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담유 > 잃어버린 시간? 잃어버린 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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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
알랭 레몽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A. S. 바이어트의 《소유》라는 소설은 중간 중간 주목할 만한 북유럽 서사시를 끼워 넣고 있는데(물론 저자의 순수 창작물이다), 다른 어떤 형태의 존재(물)보다도 주목하게 되는 존재가 등장한다. 지상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천상에서도 내던져진, 인간을 구원할 만큼 선하지도 않으면서 해악을 끼칠 만큼 사악하지도 않은, 단순히 대기 속을 날아다닐 뿐인 정령들이 그것이다. 이들이 등장하는 <요정 멜루지나>라는 (만들어진) 서사시를 여러 번 넘겨 읽는 동안, 나는 문득 내가 더 이상 내세를 꿈꾸지 않는 자가 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깃들 곳 없어 대기를 떠다니는 정령들은 충분히 연민을 불러일으키지만, 이 연민이라는 감정의 근본에는 뭔가 나 자신도 모르게 작동된 ‘조작’이 자리하고 있다는 의구심이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게 지상과 천상이란, 이분법을 사랑하는 인간의 관념일 뿐이다. 그러니 지상과 천상 ‘사이’, 그 ‘간격’ 또한 관념이다(나는 여기서 ‘관념’을 물질에 상대되는 비물질에 대응하여 쓰고 있지 않다. 마음이란 비물질이지만 거짓은 아니다. 분명히 존재하는 참이다. 분명히 존재하는 참은 관념이 아니라는 게 내 생각인데, 내 이런 생각을 누구라도 비웃어도 상관없다). 그러하니 ‘사이’와 ‘간격’이라는 관념의 공간에 거처하는 저 정령들은 창조된 자들에 불과한 것이다. 창조된 자들이란 곧 없는 자들이기도 하다. 그들은 없는 자들이다. 그러나 그 존재하지 않는 자들이 지금 내 마음의 한끝을 잡고 흔든다. 이 분명한 요동, 참 묘하다. 내가 연민이라는, 대상 없는 감정을 향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분명해졌는데도 말이다.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을 읽는 동안에도 ‘대상 없는 감정’에 대한 사유는 계속되었다. 쉰이 넘어선 작가가 자신의 생에서 상실한 것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늘어놓고 있으니, 누구라고 이 쓸쓸하기 짝이 없는 회고담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전쟁으로 불타버린 옛집, 실종되거나 죽어버린 사람들…….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었던 대상들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바로 그 존재하지 않는 대상들의 아우라가 오늘의 작가를 둘러싸고 놓아주지 않는다. 그래서 작가는 쓰고 있는 것일 터이다. “나는 전쟁을 끝내기 위하여 이 책을 썼다. 모르탱의 집은 허물어졌다. 르 테이욀의 집은 허물어졌다. 트랑의 집은 팔려버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누이가 죽었다. 나는 산 사람들, 그리고 죽은 사람들, 그들 모두와 평화롭게 지내고 싶다.”(164)
‘전쟁’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만큼,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들과 지지고 볶으며 살아간다. 누군가에게는 이 전쟁이 거의 전 생을 지배하기도 할 테고, 누군가에게는 그저 100여 개가 넘는 텔레비전 채널을 돌려 바꾸는 순간만큼이나 찰나적으로 존재하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알랭 레몽이라는 작가에게는 이 전쟁이 보다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 같다. 소설의 화자는 회고담 끝부분에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고백한다. “내게는 혼자 남몰래 들여다보는, 혼자 남몰래밖에는 보지 못하는 이 사진들이 있다. 트랑에서의 행복이 찍힌 이 사진들. 해가 환하게 비치는 어느 날 부엌이나 집 앞에서, 혹은 빌카르티에 연못가에서, 숲 속에서 찍은. 모르탱, 전쟁의 모험, 그리고 연합군 상륙에서부터 온갖 놀이와 꿈과 의식과 비밀들로 가득한 그 낙원에 이르기까지 우리들의 역사로 한 덩어리가 된 우리 어린아이들. 개를 쓰다듬으면서 햇볕을 쬐는 어머니, 그리고 돌아가시기 불과 얼마 전 검은 양복을 입고 가족들과는 약간 떨어져 서 있는 아버지의 이 사진.”(163) 유년 그리고 행복과 낙원이 담겨 있는 이 사진들의 아우라는 오늘, 지금, 들여다보는 그 자신만의 것이다. 그러니 혼자서, 혼자서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이 세계에는 누구도 함께할 수 없는 전쟁이란 게 있는 것이다.
200페이지가 채 되지 않는 이 짧은 이야기를 통해 작가가 열거해주는 상실 목록은 대체로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중에서도 놀이의 상실에 대한 그의 통찰력은 이 책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이 아닐까 한다. 이 부분은 내게 ‘대상 없는 감정’이 너무나 분명한 물질, 그래서 에너지로 화하는 지점이기도 했다. 그 감정이란 게 연민도 슬픔도 뭣도 아니지만, 어느 날 문득 사랑이 끝나버리는 것처럼 놀이가 내게서도 떠나갔음을 확인하는 일은 분명 이물감, 그 이상의 무엇을 던져준다.
우리는 거기, 마당에서 수백만 시간의 때묻지 않은 행복의 시간을 보냈다. 어머니는 닭과 토끼에게 먹이를 주려고 건너왔다가 우리가 무슨 놀이를 하는지 유심히 들여다보곤 했다. 우리는 어머니에게 구경을 시켜주었고 어머니는 우리에게 아이디어를 말해주었다. 나는 거기서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 덕분에, 햇빛과 놀고 햇빛을 길들이고 날씨를 즐기고 나뭇잎들의 유희를 음미하고 땅 위로 뻗어오는 그림자를 감상하는 것을 배웠다. 여기서 우리란 어린아이들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어린 축의 아이들 말이다. 아녜스, 자크, 마들렌, 베르나르, 그리고 나. 커버리고 나면 아이들은 더 이상 놀이를 하지 않는다. 아녜스는 어느 날 놀이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자크도. 어느 날 문득 놀이를 할 줄 모르게 되는 것이다. 비밀을 잊어버린다.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그걸 어떻게 하는지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온갖 삶들을 마음속으로 지어내고 그것을 굳게 믿는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게 끝나버린다. 그냥 그렇게 갑자기 딱 멈춰버린 것이다. 놀이의 상실, 놀이의 망각, 나는 그게 바로 일생 중 최악의 날이 아닌가 한다. 누구나 그런 날을 거치게 마련이다. 어느 날 내 차례가 되었다. 그렇지만 나는 마지막까지, 마지막 날까지, 마지막 순간까지 남김없이 즐겼다. 내가 기록을 세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가장 오랫동안 즐긴 것이다. 하늘이 내린 선물이다. 생생하게 기억난다. 어느 날 내 또래의 친구 하나가 나를 찾아서 마당으로 왔다가 내가 마들렌, 베르나르와 함께 놀고 있는 것을 보고는 내게 쏘아붙였다. <아니 그 나이에 아직도 이런 놀이를 하는 거야?> 그렇다. 나는 아직도 그런 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솔직히 나는 그런 놀이를 할 줄 모르게 된 그를 동정했다. 나중에, 그 울타리를, 그 경계를 넘어와버리면 끝이다. 다시 뒤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결코. (33~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