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도무지 헤어나올 수 없는 아홉 가지 매력
윤준호 외 지음 / 지성사 / 200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제 막 자전거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던 터라, 제목이 눈에 확 들어왔다. 9명이 자전거에 대해 다양한 주제로 한 편씩 썼는데, 제 돈 다 주고 사보기는 좀 아까운 책이다.  

'지음'은 서울에서 유일한 자전거 메신저(자전거 퀵서비스맨)라고 한다. 돈을 많이 벌어 많이 쓰길 포기하고, 조금 벌어 조금 쓰는 삶을 선택하면 자전거 메신저가 꽤 괜챦은 직업이라고 했다. 그리고 동지를 그리워하고 있는 경험있는 자신이 있으므로 두 번째 자전거 메신저는 더 수월할 것이라며 자신의 직업세계로 들어오라고 꼬드긴다. 번잡한 서울시내에서 하루종일, 아니 계속해서 매연을 맡으며 페달을 밟는 게 진짜로 좋을까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본인은 좋댄다. 

가장 맘에 들었던 것은 '조약돌'의  글이었다. 그는 폭력이 자동차를 탐으로써 시작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매 순간 긴장을 하지 않으면 생사가 갈리는 속도의 자동차, 창문을 닫고 핸들을 쥔 순간부터 창 밖의 생물은 그저 지나가는 풍경 속의 무생물, 더 나아가 자동차가 가는 길에 놓여진 장애물이 되기 때문에 배려나 관심의 대상이 못 된다는 것이다. 상당히 그럴듯하다. 그래서 그는 떼잔차질이 단지 호기를 부리고 자전거를 선전하는 일을 넘어 폭력을 줄이고 배려와 관심을 촉구하는 평화운동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깊이를 바란 건 아니었지만, 나머지 글들은 좀 많이 가볍다.

오르막길에서 허벅지에 걸리는 무게가 점차 즐거워지고 있었는데, 100년만의 폭설과 한파라니-. 강화도 한 바퀴 도는 건 2월에나 가능할라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들풀에서 줍는 과학 - 한 세기를 걸어온 생물학자 김준민, 생명과 자연을 관(觀)하다
김준민 지음 / 지성사 / 200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자가 1914년에 태어났으니 100살에서 겨우 5살이 부족한 연세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있으면, 저자의 나이 많음을 종종 느끼게 되는데, 그건 전적으로 좋은 의미에서다. 우선 여유있는 태도로 인생을 관조하는 듯한 온화한 할아버지의 듣기 좋은 저음의 목소리가 느껴진다.(나는 저자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지만) 그리고 한 줄 한 줄 쉬우면서도 이해가 잘 가도록 다듬어진(아마 저자가 일부러 다듬지 않아도 저절로 다듬어져 나오는 것일 게다) 친절한 설명에서는, 자연에 대한 저자의 관심과 열정이 전해져온다. 책을 읽어갈수록 제목도 다시 뵌다. 들풀에서 줍는 과학, 제목도 얼마나 소박한가? 그러면서도 생태학연구가 과학에 있어 중요함을 잘 역설하고 있지 않은가?

나에게는, 과학책인데도 베토벤의 후기 피아노소나타를 듣는 듯한 느낌을 가지게 하는 책들이 몇 권 있다. ‘숲 속 수의사의 자연일기’가 그렇고 콘라드 로렌츠의 책들이 그렇다. (굴드의 책을 엄청 좋아하지만 그런 느낌은 아니다. 굴드의 글은 모차르트 협주곡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참나무, 이끼, 진달래 등에 대한 얘기가 1장의 내용이다. 2장에서는 식물의 일반적인 생태에 대해(적지, 먹이, 적, 단풍 등), 3장에서는 사회적 이슈가 되는 생태문제 몇 가지(산성비, 지리산 반달곰, 아카시아, 지구온난화 등) 4장에서는 식물의 범위를 벗어나 토양, 기후, 지구, 생물다양성 문제, 그리고 마지막 5장에서는 인간생활과 관계된 식물이야기(속담, 소나무 숲, 산불)를 다룬다. 교과서처럼 딱딱하게 정리된 이야기가 아니라 저자 개인의 경험, 감상, 의견이 섞여있는 에세이이기 때문에, 재미있으면서도 생각할 거리가 많다.  

진달래가 양지에서 핀다고 하나 직접 관찰한 바로는 그 반대다, 우리나라 대도시의 대기오염이 심각하고 악화되고 있다는 근거가 없다, 대기오염물질이 산성비 문제를 악화시킨다는 주장 역시 증거가 희박하다, 지리산에 반달곰을 방사하는 것이 과연 가능하며 바람직한 일일까, 아카시아가 과연 다른 식물을 못살게 하는 나쁜 나무인가, 지구온난화의 근거는 과연 얼마나 과학적인가 등, 저자는 평소에 의문없이 그러려니 넘어갔던 문제들을 짚으며 계속해서 ‘과학’의 잣대를 들이댄다. 그런데 그 딴지가 트집으로가 아니라 상당히 설득력있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저자의 연륜 과 소박한 문체 때문이리라. 진달래에서 시작해 전 지구적인 생물종다양성으로 이야기가 넓어지는데, 저자를 잘 따라가다보면 진달래 한 송이의 문제가 결국은 전지구적 생태계 문제와 연결될 수밖에 없음을 무리없이 깨닫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자는 실제 자연에서의 관찰과 탐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래, 그런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번 방학에 읽은 몇 권의 책들(윌슨의 ‘생명의 편지’, 위에 쓴 ‘숲 속 수의사의 자연일기’와 몇 번 째 다시 읽은 로렌츠의 ‘솔로몬의 반지’, ‘즐거움-진화가 준 최고의 선물’, 데이먼드 모리스의 자전적 에세이 등)이 모두 강조하고 있는 게 바로 그것이다. (자연상태에서의) 직접 관찰-. 아니 그들이 직접 그것을 주장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책을 읽다보면 직접 관찰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감하게 된다. 윌슨은, 환경교육의 시작은 생명체 관찰의 즐거움을 알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잘 정리된 과학책이 아니라 현미경과 도감을 사주라고 말한다. 과학의 출발은 공식이 아니라, 주변의 사물에 관심을 가지고 크게 눈을 뜨는 것, 책이 아니라 생명체를 바라보는 것!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과학과 사회운동 사이에서 - 68에서 게놈프로젝트까지
존 벡위드 지음, 김동광 외 옮김 / 그린비 / 200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글의 목적이라고 했다. 유전학자이자 '인간게놈프로젝트의 사회적 법적 윤리적 함의를 다루는 실무그룹' 위원인 저자인 둘 다를 성공적으로 해냈으며, 그런 자기읙 경험을 담담히 적고 있다. 하지만 둘 다를 하는 것이 물론 쉽지는 않았다. 동료과학자들로부터 배신자 소리를 들어야 했고 하바드교수직을 잃을 뻔도 했다. '과학의 정치적 오용'이란 말이 이제는 상당히 보편화되었지만, 바로 그 문제들을 선구적으로 제기하고 앞장서서 행동했던 사람이 바로 저자이다. 책을 읽고 가장 크게 느낀 점은 '시작하는 사람이 있기에 지금이 있다'는 것이다.

   과학의 오용을 우려하는 사회운동가로서 저자의 주장은 책의 뒷부분에 주로 나와있는데, 1.편견없는 '객관적' 과학이란 허구라는 것, 그리고 2.과학자들의 결과물이 언론을 통해 세상에 공개될 때 얼마나 왜곡될 수 있는가 하는 것, 그리고 3.과학의 발전을 막을 수는 없으며 과학자들이 자기 연구의 결과물이 사회적, 정치적으로 어떻게 쓰일까에 대해 훨씬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고 필요하면 행동까지 해야한다는 것이다.      

사회생물학에 대해 윌슨과 대척점에 서서 토론을 했다고 했지만 자신이나 윌슨의 주장이 모두 왜곡되게 전해졌다는 점에서는 공통됐다고 한다. 내가 윌슨의 '통섭'을 읽어본 바로는, 윌슨은 결코 유전자결정론자가 아니다. 도킨스 역시 마찬가지다. 인문학자들이 자꾸 사회생물학을 유전자결정론인 양 말하고 허수아비 공격을 하는 것은 '아직도' 우리나라에서도 똑같은 것 같다. 인간게놈프로젝트는 이야기가 좀 다른데, 르원틴의 책에 의하면 제약회사에서 직접 돈을 챙기는 유전학자들이 꽤 있다고 한다. 그들은 분명 과학자라기보다는 장사꾼이고, 자기가 과학자인 양 해서는 안된다.  

부러운 것은, 인간게놈프로젝트의 사회적 윤리적 측면에 대한 연구비를, 바로 그 프로젝트의 책임자인 왓슨이 마련해주었단 것이다. (저자도 과학적 발견과 그것의 영향에 대한 연구가 동시에 시작된 것이 처음이며 하나의 모델로 인정받고 있다고 썼다) 3~5%에 이르는 적지 않은 돈을 지원해주면서도, 결코 독립성을 훼손하지 않았다는데 우리나라에서도 과연 가능한 일일까 싶다.  

또 하나 부러운 것은, 과학과 인문학 사이에서 계속해서 왔다갔다할 수 있었던 지적 풍토다. 대학에서 과학을 전공하면서도 심도깊은 인문학 수업을 듣고 게다가 즐길 수 있기까지 하는 풍토, 물론 저자 역시 자기가 (개방적인) 지도교수를 잘 만나서 가능했다고는 하고 있지만, 고등학교는 물론 대학에서도 소위 '교양'이란 것을 거의 배우지 않는 우리에게는 먼나라 이야기로만 들리는 것이 사실이다.   

또 하나 중요한 이야기는, 과학논문을 꼭 지금과 같은 형식으로 써야 할까 하는 저자의 문제제기다. 지금의 논문형식은 실패한 이야기, 논리와 거리가 먼 우연이나 행운 등의 이야기는 싹 지워지고, 모든 게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로부터 수학적으로 도출된 것이 과학이라는 느낌을 주는데, 그것이야말로 과학을 왜곡시키고 신비화시켜 '객관적인' 과학이라는 환상을 씌우는 굴레이며 과학이 권력이 되게 하는 장치라는 것이다. 그런 깔끔함이 과학의 매력이라는 데 동의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그럼으로써 과학이 인간, 그리고 인간이 살고 서로 싸우는 사회와는 괴리된 무엇인 것처럼 여겨진다는 것이다. 충분히 공감이 가는 이야기다. 이반 일리치가 '탈학교사회'에서, 나쁜 학교와 나쁜 선생이 문제가 아니라 학교제도 자체가 인간을 억압하는 기제라고 말했듯이, 과학 논문의 형식 자체가 과학에 권력을 주는 도구라는 말인데, 과학 논문은 과학자 말고는 아무도 안 읽지만 그것을 이야기처럼 써 놓으면(이 책처럼)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읽지 않을까?  

그는 또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고등학교 교사들에게 주장을 알리고, 고등학교에서의 수업자료를 만드는 데도 관심을 쏟는데, 우리나라의 소위 통섭운동 교수들을 만나면 내가 요구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왜 우리나라 교수들은 중고등학교 교육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지? 왜 교사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려는 생각을 하지 않는지?  

여하튼, 저자는 과학과 사회운동 둘 다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했지만, 그 두개가 가능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토대는 바로 '언론의 자유'일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이것이 없으면 아무 것도 가능하지 않다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낙타의 코 -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는 동물들의 신비한 생존전략!
크누트 슈미트 닐센 지음, 이한중 옮김 / 솔출판사 / 2006년 6월
평점 :
절판


   

추천사를 쓴 최재천씨의 말에 의하면, 이 책의 저자인 크누트 슈미트-닐센은 동물 생리학 분야에서 거의 전설적인 학자라고 한다. 닐센은 노르웨이 출신의 생리학자로, 270편 이상의 논문과 다섯 권의 책을 저술했고 생물학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국제 생물학상 등 수많은 상을 수상하였으며 영국왕립학회 회원, 미국 국립보건원의 평생연구원 자격을 가지고 있다 한다. 책의 제일 마지막 장인 ‘명예로운 나날’에서, 그는 스웨덴의 룬드대학교에서 라틴어로 진행되었던 명예박사학위식, 뉴턴과 챨스 다윈이 서명한 바로 그 명부(송아지 가죽으로 된)에 이름을 썼던 영국 왕립학회 입회식, 그리고 일본천황부부 앞에서의 국제생물학상 수상 등이 얼마나 감격스런 일이었나를 그리고 있다.

닐센은 스스로를, (아마도 할아버지로부터) 호기심 유전자를 물려받고, 환경도 좋았고, 자기가 단순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던 운좋은 학자였다고 간단하게 정리하게 있다. 하지만 그 ‘단순했기 때문에’라는 말이야말로, 자신의 과제에 온 힘을 집중하고 나머지 어려움들을 의연히 물리쳐버린, 그리고 결과물을 좋게 만들려고 끊임없이 생각하고 계속 업그레이드 해온 그의 노력을 너무나 겸손하게 표현한 말이라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면 누구나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는 일평생을 ‘동물들은 극한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갈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왔다. 물고기들은 짠 바닷물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까? (체액은 그만큼 짜지 않은데 왜 절여지지 않을까?) 사막 동물들은 그 뜨거운 열기를 어떻게 견디고, 오랜 시간 동안을(6개월 이상을) 물 안 먹고 어떻게 살아갈까? 얼음물 속에 다리를 담그고 사는 새들은 그 추위를 어떻게 견딜까? 등등. 물론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제는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얻은 대답은 단지 지식일 뿐 ‘신기하고도 재미있는 과학’이 아니다. 왜냐하면, 답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알아내느냐가 바로 과학이고, 이미 있는 매뉴얼을 보고 따라하는 게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맨 땅에서 연구를 시작해서 어려움을 이겨내며 예상치 못했던 결과를 얻어내는 과정이야말로 ‘신기하고 신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학술논문에서 낙타의 체온과 날숨 속 수증기량 등을 그래프나 표로 볼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측정했을까, 왜 하필 그 데이터를 측정했을까 하는 것이 더 궁금한 법. 이 책에는 바로 그런 과정들이 생생하게 담겨있다. 낙타를 연구하기 위해 아프리카로 가는 과정, 낙타를 사면서 사기당했던 일, 길들이는 과정, 낙타 무게를 재기 위한 저울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날숨 속의 수증기량은 어떻게 측정하는지 하는. 또, 40도가 넘는 아프리카에서 잠은 어떻게 자는지, 무엇을 먹는지, 살 수 없는 연구용 동물을 어떻게 잡는지, 도대체 그런 돈은 어떻게 마련하는지 등, 논문에선 볼 수 없는 정말로 궁금한 것들을 저자는 일기쓰듯 그리고 있다. 그리고 물론, 그가 얻어낸 대답도 당연 들어있다.

-새들이 바닷물의 염분을 제거하는 방법은 오줌이 아니라 머릿속에 있는 ‘염류샘’이라는 데서 염분이 많은 액체를 만들어 그것이 부리를 타고 밖으로 떨어지게 하는 것이다.(고래와 물개는 콩팥에서 농도 높은 오줌을 만듦으로써 해결한다)
-캥거루쥐가 6개월동안 물을 안 먹고도 수분평형을 유지하는 이유는, 먹이가 분해될 때 나오는 수분 때문이다. 또 야행성인 캥거루쥐의 굴 속은 (낮에) 바깥보다 습도가 더 높은 데다가, 농축된 오줌을 만들고 수분이 적은 똥을 다시 먹어서 더욱 바싹 마른 똥을 누는 것도 도움을 준다.
-낙타는 체온이 41도까지 올라갈 때도 땀을 흘리지 않는다(그래서 수분 손실이 더 적다), 밤에 체온이 정상이하로 떨어지면 다음 날 낮에 열을 더 많이 견딜 수 있다(즉, 열을 마이너스로 저장할 수 있다), 게다가 털이 단열제 역할을 톡톡히 한다(털을 밀어버리면 수분 사용이 50%나 증가한다), 사람이나 개는 체내 수분의 12%만 잃어도 목숨이 위험하지만 낙타는 최대 25%까지도 견딜 수 있다. 또 물을 엄청나게 많이 들이킬 수 있다(몇 분 만에 자기 체중의 30%만큼의 물을 마실 수 있다), 하지만 물을 ‘저장’하지는 않는다. 낙타가 호흡할 때 날숨은 체온보다 훨씬 낮아서 수분을 덜 포함한다. 또 며칠동안 물을 마시지 못하면 날숨의 습도가 50%가 안된다. (매우 건조할 땐 코에서 나온 분비물이 말라버리면서 코의 표면에 건조한 점막층과 세포찌꺼기를 만드는데, 그 건조한 분비물이 습한 공기로부터 수증기를 빨아들인다. 숨을 들이쉴 때 건조한 바깥 공기가 코 표면을 지나며 코를 말려버린다)
(중간 생략)

시금치가 무조건 좋은 게 아니라는 걸 밝혀 낸 사람도 바로 닐센이었다. 시금치에는 옥살산이 많은데, 이 옥살산은 칼슘과 결합하기를 좋아한다. 즉, 시금치를 많이 먹으면 뼈 속의 칼슘이 옥살산과 결합하면서 빠져나가버린다. 그렇게 생긴 옥살산칼슘은 신장결석을 일으킬 수 있다. (쥐 실험으로 확인함) 그러니 신장결석이 잘 생기는 사람은 시금치를 먹지 말아야 하며, 정상인 사람들도 장기간 지속적으로 먹지는 말아야 한다.

그는 연구를 위해 세계의 여러 곳에서 살아봤기 때문에, 다양한 환경에서 먹고 자고 사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었는데, 특히 아프리카에서의 경험들이 눈길을 끌었다. 신발을 신기 전에는 속에 전갈이 있나 없나를 확인해야 하고, 샤워를 하기 전에는 하수구에 전갈이 있나 없나를 확인해야한단다. 집 밖에는 방울뱀이 돌아다니고, 더워서 지붕에서 자고 있노라면 파리가 입과 코로 달려든단다. 바지주머니에서 사막여우를 기르고, 애완용 고슴도치는 뭐든지 먹어치우는 진공청소기 역할을 한단다. 야자수잎으로 만든 집이 홍수를 맞기도 한다.

덴마크에 살던 그도 2차대전의 파도를 피해가진 못했다. 덴마크가 다른 나라보다 상대적으로 덜하긴 했어도, 돈을 털어 지하소식지를 만들고 동료들의 탈출을 도와주는 일 등은 일상적이었다. 미국에 망명해서도 호위를 받으며 가명을 사용해야 했지만 어처구니없는 실수(가방에 본명을 커다랗게 쓰고 다니기)를 하기도 했다는 이야기, 닐스 보어가 머리가 커서 헬멧을 쓰지 못하고 있었느데, 덕분에 산소마스크 착용하라는 말을 못 들어 기절했다는 이야기, 수많은 과학자들의 괴짜스럽고 때론 무모하기도 한 행동들, 재치있는 말과 장난들, 감동적인 위로와 격려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또한 이 책에 들어있다.

그는 과학자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도 결코 평범한 삶을 살지는 않았다. 자신이 유능하고 유명한 과학자였으면서도 부인에 대해 느끼는 콤플렉스, 이혼, 딸 또래 여성과의 사랑과 재혼, 딸의 죽음, 절친했던 이들의 죽음, 자전거 사고-. 하지만 그는, 절망의 순간이든 희망의 순간이든 어떤 때라도 늘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끝없는 호기심을 해결하려고 했던 학문적 열정, 그리고 일상적인 부분에서의 삶을 밀도 있고 감성적으로 살아가는 열정, 이 둘을 다 갖고 있는 경우가 그리 흔치는 않으리라.

학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그의 충고는 특히나 귀중할 터인데, 그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직접 얼굴을 맞대고 하는 교류다. 동료 과학자들의 작업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고 대화를 주고받는 것이야말로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 효율적이면서도 지적 자극을 받을 수 있는 원천이라고 강조한다. 또 쉽게, 짧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의 중요성을 말하면서 실례를 들어보이기까지 한다. 프리젠테이션을 잘하는 방법도 배울 수 있다; 구구절절 보여주지 말고, 임펙트 강한 그림 몇 장으로 승부하라. 얼마 전에 최재천 교수의 프리젠테이션을 보고 참 훌륭하다고 감탄한 적이 있었는데, 닐센은 거기에 유머까지 넣는 것 같다.

그는 또 넓은 시야와 새로운 관점의 중요성도 보여준다. 각각의 동물들에 대해 설명하는 대신, 스케일, 외부를 인지하는 몇 가지 방법, 경계면, 이런 식으로 보면 또 다른 아이디어와 문제들이 나온다는 것이다. 저자의 전공이 비교생리학이기에 특히 그러기도 했겠지만, 다른 과학자와의 교류를 강조하는 저자는 요즘 유행하는 ‘통섭’을 벌써부터 실천하고 있었다. 직접 기계를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얼마나 유용한 것인지, 학생들에게 생물학을 어떻게 가르치는지, 전문화․세분화 시대의 과학자들이 손쉽게 다른 분야의 지식(바로 옆 방부터)을 알기 위해 필요한 잡지의 필요성과 그걸 만든 과정 등, 추상적이고 현학적인 말 대신, 생물학의 대가가 직접 경험으로 보여주는 모든 정보가 다 값지다.

최재천씨도 말한 것처럼, 이렇게 평생의 사건들을 아주 세세한 것까지 다 기억하고 있는 건 아마 그가 일기를 썼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리고 이렇게 많은 다양한 정보와 배울거리들을 아주 재밌게 쉽게 얻을 수 있는 방법으로 대가의 일기만큼 좋은 건 없을지 모르겠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나도 일기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일기를 쓰려면, 하루에 아주 작은 한 가지라도 뭔가 가치있거나 즐거운 일을 하려고 노력하게 되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종교 전쟁 - 종교에 미래는 있는가?
신재식 외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0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도 표지도 다소 선정적이다. 하지만 내용은 ‘전쟁’이 아니라 조용한 ‘성찰’ 쪽에 가깝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종교에 대한 입장이 각각 다른 세 저자지만, 현재 우리나라 기독교의 근본주의에 대해선 확실히 전쟁이 일어나길 바라는 점에서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는 거다.  장대익은 생물철학자, 김윤성은 종교학자, 신재식은 목사다. 세 사람의 공통점은 진화생물학 및 인지과학 관련에 대해 박식하고, 서로 다른 가치를 인정할 줄 아는 열린 마음과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러면 다른 점은?

장대익은 신경과학 등 ‘정신’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많이 진전된 지금 종교의 역할이 과연 남아있을까, 있어도 혹 부정적인 것은 아닐까 라는 입장, 김윤식은 종교는 내용 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 경제적 맥락 역시 중요하므로 종교의 역할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종교가 다른 사회현상에 비해 특별한 점을 가지지는 않는다는 입장, 그리고 신재식은 다른 문화현상과는 다른 종교만의 고유한 역할이 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종교를 형식적 제도가 아니라 ‘종교적인 것(영성)’으로 한정시키면 뒤의 두 사람은 같은 입장, 즉 영성은 지속될 것이라는 입장이다.  (사실 두 사람의 차이점이 명확히 와닿지 않는다)

 

김윤석과 신재식은, 과학이나 소위 ‘합리적 사고’라는 것이 과연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인가,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과거(중세) 종교의 자리에 과학을 대신 앉힌 것과 무엇이 다른가 하고 묻는다. 그럼 여기에 대한 과학자들의 대답은 무엇일까? 그건 물론 ‘우리는 그렇게 주장한 적 없다’이다. 그리고 가치와 사실을 분리해야 한다는 흄의 공리다.  

 모든 종교인들이 다 근본주의가 아니고 스펙트럼이 다양하듯 과학자들 또한 마찬가지다. 김윤석과 신재식이 그런 식의 거부반응을 보이는 것은 가령 생물학 중심의 통섭을 주장하는 윌슨이나 사회생물학 등 과학자 중 일부의 목소리(하지만 선정적인)가 크게 들렸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더 근본적인 이유는 현재 과학계의 주류 패러다임인 ‘환원주의’에 대한 반감이 아닐까 한다. 과학자들은 최소한의 언어로 최대한의 것을 설명해내려고 한다. 물리학자들이 만물이론을 찾거나 생물학자들이 유전자를 가지고 뭐든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것 등 말이다. 그런 환원주의가 물리적 세계에 머물러 있을 때는 다른 학자들(인문학자들)도 별 불만이 없었지만, 이젠 그걸 가지고 인간 세계까지도 설명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경계심을 품는 것 같다. 가령 장대익이 종교를 ‘밈’으로 생각하며 종교와 생물의 번식을 똑같이 ‘일반복제자 이론’으로 설명하는 것에 대해, 두 사람은 그런 설명 방식의 의의가 무엇인가, 나름대로 쓸모 있을지도 모르지만(가치를 떠나 객관적으로 서술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반대로 역시 그 이유 때문에 (인간이라는 주체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므로) 정치적으로 악용될 수 있거나 아니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설명방식이 될 수 있지 않느냐고 말한다. 나는 뒤 두 사람의 견해에 찬성한다. 종교를 밈으로 생각하여 설명하는 것은, 어차피 사후에야 가능한 설명이고, 그래서 어떻다는 것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