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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증오의 도착들 ㅣ 슬로베니아 학파 총서 1
레나타 살레클 지음, 이성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3년 11월
평점 :
절판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지 마라”라고 말할 때의 라캉을 좋아하기까지에는 품이 좀 들었다. 그가 남긴 말들을 알아먹는 데 시간 따윈 걸리지 않았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나를 그를 증(상을 가진)자로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만큼 내게 있어 라캉을 이해하는 일은 사랑을 (유지)하는 일만큼이나 고되다. 물론 그의 언어가 외국어이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 하지만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가 구사하던 언어는 본질적으로 외래어에 속하는 무엇이(었)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언어, 나는 그런 언어를 구사하는 타자들에게 십중팔구 매료되는데, 문제는 그 매료의 대가로 (관념적) 고통을 떠안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언어’, 그것이 허구라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는 말이다.
“난 당신을 사랑한다. 하지만 나는 불가해하게도 당신 안에 있는 당신보다 더한 어떤 것――대상 a――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당신을 절제한다”라는 라캉의 말은 내 이런 증상을 시원하게 분석해준다. 언어로써 표현하고 싶어 안달을 치면서도 막상 글로나 말로나 더듬증에 시달린다거나, 언어를 경멸하면서도 사용할 수밖에 없고 또한 증오하면서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나의 증상은 언어(타자, 혹은 법, 혹은 상징계)의 외상적 결여, 허구 그 자체를 지칭하는 라캉의 ‘대상 a’ 개념에 의해 그 발원지가 명확해진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언어란 ‘없다’. 만약 그런 언어가 있다면 그것은 언어의 범주를 벗어나 있거나 넘어서 있는 무엇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언어는 비트겐슈타인 식으로 말하자면 ‘말해져서는 안 될 것’일 터이다. 나를 매료시킨 라캉의 말들은 프로이트와 소쉬르를 포함하여 전대의 획기적인 여러 이론들을 경유하여 내게로 온 것이며, 또 그것이 아니더라도 언어 자체가 타자성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나는 라캉이라는, 언어라는, 내가 강박적으로 고통스럽게 붙들려 있던 세계에서 놓여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나는 라캉을 진정으로 욕망할 수 있게 된 것일까?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주체로서의 너는 너의 환상을 가로지를 수 있다고, 라캉은 또한 이미 오래전에 말해두었다.
라캉 이론에 근거하여 이론과 실천 양 영역에서 현 시대가 보이는 여러 증상과 징후들에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대고 있는 슬로베니아 라캉 학파의 일원인 레나타 살레츨의 이 책을 읽는 일은 그래서 즐거웠다. 즐겁게 읽어낼 수 있어서 안도의 한숨까지 나올 지경이다. 인간과 사회의 불가해한 심층들을 낱낱이 분석해내는 살레츨의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상상적 세계를 다루는 예술 작품에서나 느낄 법한 미적 쾌감이 뒤따른다. 분석이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은 이 책이 내게 준 큰 선물이다. 타자와 세계를 욕망하는 일이 사랑과 증오의 도착에 붙들려 충분히 즐겁지 못한 삶에 직면해 있다면 이 책을 기꺼이 읽어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라캉을 처음 만나는 경우라면 브루스 핑크의 《라캉과 정신의학》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기본 저작들을 경유해볼 것을 또한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