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이라 불리는 기적 - 집단을 벗어나, 참된 개인으로 비상하라
박성현 지음 / 들녘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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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실 책을 읽으면서 쓰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졌다. 그런데 그걸 다 쓰려면 엄청난 양이 되어 버릴 것 같고 별 의미도 없을 것 같다. 예를 들어 미국에 대한 예찬(이 주제 하나만을 가지고도 책한권은 될 듯, 미국을 겪으면서 전혀 다른 견해와 입장을 가질 수 있다는 것만 확인할 수 밖에 없다.) 이승만에 대한 평가,모범적으로 금융위기를 극복(?)한 한국 경제, 그리고 어느새 민족주의에 대한 예찬으로 넘어가 버리는, 이 모든 내용에 대해 모두 말해져야만 할 것 같다. 그러나 그 세세한 내용을 논하는 건 의미가 없다. 단 한가지만 집고 덮어 두어야 할 것 같다. '개인주의'라는 관점 또는 입장으로 이승만을 찬양하고 대한민국 건국을 옹호하는 건 아무리 보아도 논리적 일관성이나 정합성이 없다. 이승만이 개인주의가 가장 발달한 미국에서 한국인 최초의 아이비리그 박사 출신이라는 것, 그래서 남한 사회는 개인주의가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이런거 말고 죄송하지만 연결이 잘 안된다. 그래서 이 부분만 놓고 본다면 한편의 현란하고 멋있는 인문학적인 주제가 어느새 특정 정치적 입장의 선전 팜플렛이 되어 버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정말 안타깝다. 3장 까지 읽을 때만 하더라도 오랜만에 한국사람의 글로, 깊이있게 천착하는 인문학적 주제에 대한 즐거움이 있었는데... 거까지만 이었다면 누구에게나 추천하고 싶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다. 그래서 그 뒷부분은 모두 사상하고 저자의 탁월한 논리가 전개되는 매력적인 부분, '개인주의에 대한 고찰' 부분만 보아야 할 것 같다.

서양의 근대사는 '개인'을 찾고 옹호해온 역사이다.

서양, 보통 유럽의 근대사는 기독교의 '신'으로부터의 '인간' 구원의 역사였다. 그리고 그 구원은 '나'에 대한 물음과 탐구, 그리고 발견의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 겪었던 엄청난 질곡과 우여곡절을 겪으며 수많은 전쟁과 혁명을 경험한다. 사회주의가 등장하고 전체주의를 경험하면서 다시 인간, 더 정확히는 나 자신, 개인에 대한 물음은 더욱더 깊어져 같고 극단화된 개인은 소위 포스트모던 시대 쯤 오면 오히려 형해화 되어 버리는 지경에 달한다. 만약 어떤 개인이 그런 극단에 도달하지 않고 스스로를 보호하려면 다시 '신'에 귀의할 수 밖에 없는 현실속에 산다.

개인의 발견과 그 사회적 개념인 '인권'에 대한 자각은 사실 인류의 보편적인 성취라고 할 수 있다. 유럽의 복지국가나 미국식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나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성취해낸 민주주의 속에 '개인'의 가치가 상당히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미처 그렇게까지 발달하지 못한 지구상의 많은 나라들에게 도덕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라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현대 사회의 제반 문제의 원천은 이 '개인주의'와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다.

개인주의의 사회적 물적토대는 사유재산제도이다

'개인'의 발견은 철학적 또는 인지적 심리적 문제로만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 근대에서 개인의 발견은 경제적 차원의 제반 사회제도 문화를 구성하는 것과 함께 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기술의 발전을 통한 자연에 대한 극복과 지배, 그리고 '개인주의'를 가능케 하는 '사적소유'라는 제도적 시스템을 발전시키는 것과 함께 했다. 저자는 은연 중에 사적소유에 의한 배타적 재산권을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고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부의 사회환원'을 전형적인 '떼의 폭력'이라고 규정한다. 이 진술은 개인주의, 또는 그에 대한 라이브한 표현인 자유주의의 현실적 기반인 사유재산제도라는 점을 정당하게 인정하면서도 이러한 사유재산제도가 가지고 있는 현대적 불평등 문제나 사회적 존재임을 부정함으로써 경제적으로 뒤쳐진 개인의 생명조차도 자연스럽게 무시하는 '개인주의의 폭력'에 대해서는 심각히 고려하지 않는다.

인간의 생활은 재화의 생산과 소비, 그리고 가치 분배의 경제시스템위에서 작동된다. 그 사회적 연관과 집단적 성격때문에 마르크스는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파악했다.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인정하는 것을 전체주의로 대치시키는 것도 문제이지만 사적소유을 신성한 배타적권리로 가정하면서 사회적 존재임을 망각해 버리는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해악에 눈을 감는 것도 심각한 문제이다. 자유시장이데올로기가 극단적으로 지배하면서 사회의 구성원의 일부나 다수가 체계적으로 배제되고 생존권 마져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를 반대하는 것에 개인주의가 동참하지 않는한 개인주의는 패악일 수 밖에 없다. 현대사회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자산을 가지고 있지 못한 그 누가 자유주의를 인지하고 옹호할 수 있을까. 난 아직 그런 '개인'을 보지 못했다.

개인주의에 대한 비판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개인의 회복과 존중받아야 할 인권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주의가 빠질 수 밖에 없는 사회적 폐해에 대한 경계인 것이다

개인주의 사상의 보고는 사실 유럽이 아니라 인도


저자가 밝혔듯이 서양에서의 '개인'의 발전은 근대에 와서야 현실화 되었다. 그런데 사실 그들보다 훨씬더 심오하고 오래도록 개인에 천착한 문명은 그쪽에 있지 않다. 동서양 사상의 가장 오래된 연원이라고 일컬어지는 인도에서는 수천년 전부터 끊임없이 개인에 천착한 전통이 있다. 싯다르타가 살던 시절만 해도 인도 전역에서는 '나'라는 존재가 무엇이고 세상속에서 나라는 존재는 어떻게 이해하고 살아가야 하나는 질문 하나를 놓고 평생 생각하고 수도하고 고행하는 수행자들이 무수히 많았다. 그들은 각양각색의 방법으로 자신을 찾는 행위들을 했다. 사유의 극단을 쫒기도 하고 살아 숨쉬는 호흡에 천착하기도 하고 육체, 몸을 탐구하기도 하고 때로는 섹스에 몰입하기도 하면서 궁극적인 인간의 행복을 탐구 했다. 이들이야 말로 진정한 개인주의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그런데 이들의 탐구방법의 일반적인 특징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 보듯 현실적 사회나 자연으로 부터 분리된 '이성'의 힘에서 찾지 않는다. 이러한 전통 때문에 분리된 절대정신이나 신이라는 존재가 드러나지 않는다. 그리고 '사유하는 존재', 데카르트가 말하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서양근대성의 핵심이라고하는 인간에 대한 정의 같은 것도 발생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사상 자체가 자연 친화적이고 사회적인, 서양 철학 방법론으로 말하면 매우 유물론적으로 전개된다.

근현대 유럽에서 발전한 개인주의의 귀결

이와는 다른 현실 '세상으로 부터 분리된 존재로서의 개인', 이러한 인간에 대한 이해의 현실적 귀결은 무엇이 되는가. 그것의 궁극적 분리는 '자살할 수 있는 자유'가 되어 버린다. 저자는 칸트가 말한 목적론적 존재라는 지극히 간단한 설명으로 자살을 선택하는 것은 진정한 개인주의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마약 복용으로 수감된 소설가 프랑스와즈 사강이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고 외친 것이나 수많은 자살론자들이 자살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서양의 개인주의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대안이 과연 존재하는가.(자살과 자유죽음) '인간은 그 자체로써 존엄성을 가진 존재(칸트)'라서 자기 자신의 생명에 대해서도 소유권과 권리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설명은 너무나 왜소하다. 내가 그 권리를 포기하겠다는데 누가 말릴 수 있겠는가

만약 자살하지 않는 상태에서 괴로운 개인으로서의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존재방식은 무엇일까? 저자가 말한 '머리의 정직성(intellectual integrity)'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나 데카르트의 설명을 연상케한다. 현실 사회 속에서 존재하는 나와 사회와의 끊임없는 '사유의 긴장', 그것을 통해 얻는 진실만이 진실이라는 진술은 자기 성찰적 태도로써 유의미하다. 그러나 실존주의던 무엇이던 사회적 관계와 '분리된 이성'이 찾아 헤메이는 그 과정 자체는 행복하지도 낭만적이지도 않다. 신으로 귀의 하던 무의식이나 '영혼' 속에서 또다른 진실을 찾던 세상과 화해하고 싶어도 잘 되지 않는 연옥에 갇힌 존재같은 형상이 되어 버린다.

샌델의 공동체주의

한국 사회의 자유주의의 신장을 주장하는 분들의 경우 대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베스트셀러가 된 현상에 대해 비판적이다. 저자의 논지도 사실 진중권씨나 이택광 교수의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때 블로그에 '마이클 샌델에 대한 옹호- 자유주의의 공동체주의 비판에 대해- 라는 블로그를 썼었다. 샌델은 서양의 자유주의가 가지는 현실적 한계와 문제에 대해 천착한다. 그것은 롤스에 대한 비판적 탐구로 나타나는데 서양의 현대 자본주의 체제가 가지는 역사적 한계에 대한 인정, 그리고 그것에 대한 대안의 탐구라는 긍정성을 갖는다. 그의 공동체주의가 과연 새로운 대안 담론으로 발전할 것인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사견이지만 나 또한 그게 그리 쉬울 것 같지 않다고 본다. 왜냐하면 서양 철학의 사유방법의 전통 때문이다. 사유 방법론, 그 자체를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으면,그래서 철학적으로 대안이 없는 조건에서 사회사상으로써 대안이 발전할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한국 사회에서의 개인주의 또는 자유주의에 대하여

근대화와 현대화의 경계가 모호한 한국, 봉건체제에서 혁명없이 식민지를 거쳐 전쟁과 분단을 거친 역사, 한국에서 올곧은 개인주의와 자유주의가 자리잡은 적이 있던가? 없다.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맹신은 있지만 그것을 체득하고 있지도 않다. 정치에서의 절차적 민주주의는 갖추어져 있다고 하지만 그 천박성이 한이 없다. 산업화에서 급속한 금융자본주의로 편입되어 있는 경제 시스템까지 포함하면 정치,경제,문화 등 거의 모든 요소들 사이의 정합성이 심각히 낮은 사회다. 누군가가 오리지널 개인주의나 자유주의를 전파한다고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신선하고 매력적일 수 밖에 없다. liberal 한 것도 자연스레 진보적인 progressive 한 것과 구분이 잘 되지 않는 사회이니 말이다. 게다가 분단 상황에서 독립적인 사상의 발전이 잘 되기를 기대하는 것도 어렵다. 한국의 지식인 또는 인테리들이 가지고 있는 하늘이 내린 형벌, 천형이라고 난 생각한다.

한국에서의 개인주의자 또는 자유주의자라면 현실속에서 이 자유주의나 개인주의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 또는 어떻게 억압받고 있는가에 천착하는 것이 필요하다. 저자가 그토록 혐오하는 북한사회의 전체주의의 극복보다도 왜곡된 사상문화 속에서의 한국 사회에서의 개인에 대한 침탈의 구조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 더 중요하다. 이런 면에서 스스로 자유주의자라 주장하던 한 학자가 몇년전에 출간한 '자유의 의지, 자기 계발의 의지(서동진, 돌베게)'를 소중하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비록 뚜렷한 결론이나 대안을 담고 있지는 않지만 겉으로는 자유로운 사회로 보이는 한국에서 왜 사람들은, 특히 일하는 사람들은 자유로와 질려고 하면 할수록 더 자유롭지 못하게 되는가를 탐구하는 책이다.

'머리의 정직성'에 대한 사랑과 '자기 정당성'에 대한 증오

세상과의 끊임없는 긴장관계속에서 '머리의 정직성 intellectual Integrity'을 지키는 것은 개인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의 기본 사유방식이자 태도라고 말한다. 그런데 저자는 Integrity 를 정직성이라고 번역했다. 그리고 intellectual 을 붙이나 안붙이나 동일한 의미로 사용한 듯 하다. '손해를 보더라도 진실을 받아들이는' 용기있는 태도라는 뜻이라 한다. 그런데 오래전에 이 단어 때문에 씨름해본 경험이 있는 나로써는 이 번역에 동의가 되지 않는다. 저렇게 번역하면 정직을 뜻하는 Honesty와 큰 차이가 없다. 영한 사전에는 "고결, 성실, 정직, 청렴, 완전(한 상태), 흠 없음, 보전(保全);본래의 모습, 【컴퓨터】 보전" 이라고 나오고 웹스터 영영사전에는

1: firm adherence to a code of especially moral or artistic values : INCORRUPTIBILITY
2: an unimpaired condition : SOUNDNESS
3: the quality or state of being complete or undivided :COMPLETENESS

라고 되어 있다. 실제 내가 본 몇권의 책에서 이 단어는 참과 거짓, 사실에 대한 정직성만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해관계를 기준으로 고려하는 것도 아니었다. 대개의 경우 그 사람이 속한 조직이나 집단, 사회의 맥락속에서 올바른 것, 또는 올바른 가치와의 정합성을 요구한다. 그래서 나는 고민 끝에 '도덕적 성실성'이라고 번역했다. 물론 이것도 정확한 번역은 아니라고 본다. 그런데 이 단어의 의미를 짚어 보는 이유는 내가 본 이 단어는 사실 서양 사람들 답지않은 맥락을 담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이성적 사유를 통해 진리를 추구하는 '베리 타스 룩스 미아 - 진리는 나의 빛' 이라는 말, 하버드 대학 정문에도 새겨져 있고 서울대학교 정문의 대문도 형상하고 있는 그런 뜻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 집단적 가치, 그속에서 개인이 취하는 관계에 대한 충실성을 의미한다. 사실 남의 나라 말을 깊이있게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것 같다. 다만 나의 경우 이 단어를 보면서 결국 그들,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사회 속에서 그 사회적 관계로서의 진실의 중요성을 중요하게 담지하고 있음을 깨닫게 해준 단어였다.

'자기 정당성'에 대한 혐오는 끊임없는 자기 성찰의 또다른 조건일 것이다. 회의하고 반성하는, 이럴 때 만이 건강한 사유와 태도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자기 정당성'은 형이상학적 진리와의 정합성을 따지는데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 역시 사회적 관계속에서만, 그 기준에 의한 정합성에서 중요하다. 어떤 과정을 거쳐 깨달았던 '개인주의'가 말 그대로 정당성을 가지려면 현실속의 인간의 문제에 대한 대안인가가 기준이 된다. 개인주의는 이에 대한 답을 할 수가 없다.

'떼'의 폭력, 그리고 인간에 대한 애정

오래전에 소위 민주화 운동하는 사람들의 문화를 돌아보면 반성할 것이 없지 않다. 저자가 혐오하는 주의와 생각에 따른 '떼'의 폭력이 없었다고 할 수 없다. 이런 문화가 특정 개인을 파괴하고 몰락시키는 일들도 없지 않았다. 조금 다른 차원일 수는 있지만 당시 '여성해방'을 위해 싸우던 많은 여성 학우들과의 해소되지 않는 논쟁들은 참 갑갑한 일 중 하나였는데, 당시 대부분의 남자들이 가지고 있던 가부장적 지배이데올로기 또한 냉정하게 존재했었다. 이러한 폭력이 대개의 경우 사회에 대한 진심어린 애정과 권력욕 사이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유래한 것도 사실이다. 그 결과 낯뜨거운 사례들이 그후에 발생한 것들을 적지 않게 보아 왔으니 말이다. 이런 문제점이나 한계가 지금도 완전히 없어졌을리는 없다. 그러나 이에 대한 존중받아야할 건강한 비판과 그 완전한 부정은 다르다. 우리들의 얼굴에 난 상채기를 아프게 쓰다듬는것은 상처를 치유하고 맑은 얼굴을 갖기 위한 노력일 때 의미가 있다.

이 책을 추천한 한 소설가가 이야기한 것 처럼 운동권 내부의 자기성찰적 글, 그리고 그 성찰의 결론이 '개인에 대한 인식'이라는 것으로 결론 지워지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개인'이 아니고 '개인과 사회'이다. 사회를 구원하겠다는 오만이 전체주의의 원천이라는 말은 일부의 진실일 수는 있다. 그러나 거창한 '구원'은 아니더라도 개인에 대한 자각이 사회적 봉사와 헌신으로 발양되는 건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부처를 비롯해서 개인의 해탈을 이루었다는 대부분의 선승들도 스스로의 깨달음은 결국 사회와 세상을 대상으로 하는 '보살행'으로 현실화 한다. 개인의 깨달음이 중생과 함께 하는 것은 언제나 동일한 선상에 있다. 그렇지 않는 한 '개인'은 존재할 수 없다. 아프리카에서 봉사활동을 하다 암으로 죽은 신부의 이야기나 방학때마다 저 아프리카 외진 마을로 달려가 어린아이들에게 살 집을 지어주다 심장마비로 죽은 모 대학의 학생 이야기를 접할 때 그들이 자신의 '자아'를 상실한 채 스러져갔다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러한 행동 속에서 '자아'를 현현(顯現)하고 있다. 그리고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렇게 살고 있는 '개인'들은 둘러보면 너무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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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이라 불리는 기적 - 집단을 벗어나, 참된 개인으로 비상하라
박성현 지음 / 들녘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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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에 대한 천착인줄 알았더니 또다른 전체주의를 전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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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휴머니즘 - 디지털 시대의 인간회복 선언 AcornLoft
재론 레이니어 지음, 김상현 옮김 / 에이콘출판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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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지털 휴머니즘] 재론 레이니어 저, 김상현(@pr1vacy) 옮김, 에이콘출판


   한마디로 아주 재미있다. 물론 주관적이다. IT의 역사나 그 기술에 대한 이해나 경험이 별로 없는 사람들에게는 사실 매우 어려운 책이다. 그래서 일반일들에게는 그닥 권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최근의 인터넷 현상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에게는 분명 필독서의 하나임은 분명하다. 통칭 웹2.0 또는 '집단지성', '클라우드 컴퓨팅'등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지평이라고, 장미빛 미래로 표현되는 통념들에 대해 '제대로 보라'고 망치를 두드린다. 저자는 지금의 디지털 문화가 오히려 반휴머니즘 적 폐혜를 매우 심각하게 끼치고 있다고 말한다. 극단적으로 파시즘같은 전체주의 해악과 비슷하다고 본다. 인간의 고유한 창조성과 다양성을 억압하고 따라서 '인간다움'으로부터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나름 애정을 가지고 대안을 고민하고 있으면서도.


디지털화는 인간의 창의성을 위축시킨다


  저자 재론 레이니어(1960)는 컴퓨터 가상 현실(Virtual Reality)분야의 선구자인 컴퓨터 과학자이면서 작곡가이자 비주얼 아티스트라고 한다. 그의 이러한 독특하고 다양한 경력이 그의 글을 흥미롭게 만든다. 1982년에 처음 정의된 미디 MIDI (Musical Instrument Digital Interface)의 사례를 통해 디지털화가 어떻게 팝음악의 창의성을 약화시켰는가 보여준다. MIDI는 전자 악기들 사이에 상호 통신하는 일종의 규약을 의미한다. 초창기 미디를 창안하게 된 배경은 신디사이저들 사이를 연결해 한대의 키보드로도 '거대한 소리의 팔레트'를 만들기 위한 의도였다. 그런데 미디는 사람이나 섹소폰 연주자들이 내는 굴곡지고 가변적인 소리를 담아내지 못한다. 애초 풍부한 소리를 담고자 하는 의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이후 미디는 모든 전자음악의 표준이 되었고 이제 대부분의 팝음악은 미디 없이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이렇듯 불완전하고 불철저한 규약이 너무 널리 퍼져 더이상 폐지할 수도 개선하기도 어려운 현상, 즉 록인(Lock-in)된 상태가 된 것이다.  모든 음악행위는 어느새 이러한 미디를 전제로 삼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야만 하는 지배룰이 되었다. 저자는 이러한 척박함 때문에 미디가 보편화된 이후로 팝에 새로운 사조가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고 본다. 가장 최근의 것이 힙합인데 이 힙합은 미디가 지배적이기 되기전에 형성된 음악 장르라는 것이다. 


 이러한 디지털화에 의한 창의성의 문제는 비단 미디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컴퓨터는 이미 모든 인간 생활의 필수부분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현재 사용되는 거의 모든 컴퓨터시스템이 사용하는 구조인 '파일'시스템도 너무도 지배적이어서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런데 파일시스템은 컴퓨터 역사 초기 제안된 다소 문제를 안고 있는 체계의 하나였다. 그런데 지금은 이 '파일'이라는 아이디어가 거의 모든 사고행위의 단위가 되었다. " '파일'로 표현된 아이디어는, 사람의 표현이 마치 나뭇가지에 붙은 잎처럼 정리될 수 있고 분리 가능한 덩어리'라는 개념"을 전제로 한다. 인간의 사고 방식과 표현이 저런 틀 속에서 이루어 지는 것이 과연 최선일까?  영어가 사실상의 표준어라고 해서 한국도 중국도 일본도 공용어를 영어로 사용하고 자국어가 몰락한다면 영어라는 문법에 지배된 문화만 전세계에 존재할 것이고 각 국가의 고유한 문화는 점점 사라지거나 약화될 것이다. 이러한 천편일률성이 다양성과 풍부함을 무너뜨리게 될 것이다. 


집단지성과 클라우드 컴퓨팅


저자는 소위 '집단지성(Collective Wisdom 또는 Collective Intelligence)에 대한 과도하고 근거없는 '찬양'을 혐오한다. 소위 집단지성의 힘으로 인류가 수십년동안 새롭게 만든 것이 겨우 위키피디아 정도 말고 무었이 있단 말인가라고 그는 묻는다. 그 위키피디아 조차 그닥 탁월한 창조물도 아니다. 백과사전하나 대치한 것, 그것도 언제든지 오류를 담고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정교한 나름의 통제가 없다면 만들어 질 수도 유지될 수도 없다. 


그는 인터넷 초기 '익명성'을 허용한 웹의 설계가 심각한 오류였다고 말한다. 결국 사회 문제화한 악성댓글에서 보듯 인터넷은 여러 사회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심지어는 테러조직의 은신처이자 조직화 도구로 사용되기도 한다. 인터넷의 이 익명성의 구조가 '착한'사람들도 얼마든지 '악할 수도 있게' 유도하는 기제가 된 것이다. 


인터넷의 익명성은 더 근본적인 문제를 야기시킨다. 즉 인터넷내에서 '개인'이 사라지게 되고 그들의 활동의 집합이 칭송되게 되면서 마치 '인간'을 벗어나 어떤 '절대자'가 새로이 등장한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각 개체 스스로는 아무런 의식없이 하는 행동이 집단적으로는 고도로 조직화된 벌집을 보는 듯 하다. 사회철학적 용어인 '집단지성'의 기술적 현실태는 클라우드 컴퓨팅(Cloud Computing)이다. 어디에 있는지, 어딘지 모르는 구름(cloud)속 너머 그 어딘가에 절대자와 같은 모습으로 '집단지성'이 존재한다고 사람들은 생각하기 시작했다. 와이어드 잡지를 만든 케빈 켈리는 클라우드 컴퓨팅의 발전에 따라 궁극적으로 지구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기계(The Big Machine)로 발전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세계에서 인간은 하나의 단말기(terminal)에 불과하다. 절대자인 기계에게 모든 정보를 모아주는 촉수일 뿐이다. 창조적이고 위대한 계산과 창조는 집단지성, 빅 머신이 행하는 방법일 뿐이다. 인간은 거기에 종속된, 절대자가 만들어준 그 무엇을 즐기고 향유하는 피동적인 존재가 될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러한 현상을 빅 브라더를 연상시키는 파시즘이나 전체주의, 디지털 마오이즘의 시대로 표현한다. 


롱테일과 소셜네트웍


저자는 롱테일은 지나치게 과장되어 신화처럼 운위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실제 롱테일에서 주목받거나 일정 수준이상, 먹고살수 있는 꼬리가 얼마나 있는가?  완전 디지털화되어 있는 컨텐트 비지니스 영역이 아니면 롱테일 경제학이 잘 적용되지도 않는다. 롱테일의 신화위에서 살찌는 자는 그러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플랫폼 사업자들 뿐이다.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네트웍에 대한 비판은 더욱 신랄하다. 소셜네트웍서비스는 프라이버시에 대해 가능한 최대로 무시한다. 더우기 사용자들이 미처 알아채지 못한 상태에서 또는 동의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개인은 물론 그들 사이의 귀중한 관계 정보를 상업화하고 이용하는데 혈안이 되어있는 기업이다. 반면 사용자인 인간은 마치 모두가 정치인처럼 평판을 끊임없이 관리한다. 친구관계에 대한 정의를 바꾸고 결국 '관념적 인간이 실체로써의 인간을 가린다.' '위선은 보상받고 진정성은 평생의 흠집을 남긴다.' 그리고 진실은 '사람들 사이에서 소통되는 것이 결국 진실이 된다' 


후(後) 기호적 소통  (Post Symbolic Communication)


저자 재론 레이니어의 디지털과 인터넷 문화에 대한 비판은 혹독하다. 그러나 그가 항상 디스토피아만을 이야기 하지는 않는다. 컴퓨팅 파워의 엄청난 성장이 귀납적이고 통계적인 방법으로 언어와 음성을 인식하고 사람의 얼굴을 구별하는 등의 발전이 인간에게 가져다줄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서도 주목한다. 가상현실의 전문가로써 그는 인간의 언어적 소통을 넘어선 감각적 소통을 연구한다. 후기호적 소통(post symbolic communication)이라고 그가 명명한 새로운 발전을 통해 그는 '권력의 획득 대신 소통의 깊이를 더욱 심화'시키는데 관심을 가진다. 이로써 디지털 기술에 의해 사라져가는 휴머니즘을 되살리는 데 긍극적인 도움을 줄 것이라고 믿는다. 


개인을 바탕으로한 절대자에 대한 경계


디지털 문화의 발전을 긍정적으로, 심지어 돈벌이 기회로 간주하고 소개하는 책들은 많다. 악성 댓글에 대한 피혜 등이 논의 되지만 적어도 이 업계에서는 모든 걸 긍정적으로 간주한다. 오히려 인터넷 실명제, 규제 등 정부의 실책에 대한 비판론은 높고 어떻게든 미국식 디지털 상품과 문화의 생산과 소비를 강화시켜야 한다는 논지가 주류이다. 이러한 풍토에서 재론 레이니어와 같은 비판적 입장이 소개된 것은 참으로 긍정적이라 본다. 착목해야할 지점들이 매우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케빈 켈리 등 미국에서 주로 논의되는 집단지성이나 클라우드 컴퓨팅에 대한 재론 레이니어 같은 비판의 궁극적 플롯은 대개 한가지다. 그것이 '절대적 신'으로 추상화 되고 그에 따라 개별 인간은 두려움을 느낀다. 그것이 인간성을 억압하는 형태이던 상실하게 만드는 것이던. 이러한 비판 구조는 서양 근대 정신의 한계다. 중세 종교와의 투쟁이나 파시즘과 전체주의에 대한 개인의 승리를 지키고자 했던 그들의 역사적 노력과 닮아 있다. 


추상적 절대자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연결된 현실적 인간들의 공감과 연대


하지만 디지털이 만든 속도와 연결, 기록과 편재를 특성으로 하는 인터넷 시대에 구름 속에 존재하는 절대자에 대한 두려움은 잘 못 짚은 것이다. 인터넷의 발달을 감각의 확장으로 파악하는 것은 피상적이고 도구적 진단이다. 깊어지고 넒어지는 관계의 망은 감각의 확장에 그치지 않으며 인격을 그만큼 확장해 나간다. 사회적 존재인 사람의 인격은 각 개인을 중심으로 세계를 구성한다. 하늘에서 내려다 보면 인간의 수 만큼이나 많은 네트워크의 중심이 생긴 것이고 그것들은 중첩되고 연결되어 있을 뿐이다. 그속에서 인간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인격을 확장시킨다. 사람과의 연계가 넓어지고 깊어진다는 것은  공감하고 공존하는 관계망을 충분히 예견하게 한다. 넓어지는 인간 관계가 진리를 가리고 연결을 약화시키는 권력의 지배와 탈 인간성이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부분적으로 제기되는 해악은 통제되고 조절되어져야할 현상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저 멀리 아프리카 차 농장에서 일하는 어린 일꾼도 내 옆에 있고 남미 어느 플랜테이션에서 커피 농사를 짓는 농사꾼도 이웃이다. 리비아에서 총을 들고 전투를 벌이는 그 누군가와 80년 광주를 연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걸 보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있어 그 대상으로서의 인간들은 어떤 절대자도 억압자도 아니다. 지구촌이라는 단어가 주는 낭만성을 경계한다해서 지구촌을 두려워 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추상적 절대자로부터의 자유를 외치는 두려움 속의 개인이 아니라 현실 속 독재자나 억압자로 부터의 공감과 연대를 통한 자유를 추구할 뿐이다. 인터넷이 여는 세상은 그렇게 진화해 나갈 것이다. 물론 절대화하려는 모든 시도에 대한 경계를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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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바시따
재연스님 엮음 / 자음과모음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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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로... http://nicklejun.tistory.com/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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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바시따
재연스님 엮음 / 자음과모음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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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보았다가 정말 좋은 시집였습니다. 구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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