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담유 > 잃어버린 시간? 잃어버린 놀이!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
알랭 레몽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A. S. 바이어트의 《소유》라는 소설은 중간 중간 주목할 만한 북유럽 서사시를 끼워 넣고 있는데(물론 저자의 순수 창작물이다), 다른 어떤 형태의 존재(물)보다도 주목하게 되는 존재가 등장한다. 지상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천상에서도 내던져진, 인간을 구원할 만큼 선하지도 않으면서 해악을 끼칠 만큼 사악하지도 않은, 단순히 대기 속을 날아다닐 뿐인 정령들이 그것이다. 이들이 등장하는 <요정 멜루지나>라는 (만들어진) 서사시를 여러 번 넘겨 읽는 동안, 나는 문득 내가 더 이상 내세를 꿈꾸지 않는 자가 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깃들 곳 없어 대기를 떠다니는 정령들은 충분히 연민을 불러일으키지만, 이 연민이라는 감정의 근본에는 뭔가 나 자신도 모르게 작동된 ‘조작’이 자리하고 있다는 의구심이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게 지상과 천상이란, 이분법을 사랑하는 인간의 관념일 뿐이다. 그러니 지상과 천상 ‘사이’, 그 ‘간격’ 또한 관념이다(나는 여기서 ‘관념’을 물질에 상대되는 비물질에 대응하여 쓰고 있지 않다. 마음이란 비물질이지만 거짓은 아니다. 분명히 존재하는 참이다. 분명히 존재하는 참은 관념이 아니라는 게 내 생각인데, 내 이런 생각을 누구라도 비웃어도 상관없다). 그러하니 ‘사이’와 ‘간격’이라는 관념의 공간에 거처하는 저 정령들은 창조된 자들에 불과한 것이다. 창조된 자들이란 곧 없는 자들이기도 하다. 그들은 없는 자들이다. 그러나 그 존재하지 않는 자들이 지금 내 마음의 한끝을 잡고 흔든다. 이 분명한 요동, 참 묘하다. 내가 연민이라는, 대상 없는 감정을 향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분명해졌는데도 말이다.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을 읽는 동안에도 ‘대상 없는 감정’에 대한 사유는 계속되었다. 쉰이 넘어선 작가가 자신의 생에서 상실한 것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늘어놓고 있으니, 누구라고 이 쓸쓸하기 짝이 없는 회고담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전쟁으로 불타버린 옛집, 실종되거나 죽어버린 사람들…….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었던 대상들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바로 그 존재하지 않는 대상들의 아우라가 오늘의 작가를 둘러싸고 놓아주지 않는다. 그래서 작가는 쓰고 있는 것일 터이다. “나는 전쟁을 끝내기 위하여 이 책을 썼다. 모르탱의 집은 허물어졌다. 르 테이욀의 집은 허물어졌다. 트랑의 집은 팔려버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누이가 죽었다. 나는 산 사람들, 그리고 죽은 사람들, 그들 모두와 평화롭게 지내고 싶다.”(164)


‘전쟁’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만큼,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들과 지지고 볶으며 살아간다. 누군가에게는 이 전쟁이 거의 전 생을 지배하기도 할 테고, 누군가에게는 그저 100여 개가 넘는 텔레비전 채널을 돌려 바꾸는 순간만큼이나 찰나적으로 존재하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알랭 레몽이라는 작가에게는 이 전쟁이 보다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 같다. 소설의 화자는 회고담 끝부분에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고백한다. “내게는 혼자 남몰래 들여다보는, 혼자 남몰래밖에는 보지 못하는 이 사진들이 있다. 트랑에서의 행복이 찍힌 이 사진들. 해가 환하게 비치는 어느 날 부엌이나 집 앞에서, 혹은 빌카르티에 연못가에서, 숲 속에서 찍은. 모르탱, 전쟁의 모험, 그리고 연합군 상륙에서부터 온갖 놀이와 꿈과 의식과 비밀들로 가득한 그 낙원에 이르기까지 우리들의 역사로 한 덩어리가 된 우리 어린아이들. 개를 쓰다듬으면서 햇볕을 쬐는 어머니, 그리고 돌아가시기 불과 얼마 전 검은 양복을 입고 가족들과는 약간 떨어져 서 있는 아버지의 이 사진.”(163) 유년 그리고 행복과 낙원이 담겨 있는 이 사진들의 아우라는 오늘, 지금, 들여다보는 그 자신만의 것이다. 그러니 혼자서, 혼자서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이 세계에는 누구도 함께할 수 없는 전쟁이란 게 있는 것이다.


200페이지가 채 되지 않는 이 짧은 이야기를 통해 작가가 열거해주는 상실 목록은 대체로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중에서도 놀이의 상실에 대한 그의 통찰력은 이 책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이 아닐까 한다. 이 부분은 내게 ‘대상 없는 감정’이 너무나 분명한 물질, 그래서 에너지로 화하는 지점이기도 했다. 그 감정이란 게 연민도 슬픔도 뭣도 아니지만, 어느 날 문득 사랑이 끝나버리는 것처럼 놀이가 내게서도 떠나갔음을 확인하는 일은 분명 이물감, 그 이상의 무엇을 던져준다.



우리는 거기, 마당에서 수백만 시간의 때묻지 않은 행복의 시간을 보냈다. 어머니는 닭과 토끼에게 먹이를 주려고 건너왔다가 우리가 무슨 놀이를 하는지 유심히 들여다보곤 했다. 우리는 어머니에게 구경을 시켜주었고 어머니는 우리에게 아이디어를 말해주었다. 나는 거기서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 덕분에, 햇빛과 놀고 햇빛을 길들이고 날씨를 즐기고 나뭇잎들의 유희를 음미하고 땅 위로 뻗어오는 그림자를 감상하는 것을 배웠다. 여기서 우리란 어린아이들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어린 축의 아이들 말이다. 아녜스, 자크, 마들렌, 베르나르, 그리고 나. 커버리고 나면 아이들은 더 이상 놀이를 하지 않는다. 아녜스는 어느 날 놀이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자크도. 어느 날 문득 놀이를 할 줄 모르게 되는 것이다. 비밀을 잊어버린다.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그걸 어떻게 하는지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온갖 삶들을 마음속으로 지어내고 그것을 굳게 믿는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게 끝나버린다. 그냥 그렇게 갑자기 딱 멈춰버린 것이다. 놀이의 상실, 놀이의 망각, 나는 그게 바로 일생 중 최악의 날이 아닌가 한다. 누구나 그런 날을 거치게 마련이다. 어느 날 내 차례가 되었다. 그렇지만 나는 마지막까지, 마지막 날까지, 마지막 순간까지 남김없이 즐겼다. 내가 기록을 세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가장 오랫동안 즐긴 것이다. 하늘이 내린 선물이다. 생생하게 기억난다. 어느 날 내 또래의 친구 하나가 나를 찾아서 마당으로 왔다가 내가 마들렌, 베르나르와 함께 놀고 있는 것을 보고는 내게 쏘아붙였다. <아니 그 나이에 아직도 이런 놀이를 하는 거야?> 그렇다. 나는 아직도 그런 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솔직히 나는 그런 놀이를 할 줄 모르게 된 그를 동정했다. 나중에, 그 울타리를, 그 경계를 넘어와버리면 끝이다. 다시 뒤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결코. (3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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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담유 > 아름다운 분석
사랑과 증오의 도착들 슬로베니아 학파 총서 1
레나타 살레클 지음, 이성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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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지 마라”라고 말할 때의 라캉을 좋아하기까지에는 품이 좀 들었다. 그가 남긴 말들을 알아먹는 데 시간 따윈 걸리지 않았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나를 그를 증(상을 가진)자로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만큼 내게 있어 라캉을 이해하는 일은 사랑을 (유지)하는 일만큼이나 고되다. 물론 그의 언어가 외국어이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 하지만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가 구사하던 언어는 본질적으로 외래어에 속하는 무엇이(었)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언어, 나는 그런 언어를 구사하는 타자들에게 십중팔구 매료되는데, 문제는 그 매료의 대가로 (관념적) 고통을 떠안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언어’, 그것이 허구라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는 말이다.


“난 당신을 사랑한다. 하지만 나는 불가해하게도 당신 안에 있는 당신보다 더한 어떤 것――대상 a――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당신을 절제한다”라는 라캉의 말은 내 이런 증상을 시원하게 분석해준다. 언어로써 표현하고 싶어 안달을 치면서도 막상 글로나 말로나 더듬증에 시달린다거나, 언어를 경멸하면서도 사용할 수밖에 없고 또한 증오하면서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나의 증상은 언어(타자, 혹은 법, 혹은 상징계)의 외상적 결여, 허구 그 자체를 지칭하는 라캉의 ‘대상 a’ 개념에 의해 그 발원지가 명확해진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언어란 ‘없다’. 만약 그런 언어가 있다면 그것은 언어의 범주를 벗어나 있거나 넘어서 있는 무엇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언어는 비트겐슈타인 식으로 말하자면 ‘말해져서는 안 될 것’일 터이다. 나를 매료시킨 라캉의 말들은 프로이트와 소쉬르를 포함하여 전대의 획기적인 여러 이론들을 경유하여 내게로 온 것이며, 또 그것이 아니더라도 언어 자체가 타자성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나는 라캉이라는, 언어라는, 내가 강박적으로 고통스럽게 붙들려 있던 세계에서 놓여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나는 라캉을 진정으로 욕망할 수 있게 된 것일까?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주체로서의 너는 너의 환상을 가로지를 수 있다고, 라캉은 또한 이미 오래전에 말해두었다.


라캉 이론에 근거하여 이론과 실천 양 영역에서 현 시대가 보이는 여러 증상과 징후들에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대고 있는 슬로베니아 라캉 학파의 일원인 레나타 살레츨의 이 책을 읽는 일은 그래서 즐거웠다. 즐겁게 읽어낼 수 있어서 안도의 한숨까지 나올 지경이다. 인간과 사회의 불가해한 심층들을 낱낱이 분석해내는 살레츨의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상상적 세계를 다루는 예술 작품에서나 느낄 법한 미적 쾌감이 뒤따른다. 분석이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은 이 책이 내게 준 큰 선물이다. 타자와 세계를 욕망하는 일이 사랑과 증오의 도착에 붙들려 충분히 즐겁지 못한 삶에 직면해 있다면 이 책을 기꺼이 읽어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라캉을 처음 만나는 경우라면 브루스 핑크의 《라캉과 정신의학》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기본 저작들을 경유해볼 것을 또한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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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담유 > 인터페이스가 인도하는 실재의 구멍
진짜 눈물의 공포
슬라보예 지젝 지음, 오영숙,김소연 외 옮김 / 울력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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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은 (68혁명의 세례를 받은 1970년대의 영화 이론가들로 대변되는) 과거의 영화 이론이 ‘봉합(La suture)’을 일종의 종결로 받아들이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과거의 이론이 봉합을 통해 생산 과정의 간극과 메커니즘의 흔적들이 지워지고 그 결과 생산물이 자연스러운 하나의 유기적 전체처럼 보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에 반기를 든다. 그에게 봉합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자기 폐쇄가 선험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 배제된 외재성은 언제나 내부에 그 흔적을 남긴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서는 외부가 내부에 새겨짐으로써 그 장을 ‘봉합’하면서 외부를 필요로 하지 않는 자기 폐쇄의 효과를 낳고 자신의 생산의 흔적들을 지우고 자연스러운 유기적 전체처럼 보일 수 있게 되는 방식으로 이해되던 이전의 봉합의 원리는 부인된다.


지젝은, 그간의 이론은 라캉 이론의 상징계적 측면만을 문제시했지만 제대로 된 이론을 위해서는 실재계로 관심을 돌린 라캉의 후기 이론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라캉의 독자성은 바로 상징계가 아니라 실재계에 있다는 것이다. [라캉의] 실재계에 대한 관심이 좀더 중요하다고 보는 지젝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헤겔의 변증법적인 보편성, 즉 ‘구체적 보편성’ 개념을 끌어온다. 변증법적인 보편성이란 일단의 특수한 조건들 안에서만 출현해 스스로 명료하게 표현되는 보편성을 의미한다. 지젝은 헤겔의 구체적 보편성, 즉 예외를 구조적으로 필요로 하는 보편성, 특수한 내용의 일부가 되는 보편적 틀, 구체적인 총체성에 관심을 가질 때라야 실재계의 진실을 엿볼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이 가능한 것은 바로 영화 내에서 히치콕이나 키에슬롭스키와 같은 예외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히치콕의 영화는 기존 봉합 과정을 따라 주체로 하여금 안심하게 하는 대신 외재하는 환상적 ‘응시’의 시점과 직접 맞닥뜨리게 한다. 쇼트와 역쇼트 간의 교환에 의해 관객을 안심시키는 봉합의 효과를 애당초 만들어내지 않고 긴장이 해소되지 않은 채로 내버려두는 것이다. 이 긴장이 고조돼 마침내 그 긴장이 훨씬 더 근본적인 또 다른 이중성 속으로 가속화되면서 그것이 해소되는 동시에 폭발해서 통제 불능의 상태가 되는 것처럼 보일 때, 객관적 쇼트로 보이던 것은 일순 주관적 쇼트로 탈바꿈한다. 이때의 주관성은 극중 주인공의 표준적인 다이제시스적인 주관성이 아니라 사물 자체의 불가능한/트라우마적인 주관성이다. 이렇듯 히치콕은 주관적인 쇼트와 객관적인 쇼트의 표준적인 교환을 전복하는 방식으로 사물 자체의 불가능한/트라우마적인 주관성, 즉 ‘대상 a’, ‘객관적-외적 현실을 구성하는 주관적인 요소’, ‘실재의 구멍’을 엿보게 한다.


한편 주관적인 쇼트와 객관적인 쇼트의 교환이 봉합 효과를 산출해내지 못할 때 인터페이스 기능이 들어오는데, 관객으로 하여금 일상적인 장면에서 이러한 인터페이스의 차원을 지각하게 만드는 데 뛰어난 솜씨를 보여준 이가 바로 키에슬롭스키다. 인터페이스 기능이란, 단조로운 현실의 한 부분이 갑자기 “지각의 문”, 즉 스크린으로 기능하기 시작하면서 그것을 통해 또 다른 순전히 환상적인 차원을 지각하게끔 하는 기능을 의미한다. 키에슬롭스키의 뛰어난 점은 바로 이러한 인터페이스의 마술적 순간들을 표준적인 고딕적 요소들을 사용해서 연출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하고 일상적인 현실의 일부로 연출하는 데 있다고 지젝은 강조한다. 사물이 지닌 영묘한 성격에 직접 맞닥뜨리게 해주는 인터페이스는 표준적인 봉합 과정보다도 더 근본적인 층위에서 작용한다. 그것은 봉합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을 때 발생하며, 결국 우리의 우주는 본래 존재론적으로 온전히 구성된 것이 아님을 환기시킨다.


이러한 논의는 이전의 봉합 이론에서 바라보았던 주체의 위상을 변화시킨다. 기존 봉합 이론에서 주체는 구성된 현상의 공간 내부에 거주하지만 그러한 현상을 발생시킨 것으로 (잘못) 지각되는 상상적 행위자다. 그러나 인터페이스 기능이 역설하는 것은 상징 질서, 즉 대타자에 결핍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대타자의 결핍은 주체로 하여금 자신의 결핍을 대타자의 결핍과 동일시함으로써 기표 속에서의 전적인 ‘소외’를 피할 수 있게 해준다. 주체는 단지 대타자의 기표에 가려져 소멸되는 효과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대타자의 결핍에서 타자의 욕망을 통해 스스로 욕망하게 되는 욕망의 주체다. 이제 주체의 욕망은 상징적 질서를 넘어선 또 다른 것, 즉 ‘대상 a’로 향하게 되는데, 이때 ‘대상 a’는 상징적 질서의 한복판을 꿰뚫는 실재의 구멍, 즉 상징계의 결핍 그 자체다. 그것은 객관적 질서를 지탱하는 주관적 보충물이 아니라 주체 없는 객관적 질서에 맞서 주체성을 유지시켜 주는 객관적 보충물이다. 그것은 주관적인 것도 객관적인 것도 아닌, 이 두 차원의 단락이다. 주체는 ‘대상 a’를 통해서 상징계에서의 소외에서 벗어난다.


지젝에 따르면 봉합은 외적 차이가 언제나 내적 차이임을, 즉 현상들의 장의 외적 한계가 언제나 이 장의 내부에 반영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내가 발견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허구인 것은 내 주위의 세계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인 것이다. 봉합 나아가 인터페이스 개념이 우리에게 환기해주는 것은, 우리는 우리가 만나는 현실의 ‘총체’를 결코 알 수 없다는 것이고, 우리가 현실과의 조우를 견뎌낼 수 있으려면 현실의 어떤 부분이 반드시 ‘탈현실화’되어 유령적 환영으로 경험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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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perturbation > 이라크, 알려지지 않은 알려진 것들
이라크: 빌려온 항아리 슬로베니아 학파 총서 3
슬라보예 지젝 지음, 박대진.박제철.이성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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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3월에 럼스펠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1) "알려진 알려진 것들"이 있다. 이는 우리가 알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들이다. (2) "알려진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알지 못함을 알고 있는 것들이 있다. (3) 하지만 "알려지지 않은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 있다. 즉 알지 못함을 알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19쪽)

 

위에서 럼스펠드는 이라크가 미국에 위협이 되고 있는 까닭을 어떻게든 설명해 내기 위해서 말의 곡예까지를 불사하고 있다. 그는, 이라크와의 대결에서 주요한 위험은 (3)이라고, 즉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감지조차 못하고 있는(즉, 우리가 일지 못하고 있다는 그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있는) 사담 후세인으로부터의 위협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철학자 흉내를 내보려 했던 럼스펠드는 그러나 하나를 빠뜨리고 말았는데, 지젝이 그것을 놓칠 리 없다. "우리가 잊지 말고 덧붙여야 하는 것은 결정적인 네번째 항목이다. (4) "알려지지 않은 알려진 것들 unknown knowns""(19쪽)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데, 다만 우리가 알고 있다는 그 사실을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인 것들이 있다. 그것이 바로 "알려지지 않은 알려진 것들"이다. 물론 이것은 바로 프로이트적의 의미에서의 "무의식"의 정의와 일치한다. 라캉이 "그 자신을 알지 못하는 앎"이라고 절묘하게 정의한 그 무의식 말이다.

 

이 책에서 지젝은 이라크 전쟁에 관해 "알려지지 않은 알려진 것들", 즉 이라크 전쟁의 무의식을 분석한다. 우리에게 소개된 지젝은 주로 정신분석이론가로서의 지젝, 그것도 주로 영화를 통해 정신분석을 재기넘치게 설명하는 이론가로서의 지젝이다. 번역되어 있는 책들 중에서 읽히는 번역들은 대다수가 (영화를 자주 거론하는) 초기 저작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슬라보예 지젝'의 반쪽일 뿐이다. 이 책에서 '지젝'의 정신분석과 '슬라보예'의 정치비평은 비로소 행복하게 만난다. 물론 둘의 만남이 이번이 처음인 것은 아니다. 그에겐 이미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Verso, 2002) 를 위시한 정치적인 저작들이 있다. 그러나 그 책은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인간사랑)라는 고풍스런 제목 하에 '사막'의 모래같은 문장들로 번역된 뒤, '환대'가 아니라 '박대'받았다. "믿음에 대하여"(동문선)의 번역 상태가 우리의 혹시나 하는 '믿음'을 저버린 지 얼마되지 않은 때의 일이었다. 

 

아마도 이 책은 지젝의 정치적인 저작 중에서 김포공항을 무사히 통과한, 즉 우리말로 유려하게 읽히는 첫번째 책으로 기록될 것이다(역자들에게 감사를!). 이 책의 본론 역할을 하는 것은 1장이며, 지젝은 1장을 "미국의 이라크 공격에 관해 펼쳐지는 이야기에 대한 저자의 직접적인 인상들과 반응들의 잡동사니"라고 말하고 있는데, 물론 여기서 '잡동사니'란 탁월한 통찰력(이 책의 부제가 '빌려온 항아리'인 이유를 알게 되는 순간 당신은 그 비유를 곧장 어딘가에든 써먹고 싶어질 것이다), 거침없는 분석(이라크에서 출발하여, 프로이트와 체스터튼을 거치고, 바디우와 베르그송을 통과하여 다시 이라크로),  지젝 특유의 지적인 상쾌함을 동반하는 유머(지젝에 따르면, 2003년 12월 후세인이 체포되었을 때 의료진들이 그의 입 속을 들여다본 것은 대량살상무기를 찾기 위해서다!)를 통칭하는 용어에 불과하다.  

 

설사 당신이 정신분석에 관한 배경지식이 별로 없다 할지라도, 적어도 '잡동사니' 1장을 읽는 데에는 별다른 곤란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물론 이 1장 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다. 지젝의 애독자로서, 기쁜 마음으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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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빌려온 항아리 슬로베니아 학파 총서 3
슬라보예 지젝 지음, 박대진.박제철.이성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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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미군의 이라크 포로학대와 관련된 최근의 무수한 논의에서 빠뜨린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미군에 의해 발가벗긴 채 서로 올라타고 집단 성행위의 체위와 유사한 굴욕적인 자세를 강요받은 이라크 포로들에 함축된 바의 것은, 바로 오늘날의 인간이 호모 사케르(Homo Sacer: 고대 로마에서 일반시민이 법적인 공황상태에서 날것의 생명체로 환원되는 자연상태의 존재)의 존재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한낱 생체해부의 날것의 대상으로 환원된다는 진실은 이 반대편에 유사한 사건이 자리잡았다는 것을 통해 더욱 명백해진다. 최근에 알 카에다와 연관된 무장단체가 미국인을 참수하는 광경을 보여줌으로써 이라크 포로 학대에 대한 직접적인 보복을 했다(아직도 우리 모두에게 충격적인 고(故) 김선일씨의 죽음도 이와 동일한 경우다). 평균적인 소시민들(평범하고도 가난한 시민이었던 김선일씨의 경우)도 전쟁과 같은 비상사태에서 바로 이라크 포로와 동일한 위치에 놓여질 수 있다는 사실.


호모 사케르적 존재로 환원된 이라크 포로나 처형당한 미국인과 한국인 모두 기존의 의미에서 전쟁 포로이거나 시민 희생자가 더 이상 아니다. 이라크군 포로는 더 이상 포로가 아니며, 처형당한 한국 시민도 더 이상 시민이 아니다. 그들은 전쟁 중에 군인으로 죽거나 시민으로 죽는 것이 아니다. 호모 사케르는 라캉의 말을 빌면 “두 죽음 사이”의 유령적인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도 언제든지 호모 사케르의 위치에 처해질 수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이번 이라크 전쟁의 “부수적 효과”가 가져온 “실재적 진실”이라면 어떡할 것인가. 김선일씨의 비극적인 죽음은 이 '실재적 진실'의 첫 단계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추상적인 비디오 게임과도 같은 미군의 작전이 일으키는 말없는 엄청난 파괴를 뒤로한 채 다분히 전근대적인 처형방식으로 미국인을 참수하는 생생한 장면을 끔찍하게 여기는 대다수의 반응보다 더 중요한 진실이 있다. 여기서 전근대적인 처벌행위를 상연하는 것이 비디오 카메라라는 소형 미디어라는 사실을 잠시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최초의 스펙터클 이론가 제러미 벤섬이 말한 것처럼, 본보기적 처벌의 의도는 다른 모든 예상되는 범죄행위를 차단하기 위한 스펙터클의 효과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그 스펙터클을 응시하는 것으로 가정된 만인을 위해 상연된 것이다. 비디오 게임과도 같은 미군의 전쟁행위, 맞은 편의 이라크 포로에 대한 외설적 학대와 미국인에 대한 참수장면은 미디어의 두 가지 상상적 효과일 것이다. 전쟁이 시작되면서 도널드 럼즈펠드가 바그다드 진격 작전을 “충격과 공포Shock and Awe”라고 이름붙였을 때, 그 메시지의 진정한 수신자는 바로 그 메시지를 시청하는 우리들이 아니었던가! 이라크 민병대가 매우 조직적으로 미국(과 그 동맹국)이 이라크에서 한 일을 바로 그 방식대로 되돌려줄 때, 그 방식은 너무나 섬뜩히 “미국적”이지 않은가! 라캉의 말처럼, 편지는 반드시 제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진짜 재앙 중의 재앙이다. 우리 역시 김선일씨의 죽음을 접하면서 이미 그 재앙의 문턱에 들어서 있음을 어느새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이 재앙을 정치적 유토피아의 차원을 되살리고 그것을 실재에 위치지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최근에 파병과 관련된 모든 증상적 고르디우스의 매듭은 더 단단하고도 복잡하게 얽혀있다. 진정한 정치적 행위가 있다면, 그것은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단칼로 내리치는 것일 터인데, 우리는 레닌이 그랬던 것처럼 (열린우리당과 같은) 민주주의의 실용적인 유혹의 제스처를 가장 위험한 적신호로 알고 거부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악수를 거부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좌표 그 자체를 바깥에서부터 문제삼는 행위와도 상관적이다. 만일 이것이 아니라면, 현재의 파병을 둘러싼 어떠한 히스테리적 담론도 결국 민주주의라는 텅빈 기표를 차지하고 있는 허식적 주인과의 타협을 궁극적으로 인정하는 바가 되거나 주인을 그대로 놔두면서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으면 하는 식으로, 욕망을 부정하는 욕망으로 귀착되고 말 것이다. 우리 전쟁 반대자들, 당신이 지금 진정으로 욕망하는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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