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담유 > 인터페이스가 인도하는 실재의 구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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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눈물의 공포
슬라보예 지젝 지음, 오영숙,김소연 외 옮김 / 울력 / 2004년 4월
평점 :
지젝은 (68혁명의 세례를 받은 1970년대의 영화 이론가들로 대변되는) 과거의 영화 이론이 ‘봉합(La suture)’을 일종의 종결로 받아들이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과거의 이론이 봉합을 통해 생산 과정의 간극과 메커니즘의 흔적들이 지워지고 그 결과 생산물이 자연스러운 하나의 유기적 전체처럼 보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에 반기를 든다. 그에게 봉합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자기 폐쇄가 선험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 배제된 외재성은 언제나 내부에 그 흔적을 남긴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서는 외부가 내부에 새겨짐으로써 그 장을 ‘봉합’하면서 외부를 필요로 하지 않는 자기 폐쇄의 효과를 낳고 자신의 생산의 흔적들을 지우고 자연스러운 유기적 전체처럼 보일 수 있게 되는 방식으로 이해되던 이전의 봉합의 원리는 부인된다.
지젝은, 그간의 이론은 라캉 이론의 상징계적 측면만을 문제시했지만 제대로 된 이론을 위해서는 실재계로 관심을 돌린 라캉의 후기 이론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라캉의 독자성은 바로 상징계가 아니라 실재계에 있다는 것이다. [라캉의] 실재계에 대한 관심이 좀더 중요하다고 보는 지젝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헤겔의 변증법적인 보편성, 즉 ‘구체적 보편성’ 개념을 끌어온다. 변증법적인 보편성이란 일단의 특수한 조건들 안에서만 출현해 스스로 명료하게 표현되는 보편성을 의미한다. 지젝은 헤겔의 구체적 보편성, 즉 예외를 구조적으로 필요로 하는 보편성, 특수한 내용의 일부가 되는 보편적 틀, 구체적인 총체성에 관심을 가질 때라야 실재계의 진실을 엿볼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이 가능한 것은 바로 영화 내에서 히치콕이나 키에슬롭스키와 같은 예외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히치콕의 영화는 기존 봉합 과정을 따라 주체로 하여금 안심하게 하는 대신 외재하는 환상적 ‘응시’의 시점과 직접 맞닥뜨리게 한다. 쇼트와 역쇼트 간의 교환에 의해 관객을 안심시키는 봉합의 효과를 애당초 만들어내지 않고 긴장이 해소되지 않은 채로 내버려두는 것이다. 이 긴장이 고조돼 마침내 그 긴장이 훨씬 더 근본적인 또 다른 이중성 속으로 가속화되면서 그것이 해소되는 동시에 폭발해서 통제 불능의 상태가 되는 것처럼 보일 때, 객관적 쇼트로 보이던 것은 일순 주관적 쇼트로 탈바꿈한다. 이때의 주관성은 극중 주인공의 표준적인 다이제시스적인 주관성이 아니라 사물 자체의 불가능한/트라우마적인 주관성이다. 이렇듯 히치콕은 주관적인 쇼트와 객관적인 쇼트의 표준적인 교환을 전복하는 방식으로 사물 자체의 불가능한/트라우마적인 주관성, 즉 ‘대상 a’, ‘객관적-외적 현실을 구성하는 주관적인 요소’, ‘실재의 구멍’을 엿보게 한다.
한편 주관적인 쇼트와 객관적인 쇼트의 교환이 봉합 효과를 산출해내지 못할 때 인터페이스 기능이 들어오는데, 관객으로 하여금 일상적인 장면에서 이러한 인터페이스의 차원을 지각하게 만드는 데 뛰어난 솜씨를 보여준 이가 바로 키에슬롭스키다. 인터페이스 기능이란, 단조로운 현실의 한 부분이 갑자기 “지각의 문”, 즉 스크린으로 기능하기 시작하면서 그것을 통해 또 다른 순전히 환상적인 차원을 지각하게끔 하는 기능을 의미한다. 키에슬롭스키의 뛰어난 점은 바로 이러한 인터페이스의 마술적 순간들을 표준적인 고딕적 요소들을 사용해서 연출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하고 일상적인 현실의 일부로 연출하는 데 있다고 지젝은 강조한다. 사물이 지닌 영묘한 성격에 직접 맞닥뜨리게 해주는 인터페이스는 표준적인 봉합 과정보다도 더 근본적인 층위에서 작용한다. 그것은 봉합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을 때 발생하며, 결국 우리의 우주는 본래 존재론적으로 온전히 구성된 것이 아님을 환기시킨다.
이러한 논의는 이전의 봉합 이론에서 바라보았던 주체의 위상을 변화시킨다. 기존 봉합 이론에서 주체는 구성된 현상의 공간 내부에 거주하지만 그러한 현상을 발생시킨 것으로 (잘못) 지각되는 상상적 행위자다. 그러나 인터페이스 기능이 역설하는 것은 상징 질서, 즉 대타자에 결핍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대타자의 결핍은 주체로 하여금 자신의 결핍을 대타자의 결핍과 동일시함으로써 기표 속에서의 전적인 ‘소외’를 피할 수 있게 해준다. 주체는 단지 대타자의 기표에 가려져 소멸되는 효과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대타자의 결핍에서 타자의 욕망을 통해 스스로 욕망하게 되는 욕망의 주체다. 이제 주체의 욕망은 상징적 질서를 넘어선 또 다른 것, 즉 ‘대상 a’로 향하게 되는데, 이때 ‘대상 a’는 상징적 질서의 한복판을 꿰뚫는 실재의 구멍, 즉 상징계의 결핍 그 자체다. 그것은 객관적 질서를 지탱하는 주관적 보충물이 아니라 주체 없는 객관적 질서에 맞서 주체성을 유지시켜 주는 객관적 보충물이다. 그것은 주관적인 것도 객관적인 것도 아닌, 이 두 차원의 단락이다. 주체는 ‘대상 a’를 통해서 상징계에서의 소외에서 벗어난다.
지젝에 따르면 봉합은 외적 차이가 언제나 내적 차이임을, 즉 현상들의 장의 외적 한계가 언제나 이 장의 내부에 반영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내가 발견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허구인 것은 내 주위의 세계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인 것이다. 봉합 나아가 인터페이스 개념이 우리에게 환기해주는 것은, 우리는 우리가 만나는 현실의 ‘총체’를 결코 알 수 없다는 것이고, 우리가 현실과의 조우를 견뎌낼 수 있으려면 현실의 어떤 부분이 반드시 ‘탈현실화’되어 유령적 환영으로 경험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