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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빌려온 항아리 ㅣ 슬로베니아 학파 총서 3
슬라보예 지젝 지음, 박대진.박제철.이성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4년 4월
평점 :
최근의 미군의 이라크 포로학대와 관련된 최근의 무수한 논의에서 빠뜨린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미군에 의해 발가벗긴 채 서로 올라타고 집단 성행위의 체위와 유사한 굴욕적인 자세를 강요받은 이라크 포로들에 함축된 바의 것은, 바로 오늘날의 인간이 호모 사케르(Homo Sacer: 고대 로마에서 일반시민이 법적인 공황상태에서 날것의 생명체로 환원되는 자연상태의 존재)의 존재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한낱 생체해부의 날것의 대상으로 환원된다는 진실은 이 반대편에 유사한 사건이 자리잡았다는 것을 통해 더욱 명백해진다. 최근에 알 카에다와 연관된 무장단체가 미국인을 참수하는 광경을 보여줌으로써 이라크 포로 학대에 대한 직접적인 보복을 했다(아직도 우리 모두에게 충격적인 고(故) 김선일씨의 죽음도 이와 동일한 경우다). 평균적인 소시민들(평범하고도 가난한 시민이었던 김선일씨의 경우)도 전쟁과 같은 비상사태에서 바로 이라크 포로와 동일한 위치에 놓여질 수 있다는 사실.
호모 사케르적 존재로 환원된 이라크 포로나 처형당한 미국인과 한국인 모두 기존의 의미에서 전쟁 포로이거나 시민 희생자가 더 이상 아니다. 이라크군 포로는 더 이상 포로가 아니며, 처형당한 한국 시민도 더 이상 시민이 아니다. 그들은 전쟁 중에 군인으로 죽거나 시민으로 죽는 것이 아니다. 호모 사케르는 라캉의 말을 빌면 “두 죽음 사이”의 유령적인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도 언제든지 호모 사케르의 위치에 처해질 수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이번 이라크 전쟁의 “부수적 효과”가 가져온 “실재적 진실”이라면 어떡할 것인가. 김선일씨의 비극적인 죽음은 이 '실재적 진실'의 첫 단계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추상적인 비디오 게임과도 같은 미군의 작전이 일으키는 말없는 엄청난 파괴를 뒤로한 채 다분히 전근대적인 처형방식으로 미국인을 참수하는 생생한 장면을 끔찍하게 여기는 대다수의 반응보다 더 중요한 진실이 있다. 여기서 전근대적인 처벌행위를 상연하는 것이 비디오 카메라라는 소형 미디어라는 사실을 잠시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최초의 스펙터클 이론가 제러미 벤섬이 말한 것처럼, 본보기적 처벌의 의도는 다른 모든 예상되는 범죄행위를 차단하기 위한 스펙터클의 효과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그 스펙터클을 응시하는 것으로 가정된 만인을 위해 상연된 것이다. 비디오 게임과도 같은 미군의 전쟁행위, 맞은 편의 이라크 포로에 대한 외설적 학대와 미국인에 대한 참수장면은 미디어의 두 가지 상상적 효과일 것이다. 전쟁이 시작되면서 도널드 럼즈펠드가 바그다드 진격 작전을 “충격과 공포Shock and Awe”라고 이름붙였을 때, 그 메시지의 진정한 수신자는 바로 그 메시지를 시청하는 우리들이 아니었던가! 이라크 민병대가 매우 조직적으로 미국(과 그 동맹국)이 이라크에서 한 일을 바로 그 방식대로 되돌려줄 때, 그 방식은 너무나 섬뜩히 “미국적”이지 않은가! 라캉의 말처럼, 편지는 반드시 제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진짜 재앙 중의 재앙이다. 우리 역시 김선일씨의 죽음을 접하면서 이미 그 재앙의 문턱에 들어서 있음을 어느새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이 재앙을 정치적 유토피아의 차원을 되살리고 그것을 실재에 위치지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최근에 파병과 관련된 모든 증상적 고르디우스의 매듭은 더 단단하고도 복잡하게 얽혀있다. 진정한 정치적 행위가 있다면, 그것은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단칼로 내리치는 것일 터인데, 우리는 레닌이 그랬던 것처럼 (열린우리당과 같은) 민주주의의 실용적인 유혹의 제스처를 가장 위험한 적신호로 알고 거부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악수를 거부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좌표 그 자체를 바깥에서부터 문제삼는 행위와도 상관적이다. 만일 이것이 아니라면, 현재의 파병을 둘러싼 어떠한 히스테리적 담론도 결국 민주주의라는 텅빈 기표를 차지하고 있는 허식적 주인과의 타협을 궁극적으로 인정하는 바가 되거나 주인을 그대로 놔두면서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으면 하는 식으로, 욕망을 부정하는 욕망으로 귀착되고 말 것이다. 우리 전쟁 반대자들, 당신이 지금 진정으로 욕망하는 것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