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최근에 나온 책들(60)
최근에 나온 책들에 대한 소개로는 올해의 마지막 연재가 될 듯하다(그러길 바란다). 지난 3월에 31번째를 썼으니까 10개월 못되는 기간에 30편의 페이퍼를 썼다. 그 정도면 어지간하다고 생각한다(내년까지 100회 정도를 채우고 방향전환을 모색하든지 해야겠다).
가장 먼저 꼽을 책은 단연 가라타니 고진의 <트랜스크리틱>(한길사)이다. 2월초 러시아에서 돌아오자 마자 한 지인에게 물어본 것이 <트랜스크리틱>의 번역 유무였을 정도로 나로선 손꼽아 기다리던 책이다. 작년에 나온 <언어와 비극>(도서출판b)에 이어서 거르지 않고 올해도 그의 주저가 번역/소개된 것이 반갑다. 일어본은 저자가 여러 차례 개작을 했으며, 영역본도 올 5월에야 MIT출판사에서 나왔다(정확하게는 2003년에 나왔다. 올 2005년에 나온 건 페이퍼백이다. 내가 갖고 있는 건 당연이 이 페이퍼백이고. 한편, 영역자는 <은유로서의 건축>과 마찬가지로 사부 고소이다. 내가 알기에 고진의 책은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을 포함해 3권이 영역돼 있는 듯하다). 그 책을 나는 지난 가을에 주문해서 서가에 꽂아두고 있었다.
저자에 따르면 "<트랜스크리틱>은 나에게 아주 특별한 책이다. 지금껏 이렇게 두꺼운 책을 쓴 적이 없으며, 또 이렇게 시간을 들여 쓴 적도 없다. 나는 거의 10년 동안 이 책에 몰두했다. 고치고 또 고치기를 거듭한 결과, 40년 전부터 생각해왔던 문제에 결론을 낼 수 있었다." 해서, 이 책은 그가 '납득할 수 있는' 유일한 책이라고도 한다. 그러니 어찌 독서를 주저할 수 있으랴!
부제가 '칸트와 마르크스 넘어서기'인 데서 알 수 있지만, 고진의 책은 칸트로부터 마르크스를 읽어내고 마르크스로부터 칸트를 읽어내고자 하는 시도이다. 그는 "모든 고정관념(외형)이나 과거의 해석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마르크스의 텍스트(주로 <자본론>) 속에서 마르크스를 읽는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직접 밝히고 있는 것처럼, 그가 마르크스에게서 발견한 것은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투철한 통찰이고, 그 통찰은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쉽게 극복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소개의 말을 좀더 옮겨오면, "그는 경제학자들이 <자본론>을 단지 경제학 책으로만 본다는 사실에 대해 불만을 제기한다. <자본론>에서의 '비판'이 자본주의 고전경제학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 자본의 욕동(欲動, drive)과 한계를 밝히는 것이고, 나아가 그 근저에서 교환행위에 불가피하게 따라다니는 난점들을 찾아내는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론>은 자본주의로부터 손쉽게 벗어날 수 있는 출구를 제시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렇게 쉬운 출구가 있을 수 없는 까닭을 밝힘으로써 오로지 자본주의에 대한 실천적 개입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형이상학을 비판하기보다 인간 이성의 한계를 여지없이 드러냄으로써 실천 가능성을 시사하려고 한 것도 이러한 맥락인데, 이것이 바로 가라타니가 마르크스와 칸트를 결부시킨 이유이다."
즉, 그는 "자본주의 경제나 국가에 대한 계몽적 비판이나 문화적 저항에 머물러 있는 데 만족할 수 없었고, (...) 마르크스를 칸트적 '비판'에서 다시 생각하는 일"에 나선다. 우리의 슬라보예 지젝에 따르면, "이 놀랄 만한 책은 현대 자본 제국에 대한 대항의 철학적/정치적 기초를 다시 주조하는 가장 독창적인 시도 가운데 하나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에 대한 '문화적' 저항이라는 꽉 막힌 상황을 타파하고,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의 현실성을 주장하려는 모든 사람들이 꼭 읽어야 하는 책"이다. 지젝의 종종 과장하는 버릇을 감안하더라도 고진을 읽어야 할 이유는 충분한 셈이다(참고로, 올해엔 '문화이론의 엘비스' 지젝에 관한 영화도 만들어졌다. 이미지는 영화의 포스터이다. 조만간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고진 자신이 밝히고 있는 바이지만, 이것은 모험/실험을 감행하는 주장이며 그러한 '위험' 자체에 의의가 있기도 하다(오직 하이에나류의 비평가들만이 '안전한' 말들만을 늘어놓는다). 그가 책에 만족감을 표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위험'과 관련될 것이다. 여하튼 고진 비평의 진수를 경험해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니 연초의 휴가를 물건너가서 라운딩하며 보낼 수 없는 이들에게도 진정한 '트랜스'의 즐거움이 무엇인지 선사해줄 책이겠다.
물론 이 책은 고진의 우려대로 일반독자가 읽기엔 좀 어렵다. 해서, 사전에 예비적으로 몇 권 읽어두는 게 좋겠다. 내가 고진에 입문하게 된 책은 <탐구1>(새물결, 1998)이었는데, 역시 <트랜스크리틱>의 역자 송태욱씨의 작품이다(그는 최강의 고진 번역자이다). 아주 쉽고 재미있는 책이다. 그리고 <윤리21>(사회평론, 2001)을 권하겠다. '트랜스크리틱'의 아이디어가 이미 제안되고 또 시험되고 있는 책이다(이 역시 역자는 송태욱). 물론 난해하지 않으며 죽 읽어나갈 수 있다. 두 가지 책을 재미있게 읽은 독자라면 <트랜스크리틱>을 바로 손에 집어들어도 좋겠다. <일본 정신의 기원>(원제는 <일본정신분석>),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 <은유로서의 건축> 등은 옵션이다(<마르크스>만을 아직 나는 안 읽었다. 참고로, 고진은 한국어판 서문에서 <윤리21>과 <일본정신의 기원>을 같이 참조해줄 것을 권했다).
만약에 이런 책들이 너무 난해하여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다면, 게다가 재미마저 없다고 하면 당신은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걸출한 비평가와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고 해야겠다(너무 크게 유감스러울 건 없다. 덕분에 지출이 많이 줄어드니까). 하지만 그럴 경우에라도 <트랜스크리틱>을 '소장용'으로 구입해서 서가에 꽂아두시길 바란다(그래야 양서들이 더 많이 나올 수 있다).
이상에서 이미지로 나열한 책들은 번역자 송태욱씨가 올해 <트랜스크리틱>을 제외하고도 낸 번역서들이다. 내가 갖고 있는 건 오사와 마사치의 <연애의 불가능성에 대하여>(그린비)뿐이지만(저자는 고진 사단에 속한다), 이러한 번역량 또한 경탄에 값한다. 내가 무슨 권한이 있다면 올해의 인문서 번역가상이라도 주고 싶다. 교양과학서에서 이에 견줄 만한 번역자는 이한음씨이다. 그가 올해 번역한 책들이 알라딘에서 12종 가량이 검색된다(얇은 책들이 포함돼 있긴 하지만). 주요한 책들을 나열해보면 이렇다.
도킨스의 책 <악마의 사도>와 <조상 이야기> 두 권을 옮긴 것만으로도 이한음씨 또한 올해의 번역가로서 손색이 없다. 나의 격려가 무슨 보탬이 되지는 않겠지만, 연말에 즈음하여 올 한해 두 번역자의 활약과 업적을 기리고자 한다. 내가 좋아하는 저자의 책들이 신뢰할 만한 역자들의 솜씨로 번역돼 나오는 것만큼 즐거운 일도 흔하진 않다(반대로 그런 책들이 엉터리 역자들을 만날 경우의 끔찍함이라니!).
두번째 책은 윤성우 교수의 <해석의 갈등>(살림). 부제는 '인간 실존과 의미의 낙원'이다. 알다시피 올해 타계한 철학계의 최고 거물이 폴 리쾨르(1913-2005)인바, 해석학의 권위자로서 그의 주저라 할 만한 <해석의 갈등>(아카넷, 2001)의 해설서가 출간된 것은 반가운 일이다('해석의 갈등'은 '해석들 사이의 갈등과 충돌'이란 뜻이다). 리쾨르 전공자인 저자는 리쾨르의 삶과 <해석의 갈등> 전후 시기의 철학을 정리줌으로써 리쾨르 입문서를 겸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리쾨르의 생애에 대해서는 그의 제자이기도 한 프랑수아 도스의 <폴 리쾨르>(동문선, 2005)를 참조할 수 있다. 윤교수에 따르면, "번역상의 몇몇 혼란이 옥의 티로 남았지만 리쾨르의 자전적 삶과 학문적 삶에 대한 연구서로는 더 이상의 책은 기대하지 않아도 좋을" 책이다. 이와 함께 읽어볼 만한 입문서로는 윤교수의 <폴 리쾨르의 철학>(철학과현실사, 2004)가 있다고.
리쾨르의 <해석의 갈등>(1969)은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1960)과 함께 현대 해석학의 최고 업적으로 간주되는 고전이다(비록 논문집이긴 하지만). 이럴 때마다 아쉬운 건 <진리와 방법>이 아직 우리말로 완역되지 않은 사실이다(이번에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된 거지만, <진리와 방법>의 불어본 출간을 주도한 사람이 리쾨르이다. 불역본도 완역본은1996년에야 나왔다고 하니까 한국어본이 지체되는 건 얼마간 이해가능하다. 참고로, 영역본은 두 차례 나왔다). 거기에 비하면 10권 가까이 번역돼 있는 리쾨르의 경우는 사정이 나은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교수의 번역 용례에 따라) <생생한 은유>나 마지막 주저 <기억, 역사, 망각>(2000) 등은 곧 번역되었으면 싶다(이미지들은 영역본의 것이며 후자는 일부가 올해 계간 <세계의 문학>에 소개된 적이 있다. <기억, 역사, 망각>의 러시아어 완역본은 작년에 출간됐다). 리쾨르 스스로가 "자신의 모든 철학적 작업의 결산 내지 종합"이라고 규정했다는 <한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1990; 내가 갖고 있는 영역본 제목으론 'Oneself as another')도 조만간 소개되었으면 싶고.
여하튼 <해석의 갈등>에 포함된 논문 몇 편을 나는 겨울방학에 읽어볼 듯하다(나에겐 영역본과 러시아어본이 있는데, 러시아어본은 완역본이 아니다). <해석의 갈등>과 함께 리쾨르의 후기 주저로 꼽히는 건 1983년부터 나오기 시작한 <시간과 이야기>(전 3권) 시리즈이다. <존재와 시간>이 20세기의 책이라면, <시간과 이야기>는 21세기의 책이 될 것이란 예언도 있을 정도인데, 하이데거와 마찬가지로 후설 현상학에서 출발한 리쾨르의 여정이 '이야기(내러티브)'에 이른 것은 의미심장하다. 나는 두 저작의 커넥션을 '존재-시간-이야기'로 묶고, 하이데거의 못다한 이야기가 리쾨르의 <시간과 이야기>에서 계속 이어지는 것으로 상상하길 좋아한다. 시간이 곧 이야기인 이상 존재의 해명은 궁극적으로 이야기를 매개로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경우 문학은 철학에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것이다). 이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건 먼 장래를 위해 남겨놓은 나의 숙제이다.
여담 한마디. 작년에 타계한 철학자 자크 데리다(1930-2005)는 1960년대 초반 소르본 대학 철학과에서 리쾨르의 강의 조교를 했었다(윤성우 교수의 책에는 데리다의 생년이 1925년으로 잘못 표기돼 있다). "리쾨르보다 일 년 먼저 세상을 떠난 데리다는 고등사범학교 학생이던 1953년에 <에스프리>지가 주관하던 세미나에서 리쾨르를 처음 만났다. 데리다의 회고에 따르면, 이 세미나에서 '역사와 진실'이라는 주제로 리쾨르의 발표가 있었는데, '명확하고 우아하고 논증력이 있고 권위적이지 않으면서도 권위가 있었으며,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사유의 참여를 보여주는' 발표였다고 한다."(69쪽) 데리다의 '제자' 박이문 선생의 <행복한 허무주의자의 열정>(미다스북스, 2005)에는 이 시절 '강의조교' 데리다의 지도를 받던 시절의 에피소드가 '나의 스승 데리다'란 추모의 글에 실려 있다. 영어권에서 나온 연구서들 가운데는 두 사람의 철학을 비교한 <상상력과 우연: 리쾨르와 데리다 철학 간의 차이>(1992)도 출간돼 있다.
세번째 책은 들뢰즈와 레비나스 철학의 전문가인 서동욱 교수의 <일상의 모험>(민음사). 저자도 서문에서 언급하고 있지만, 책은 <차이와 타자>에 실려 있는 '아이와 초월' '일요일이란 무엇인가?' 두 편의 글의 연장선상에서 읽힌다. 즉 일상적인 것들에 철학적 담론의 육체를 부여하려는 시도로 읽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보다 적합한 제목은 '일상의 철학적 구원' 정도인 것으로 보인다. 저자가 붙인 부제 자체가 '태어나 먹고 말하고 연애하며, 죽는 것들의 구원'이기에 더욱 그렇다(책에 실린 몇 편의 글들을 나는 이미 여러 잡지들에서 읽었었는데, 본문의 장들 가운데서 제목을 고르자면 '셰익스피어의 유령학' 정도가 어떨까 싶다. '일상의 모험'이란 제목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소리지만, 주제를 알자면 나는 저자가 아니라 그저 한 독자일 뿐이다!).
저자가 '모험'이라고 이름붙인 건 내가 보기엔 일상성 자체가 갖는 모험성을 지시하는 게 아니라, 범박한/세속적 일상을 철학적으로 담론화하려는 시도를 가리킨다. 그리고 거기에 이 책의 의의가 있다. 그러한 시도를 '모험'으로 간주할 수 있는 한에서 말이다(한편으론 저자는 모범적인 철학적 담론 바깥으로의 모험은 결코 시도하지 않는다. 그의 문장들은 단정하고 정연하다. 그래서 결코 '탈'나지 않는다. 가령 니체 전공자인 김진석 교수의 문장들과 비교해 보라).
그러한 시도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일상(quotidien, Alltaglichkeit)'라는 식으로 우리말 '일상'에 불어와 독어의 일상을 병기해놓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저자의 작업이 일상에 대한 독어와 불어식의 철학적 사유를 우리식 일상에 번역해오는 과정이라는 걸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럴 때 우리의 일상은 '보편적' 일상으로 격상되는 것이기도 하고. 당연히 책은 철학논문 못지 않은 각주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가장 먼저 나오는 각주는 M. Heidegger, Zein und Ziet, 그러니까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독어본의 쪽수이다. 두번째 각주는 메를로-퐁티의 <눈과 정신> 불어본 쪽수이고. 자신의 '일상'이 궁금한 독자에게 이 책은 별 매력을 주지 못하겠지만(그 일상이 '철학적 일상'이 아닌 이상), 자신의 '교양'이 궁금한 독자라면 기꺼이 읽으며 경탄해볼 일이다. 저자는 동시대 젊은 철학자들 가운데 최고의 철학적 교양을 자랑하므로.
레비나스(과거엔 '엠마누엘 레비나스'로 표기됐었으나 '에마뉘엘 레비나스'로 표기가 바뀌었다. 이 또한 '교양'에 속한다) 전공자로서 서동욱 교수는 <존재에서 존재자로>(민음사, 2003)란 역서를 갖고 있는데, 우연찮게도 그의 은사이자 <시간과 타자>(문예출판사, 1996)의 역자인 강영안 교수의 레비나스 연구서도 이번에 출간됐다. <타인의 얼굴>(문학과지성사)이 그것이다. 책에 실린 몇 개의 논문을 역시나 잡지들에서 읽은 바 있는데, (레비나스 철학의 강력한 소개자이자 옹호자인) 저자의 레비나스 연구를 한번 결산하는 의미가 있는 듯하다. 전문서 범주에 속할 듯하지만, 레비나스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일독해 볼 만한 책. 부록으로 레비나스의 저작과 2차문헌, 그리고 국내의 연구현황 등을 개관하고 있기에 연구자들에게는 아주 요긴할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으론 레비나스에 관한 책들을 준-전공자 정도의 수준으론 갖고 있는데, 입문서로서 가장 추천하는 책은 콜린 데이비스의 <엠마누엘 레비나스 -타자를 향한 욕망>(다산글방, 2001)과 알랭 핑켈크로트의 <사랑의 지혜>(동문선, 1998)이다. 두 권 다 어렵지 않으며 읽기 편한 책이다. 레비나스의 대담으론 <윤리와 무한>(다산글방, 2000)이 번역돼 있고, 리처드 커니의 <현대 사상가들과의 대화>(한나래, 1998)도 참조할 수 있다.
네번째 책은 시인이자 소설가이자 러시아문학 연구자이자 비평가 이장욱의 첫 비평집 <나의 우울한 모던 보이>(창비사)이다. 그가 올해 낸 책들이 이로서 이론서 <혁명과 모더니즘>(랜덤하우스중앙), 장편소설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문학수첩)을 포함해 세 귄이 된다. 이런 부지런한 저자를 친구로 둔 덕에 나는 지난 주말 한 모임의 뒷풀이 자리에서 저자로부터 사인된 책을 건네받을 수 있었다. 시, 소설, 비평, 연구 가운데 가장 하고 싶은 게 뭐냐는 우문에 그는 '시'라고 답했다. 그는 내 기억에 언젠가 현대시 동인상을 받은 '유력한' 시인이기도 하다.
이번에 나온 책은 '이장욱의 현대시 읽기'란 부제를 달고 있으니 '시인의 시읽기'인 셈인데, 저자에 따르면 비평적이라기보다는 에세이적인 글들을 모아놓은 것이다(책은 요즘의 추세와는 다르게 단 한 개의 각주도 달고 있지 않다). 나는 몇 편의 글을 잡지나 시집 해설 등에서 읽어본 적이 있는데, 한데 모아놓으니까 보기에 즐겁다(제목과는 달리 결코 우울하지 않다!). 책에 대한 리뷰는 다른 자리를 마련해야겠지만(김춘수의 시 한편을 다룬 '구름과 장미의 나날들'에 대한 글이 가장 먼저 씌어질 듯하다) 얼핏 받은 인상은 그의 비평 혹은 에세이들이 매우 몽타주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라는 지시 형용사나 '이것'이라는 지시대명사를 아주 자주 사용한다. 그걸 종합하여 말하자면, 그의 글들은 산책자 혹은 여행자의 즉물적인 인상들의 기록처럼 읽힌다. 그 인상들이 개념어들을 통해 반추될 경우에도 그 과정은 산책자/여행자의 보폭과 리듬을 유지한다. 그는 멀리 지나가면서 지금 여기에 있는 시와 시구들을 말하고 있는 것(책갈피에는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에서 찍은 저자의 스냅사진이 실려 있다). 그게 내가 받은 인상이다.
시인 이장욱만큼 다재다능한 시인이자 비평가 권혁웅 교수가 '신화에 숨은 열여섯 가지 사랑의 코드'란 부제를 단 신간 <태초에 사랑이 있었다>(문학동네)를 출간했다(친구의 말에 따르면, 이 책은 권혁웅의 가장 좋은 책이다). 지난번에 낸 비평집 <미래파>를 내가 아직 다 읽어보기도 전의 일이다(내가 읽는 속도보다도 더 빨리 책을 써내는 이들이 나는 싫다!). 비평가 이장욱이 '다른 서정'이라고 부르는 최근 시의 경향들에 대한 비평가 권혁웅의 호칭이 '미래파'이다. 그런데, 거기에 이어지는 책은 '태초에'라니!
저자에 따르면, "내가 이 책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점이 바로 이것이다 : 모든 신화는 사랑이다. 한 사람의 꿈을 움직이는 힘, 한 편의 시를 추동하는 힘도 그렇다. 이것은 사랑의 산화가 아니라 신화의 사랑에 관한 책이다. 신화에 숨은 몸의 논리를 분석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이 책을 신화에 관한 정신분석이라 간주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신간은 '정신분석서'로 분류되어야 하겠다. 서동욱 교수의 책과 같이 나란히 서재에 꽂아놓으면 '일상과 신화'라는 그럴 듯한 풍경이 완성될 듯하다. 정신분석이란 말이 나온 김에 참고로 지적하자면, 크리스테바의 <사랑의 정신분석>(민음사, 1999)의 원제가 'Au Commencement E'tait L'amour', 즉 '태초에 사랑이 있었다'이다. 신간의 제목을 거기서 빌어왔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마지막 다섯번째 책은 강유원의 서평집 <주제>(뿌리와 이파리)이다. 소개에 따르면, "'회사원 철학박사'로 잘 알려진 강유원이 그간 써온 서평들을 여섯 주제로 묶어 펴낸, 본격적인 주제서평집이다. 저자의 세 번째 서평집이기도 한 이 책은 다른 일반 서평집들과 달리 단순한 서평에서 그치지 않고, '어떤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길 안내에 특히 중점을 둔 서평집이다."
데뷔 서평집인 <책>(야간비행, 2003) 이후 이제 2년 남짓 가량 되었지만, 저자는 한국사회에서 가장 유명한 지식인 혹은 '교양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니 그에 대한 군더더기의 말은 불필요하겠다. 한데, 이번에 나온 <주제>가 세번째 서평집이라면, 두번재 서평집은 <책과 세계>인가(아니면 <몸으로 하는 공부>)? 사정을 정확히는 모르겠다. 분명히 내 돈 주고 산 책인 <책>이 어디에 박혀 있는지 러시아에 다녀온 이후로 보지 못한지라 나는 <책과 세계>(살림, 2004)에 대한 몇 마디 적어본 전력만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주제> 또한 읽을 만할 거라고 짐작한다(몇몇 글들은 그의 블로그 등에서 읽은 듯하다).
다시 소개의 글을 옮기자면, "저자가 생각하는 진정한 교양이란 '앎과 삶의 일치'에 있다. 사회적인 맥락 속에서 진리로 간주되는 앎을 배우고, 그것을 자신의 삶에서 끊임없이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태도야말로 진정한 교양인의 자세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쓴 주제서평의 '주제'는 '지금, 여기'에 있는 구체적인 우리의 삶을 천착하고 있다." 즉, 그의 저작 혹은 작업이 지향하는 바는 '진정한 교양인' 되기이며 그 권고이다.
'앎과 삶의 일치'라고 했지만, 그건 다른 말로 앎(머리)과 몸의 일치이기도 하겠다. '몸으로 하는 공부'가 뜻하는 바가 그게 아닐까? 이때 '몸'은 추상적인 몸이 아니다. 그가 '근육질적인' 문체를 갖고 있다고 언젠가 적었지만, 그의 사유를 담고 있는 문장들은 잘 단련된 바디빌더의 몸을 연상시킨다. 주로 뼈와 물렁살로 이루어진 나와는 다른 차원의 글이고 몸인 것. 한데 이로써 형성되는 '교양인의 자세'는 김규항의 'B급 좌파적 자세'이면서 동시에 영화 <공공의 적>에서 뱃살 늘어진 형사 설경구가 아닌 근육질의 냉혈한 이성재를 더 닮은 자세이기도 하다. 그 또한 자본주의의 "사회적인 맥락 속에서 진리로 간주되는 앎(=Money talks!)을 배우고, 그것을 자신의 삶에서 끊임없이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태도"를 철저하게 견지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오류적' 앎이고 진리라면, 그와의 차별화를 위해서 당연히 요청되어야 하는 것은 '절대적인' 진리이다. 결단코 타협 따위를 허용하지 않는. 그게 근육질의 교양이며 혁명적 교양이다(강유원의 글쓰기가 고압적인 태도를 동반하는 것은 그러한 '교양'을 체화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비록 강유원의 서평들에 눈길을 주기도 하지만 바탕이 물렁한 데다 평소 운동과 인연이 없는 나로선 그냥 <말랑말랑한 힘>과 <물렁물렁한 책>들에 더 애정을 느낀다. 그리고 말랑말랑한 빵들을 나는 좋아한다. 언젠가는 그 '말랑말랑한 빵에게' 바치는 시도 썼으니 이런 식이다.
말랑말랑한 빵은 살짝 구워진다.
말랑말랑한 빵은 살짝 구워진다. 바짝 구워지면 빵은 딱딱해진다. 그건 딱딱한 빵이다.
말랑말랑한 빵은 살짝 구워진다. 바짝 구워지면 빵은 딱딱해진다. 그건 딱딱한 빵이다.
그건 말랑말랑한 빵과는 다른 빵이다. 정말 다른 빵이다. 먹어보면 안다.
그것이 말랑말랑한 빵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살짝, 그렇다, 살짝 구워진다는 것!
그것이 말랑말랑한 빵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비밀은 부드럽게 혀끝에서 녹는다, 살살 녹아난다. 비밀은 사랑스럽다.
우리는 공공장소에서도 빵을 먹는다, 말랑말랑한. 세상은
이 오랜 관습의 사원이며 존재의 빵집이다.
여기저기서 주무르고 달군다. 더러는 태우기도 한다.
말랑말랑한 빵의 힘든 여정, 말랑말랑한 형이상학과 말랑말랑한 세계평화가
여기저기서 반죽되고 구워진다. 밤낮이 없다.
살짝, 그렇다, 살짝 미쳐간다는 것!
그것이 또한 말랑말랑한 빵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마침내 말랑말랑한 빵이 구워졌다. 정말인가는 먹어보면 안다.
내가 아직까지 믿는 것은 '말랑말랑한 빵의 힘든 여정'이다. 가령 티베트의 수도이자 라마교의 성지 라싸의 사원을 향해서 오체투지(五體投地)하며, 그러니까 몸의 다섯부분(五體) 즉 이마, 오른쪽 팔꿈치, 왼쪽 팔꿈치, 오른쪽 무릎, 왼쪽 무릎이 땅에 닿도록 절을 하며, 수 개월에서 몇 년이 걸리는 여정을, 하지만 환하고 행복한 표정으로 감내하며 걸어가던/던져가던 티베트 어린아이들의 발걸음 같은 것 말이다. '앎과 삶의 일치'라고 하지만, 삶은 앎의 극한이다. 앎은 삶의 궁극적인 모순에 가닿기엔 너무 체계적이고 논리적이기 때문이다(하지만 비논리적이고 비체계적인 것을 앎이라고 할 수도 없지 않은가?). 해서, '진정한 교양인의 자세'는 이래저래 멀고도 멀다. 강유원의 길이든, 티베트 아이들의 길이든 말이다. 그저 오늘도 읽고 또 읽을 따름이다...
05. 12. 20.
P.S. 올해의 마지막, 더불어 최악의 스캔들은 물론 현재 진행중인 '황우석 스캔들'이다. 조만간 그가 과욕을 부린 국민 과학자였는지 희대의 사기꾼이었는지는 밝혀질 것이다. 그러한 일련의 사태 때문에 눈길을 끄는 책이 있다면, 단연 <골렘>(새물결)이다. 원제는 'The Golem: What You Should Know about Science'(1993), 그러니까 '과학에 대하여 당신이 알아야만 하는 것'. 소개에 따르면, "골렘은 유대 전설에 나오는 괴물로, 온순하고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언제라도 미쳐 날뛸 수 있는 존재이다. 저자들은 과학은 골렘 같은 것이라고 말하며, 흥미진진한 일련의 사례들을 통해 이런 구축 - 관측과 실험 - 이론의 확증이라는 전통적인 과학상의 허구를 낱낱이 파헤친다."
보다 구체적으로 "책은 과학적 연구 결과의 수용과 검증을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졌던 7가지 사례들을 자세히 분석하고 있다. 사례 중에는 상대성 이론 검증 실험 같은 유명한 연구에서부터, 상온 핵융합처럼 신문의 과학면에서 봤음직한 연구 등 다양한 사례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를 통해 과학의 '뒷골목'에서 과연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흥미진진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인문학의 '지적 사기'를 크게 떠들어댄 과학자도 있었지만, 돌이켜보건대 인문학의 사기는 '과학적 사기'에 비할 바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이래저래 인문학은 과학에 미달이다. 모자란 것들 같으니라구!..
P.S.2. 내친 김에 개인적으로 꼽은 2005년의 책 다섯 권을 골라둔다. 기준은 기억해 둘 만한 책들 가운데 내가 갖고 있는 책으로 읽었거나 읽고 있는 중인 책으로 한정했다. 도정일, 최재천 교수의 <대담>, 가라티니 고진의 <트랜스크리틱>은 최근에 내가 '지지'를 표명했던 책들이다. 김윤식 교수의 <내가 살아온 20세기 문학과 사상>이나 프랑수아 도스의 <폴 리쾨르>는 내가 좋아하는 '생애전'들이다. 두 사람의 생애는 각각 문학과 철학으로 변형되었다. 문학으로서의 삶, 철학으로서의 삶. 한 해를 마무리하며 그걸 새삼 한번 더 기억해두고자 한다. 그리고 루소의 자전적 <고백>. 물론 한번 언급한 바 있듯이 복간본 번역이다. 많은 고전들이 올해 번역돼 나왔지만 지금 가장 먼저 머리속에 떠오르는 건 이 <고백>이다. (어줍잖은) '픽션'에 대한 선호가 점점 줄어드는 걸 보면(하물며 판타지라니요!) 확실히 늙어가는 모양이다(곧 가속도가 붙을지도 모르겠다). 당신도 그런가?..
P.S.3. 거기까지 쓰고 집에 가는 길에 <트랜스크리틱>의 서문을 읽었는데, 부실한 교정이 눈에 띄어 적어둔다. 역시나 생몰연대에 관한 것. 16쪽에서 아나키스트 프루동의 생몰연대가 '1908-65'로 돼 있는데, '1809-65'의 오타이다. 오타야 흔하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왜 체크가 되지 않은 것인지? 그리고 19쪽에서 프랑스 철학자 리오타르의 생몰연대가 '1924- '라고만 돼 있는데, 그는 이미 지난 1998년에 세상을 떠났다(일어본에 오기돼 있는 걸까?). 좋은 번역은 좋은 교정을 수반할 때 더욱 빛이 난다. 좀 아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