행동에서 보이는 친화적 양상을 실제 연구사례로 친절하고도 타당하게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내게 특히나 흥미로웠던 지점들은 모두 ’인간‘에 관한 내용들이었다. 행동학의 아버지라 일컫는 존 왓슨의 아기공장 실험이라든가 (모성애에 대한 반감, 아이들에게 정서적 유대 주지 않고 신체접촉 차단하자 좀비처럼 무표정한 모습으로 지내던 고아들의 사망률이 100%였다는 사실), ’자연주의적 오류‘라고 해서 다윈의 자연선택설의 오류를 설명하는 부분 (경쟁은 좋은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 고로 사회에 이득을 준다는 개념으로 도덕적 딜레마를 제거하기에 적합한 이론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탄생한다), 또 ’몸 우선론‘이라 해서 몸에서 먼저 시작되는 감정에 대한 이야기 (신경과학자 베아트리체 드 겔더의 몸짓 연구에서 얼굴(표정)보다 몸짓에서 표현되는 감정을 우선 느낀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2008년 중국 지진때 한 여경이 재난 현장에서 고아들에게 젖을 물렸다는 이야기등 인간에 대한 이야기들에 나의 마음이 꿈틀댔다.

그것에 결과적으로 내가 얻어낸 건, 인간사회에서 드러나는 대부분의 군상이 동물들의 삶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부상을 입은 종족을 위해 양 쪽날개모양으로 돌고래를 받치고 나아가는 돌고래들의 모습, 죽은 종족의 사체 옆에서 한참을 서 애도하듯 발로 남은 뼈들을 툭툭 쳐본다는 코끼리. 그러다 어떤 코끼리가 뼈조각을 들고 가면 찾아가 그 뼈를 도로 사체의 옆에 갖다둔다는 사실들. 무엇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가?에 함몰되면 인간만이 이로움을 위해 행동하는 존재로만 해석될 소지가 높다. 이제는 무엇이 우리를 생존하게 하는가?로 조금씩 우회할 필요가 있어보인다.

공감이나 자기인식에 있어 종간의 구분을 짓는 선은 여전히 온전하게 남아 있지만, 아마 처음 나왔을 때보다는 조금 모호해졌다. 언제나 이렇다. 즉 우리는 인간과 유인원, 혹은 유인원과 원숭이처럼 날카로운 경계를 상정해놓고 시작하지만, 사실 우리가 다루는 문제는 지식의 바다가 한번 씻어 내려가면 그 구조를 많이 잃어버리는 모래성과 같다. 모래성은 언덕으로 변하거나 더 평평해지기도 하며, 결국 진화론이 이끌어주는 곳으로 항상 돌아오게 된다. 완만하게 경사진 해변인 것이다. 206p

인간적인, 인간성 같은 단어에 희생이나 투혼, 동정이나 연민, 연대나 유대같은 단어를 가져와 쓰는 대상이 비단 인간만이 아님을, 고로 동물들의 작은 행동 하나에도 이 세계를 이루고 있는 절대적 행위라는 걸 다시금 되내어본다. ’자연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비단 이타심뿐이겠는가. 이 시대에 ’공감‘이라는 키워드가 주는 무게가 꽤 묵직하다.

@gimmyoung

#도서지원 #김영사 #책벗뜰 #책사애24149 #최재천 #안재하 #공감의시대 #개정판 #생물학 #진화론 #다윈주의 #적자생존 #과학서 #교양 #공감본능 #공감능력 #양산독서모임 #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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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그리고 별이 기다리고 있음을 나는 안다 - 찬란한 은둔자 헤르만 헤세, 그가 편애한 문장들
헤르만 헤세 지음, 두행숙.유혜자 옮김 / 문예춘추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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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그리고 별이 기다리고 있음을 나는 안다 - 헤르만 헤세

헤세의 글귀, ’그가 편애한 문장들‘이라는 부제로 은둔자 헤세가 하려는 말들을 정돈된 페이지에서 편지처럼 읽은 책이다. 필사집으로 처음 만난 #헤세단 의 첫 책.

<밤 그리고 별이 기다리고 있음을 나는 안다>를 소개해 볼까한다. 올해 초 우연히 들른 작은 도서관에서 대출을 하려고 선 데스크 앞 a4 면지가 도톰하게 쌓여 있는 걸 보게 되었다. 바로 옆에는 프린트 된 문서들이긴 했지만 모두 헤세의 글귀들을 일일이 타이핑 해 놓은 문서들이었다. 그것에서 마음에 드는 글귀를 ‘필사’하면 선물로 미니 화분과 씨앗을 주던 행사였다. 망설일 것 없이 가장 눈에 띄는 글귀를 옮겨 적었다. 그때, 필사했던 글귀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자연’에 관한 내용이었다는 건 분명하게 기억난다. 이 필사집 또한 자연과 나, 감각과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들로 뜨겁기보다는 적당한 온도로 내게 다가왔다.

헤세는 소설로만 만났던 나라(마흔 넷, 현재까지 나의 인생책을 꼽으라면 나는 ‘데미안’이다) 프린트 용지로 만난 헤세의 잠언 같은 글귀들이 그때는 꽤 인상적이었다. 지금 이 필사책으로 한번더 만난 헤세의 글귀들은 소설 속에서 느꼈던 폭풍같은 격정에서 잠시 떨어져 그의 삶 자체를 엿보며 배울 것들을 챙겨갈 수 있었다. (잠언을 따로 쓴 것이 아니라 그의 시와 에세이 속 글귀들을 모아 놓은 책이라 더 좋았다)

필사, 작년부터 쭉 이어오는 필사(#필사하는마음)는 지금 내 삶에 작지만 소소한 행복이 분명하고, 헤세단의 책들 중에서도 이 책을 가장 먼저 이야기 하고 싶은 생각에 며칠을 책상에 올려두고는 짧은 글귀들을 수시로 읽었다. 유려한 글귀로 감정이 사로잡히는 글이라기보다 담백하고 진솔한 문구들 속에서 다름 아닌 ‘나’를 떠올려 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밤, 영혼, 방랑, 감각, 지상… 따위의 단어들을 더듬으며 표지 그림 속 윤슬을 바라보는 듯 잔잔해져 오는 마음이 퍽이 달큰한 필사집이었다. 대부분의 문구들을 읽기만 했고 직접 쓰지않은 이유는, 연말 소중한 지인에게 선물해주어야 겠다는 다짐이 일었기 때문이다. 좋은 책은 나눠봐야지. 선물하기 좋은 필사집으로 추천하며, 이후에도 이어질 #헤세단 책들을 기대해 주길 바란다.

@moonchusa

#도서지원 #문예춘추사 #헤르만헤세 #필사집추천 #도서추천 #필사 #책벗뜰 #책사애 #양산독서모임 #양산 #헤세단 #책스타그램 #필사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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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자리 - 개정판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 지음, 신유진 옮김 / 1984Books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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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자리 - 아니 에르노

최근에야 나는 소설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질적 필요에 굴복하는 삶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예술적인 것, 무언가 ‘흥미진진한 것‘ 혹은 ‘감동적인 것‘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나는 아버지의 말과 제스처, 취향, 아버지의 인생에 영향을 미쳤던 사건들, 나 역시 함께 나누었던 한 존재의 모든 객관적인 표적을 모아보려 한다. 17

책벗뜰 ‘아니 에르노 읽기‘ 마지막 책이다. 처음 독모를 기획했을 때 책 선정에 꽤 고민이 많았다. 출간 순으로 읽어야 하나? 배경 순으로 읽어야 하나? ‘아니 에르노‘ 하면 떠오르는 책들을 위주로 읽어야 하나? 길지 않았지만 꽤 진지하게 고민하고 나서 선정한 책들은 그녀 삶의 ‘의미‘였다.

나 또한 그녀의 작품을 거의 읽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내용을 파악하고 있지는 못했다. 다만, 친절한 사이트 ‘책 소개‘를 정독하며 그녀의 유년, 그녀의 부모, 그녀의 남자, 그녀 자신의 성장기로 가닥을 잡았다. 그렇게 선정한 책들을 독모 회원들과 6개월간 읽었다. 6권의 책을 다 읽은 지금, 가장 처음 만났던 책 <단순한 열정>이 가장 노멀 한 책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 <남자의 자리>는 ‘남자‘라는 명사를 빼도 내용을 벗어나지 않지만 남자라는 단어가 붙음으로 해서 그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도 각각의 ‘자리‘가 있다는 걸 어렴풋하게나마 알려준다. 옮긴이의 말마따나 작품 속 그녀와 그의 이야기에서 우린 왜 우리를 보고 있나. 이 지점이 그간 아니 에르노 작품을 읽으며 가장 절실히 느낀 점이다.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그 표적(겉으로 드러난 자취)을 모으겠다는 저자의 글은 꽤 순하다. 독모 참여자 대부분 그간 읽은 책에 비해 가장 읽어내기가 편안했다는 의견이 많았다. 나는 그것이 그녀가 17페이지에서 말한 이 글의 서두, ‘한 존재의 객관적 표적‘에 이유를 둔다. 아니 에르노 작품을 계속 읽다 보니 나도 글이 쓰고 싶어졌다. 이런 글 나도 쓸 수 있어! 가 아니다. (절대 아니다) 옮긴이가 말한 그것, 그녀의 이야기인데 그 속에서 나의 이야기로 치환되는 과정을 숱하게 겪었다. 보편적 경험이라 말하고 싶은 잊고 지낸 그 일들, 이를테면 악몽 같은 기억, 난데없이 되살아난 트라우마, 미친 듯 달려들던 주체 못 한 욕망... 그런 내밀한 감정들이 바닥으로 떨어뜨린 콜라의 마개가 따진 것처럼 기둥을 세우며 펑 하고 터져 오른다.

최근 글쓰기에 정성을 쏟고 있다. 계기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다음 이유가 없을 정도로 그녀의 소설 덕분이다. 그녀의 글을 읽으며 나의 경험 또한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는 걸 깊이 느꼈다. 문학을 배운 적이 없지만 혹, 나에게 문학이 무어냐 묻는다면 이런 것이리라. 분명 다른 나라, 다른 배경, 다른 나이, 다른 사람인데 이상하게 그것들을 읽어 내리고 나면 정형되지 않은 내가 보이는 것. 바로 타자 도식이다.

아버지가 없는 내가 이 책을 읽으면 응당 나의 아버지가 생각날 것 같지만 0.1도 아버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발제를 보고, 독모를 하며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긴 했지만 책을 읽는 동안은 전혀 ‘나의 아버지‘를 떠올리지 않았다. 다만, 각각의 자리에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인물을, 저자의 서술처럼 주관적 감정이나 짐작을 배제하고 보이는 그대로 묘사하는 장면들에서 나를 둘러싼 각각의 자리들을 떠올렸다.

오래전, 지금은 세상에 없는 큰 외삼촌이 장기를 가르쳐 줬다. 장기를 배울 때 내가 가장 재미있어 했던 건 말 사이의 거리였다. 각 말들이 움직일 수 있는 방식이 정해져 있고, 그것으로 적진을 향해 앞으로 옆으로 머릴 써서 나아가는 게임. 각 말들의 자리, 그러니까 이미 포진된 말의 자리에 따라 내가 설자리가 정해지는, 그것들과 따로 움직여 무조건 나아가고 싶다고 나아가지는 것이 아니라 좁은 판위에서 주변 말의 자리를 끊임없이 주시하며 나의 자리를 찾아가는 장기. 장기판 위의 모든 말들은 그렇게 저마다의 자리와 움직임의 반경이 정해져 있었던 거다.

누군가를 지켜내기 위해 무수히 내버려진 작고 작은 장기 알들. 누군가가 우릴 지켜주었다면 그건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것이 아닌 우리의 위치를 먼저 정해둔 뒤 당신의 자리를 조절해가며 끊임없이 움직였을 그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책벗뜰 아니 에르노 읽기는 추가 진행 예정이다. 아무쪼록 꾸준히 읽어오신 분들과 함께 조금 더 머물고 싶다.

#책벗뜰독서모임 #책사애 24141 #아니에르노 #1984 #남자의자리 #프랑스소설 #책추천 #양산독서모임 #양산 #강력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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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퍼와 나 - 나의 작은 딱지 이야기 비룡소의 그림동화 332
베아트리체 알레마냐 지음, 정회성 옮김 / 비룡소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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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퍼와 나 - 베아트리체 알레마냐


육아서 <아이라는 숲>에서 인상적이었던 구절이 기억난다. 상처에 대한 저자의 사유였다. 상처를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말라. 그것은 경험의 흔적이다. 상처를 굴곡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지 가지고 있는 상처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면서 이어진 문구들에서 ‘얼굴’과 ‘여자’가 보였다.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 특히 얼굴에 상처가 나면 안 된다고 이야기하고 유독 ‘여자’에게만 그 흔적이 하나의 결격사유가 되기도 한다.

수년 전 그 책을 읽으면서 생각하기를 상처를 바라보는 각자의 시선이었다. 살아가다 보면 피치 못할 상황과 사고로 크고 작은 상처를 만나게 된다. 그것은 비단 몸의 어느 지점에서의 상흔뿐 아니라 보이지 않아 가늠하기 어려운 마음의 상처도 포함된다. 두 가지가 굉장히 다른 것 같지만 결국 몸과 마음은 하나로 움직이기 마련, 한곳이 아프다 해도 나머지 한곳이 편할 리 만무하다. 이 책 <페퍼와 나>는 그렇게 어느 날 우연히 마주하게 된 상처에 관한 이야기다.

작은 여자아이가 넘어져 무릎에 상처를 입는다. 괴물 같은 딱지는 점점 커지고 딱딱해서 볼 때마다 기분이 안 좋다. 어떻게든 떼어 내고 싶지만 알다시피 그건 시간이 걸려야 하는 일이다. 그렇게 ‘페퍼’라는 이름의 딱지와 동고동락하게 된 소녀. 다른 친구들도 저마다의 딱지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소녀는 자기의 페퍼가 제일 큰 것 같기만 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페퍼가 떨어져 나가고 순간 소녀는 뭔가 잃은 것만 같아 마음이 시큰해진다. 어딜 가나 함께였던 페퍼와의 이별이 생각보다 더 슬프게 다가온다.

돌이켜보면 그간 마주했던 상처들이 단 하나의 감정으로만 점철되지는 않는다. 손바닥 중앙에 반달 모양으로 꿰매진 자국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친구 집 앞에서 처음으로 자전거를 탔다가 넘어지며 유리병을 짚어 찢어졌던 자국이다. 물론 그때의 기억은 무섭고 아팠지만 이제는 그 작은 상처 하나로 11살의 나와 친구가 잡아주지 않아도 앞으로 나아가던 자전거에 몸에 싣고 나뭇잎 같은 바람을 가르던, 그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 삽시간에 몸 안에 들어찬다.

나의 작은 아이는 왼손 엄지손가락이 두 개인 상태로 태어났다. 생후 10개월 때 큰 병원에 가서 수술을 했다. 언제고 아이가 자신의 왼손을 내밀며 이 상처가 무어냐 물었다. 준비하지 않은 채로 상황을 맞닥뜨리니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고, 어렸을 때 다친 상처라고만 이야기하고 넘겼다. 하지만 아이는 분명, 흔들리는 엄마의 눈빛을 느꼈을 테고 이후 여러 번 자세하게 이야기 해달라며 그 상처 자국을 내밀었다. 고민 끝에 아이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해주었다. 모든 사람이 다 5개의 손가락으로 세상에 태어나는 건 아니라고. 하지만 그것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누면 안 되고 각자의 모습과 모양이 다른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고. 그랬더니 아이가 대뜸 버럭 한다. “왜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잘라냈어? 나만의 특별한 손가락을!”

세상의 상처들은 지워 마땅하다 생각했는데 이제 와 지난 내 삶의 상처들로 말미암아 지금의 내 자리와 시간이 주어진 게 아닌가 싶다. 이 모든 순간들이 감사하고 또 소중하게 다가온다. 나의 작은 아이와 지난날, 딱 내 아이만 할 때의 내가 오늘 하루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겠지. 그래서 글은, 아침에 써야 하나보다.


@birbi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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