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perturbation > 이라크, 알려지지 않은 알려진 것들
이라크: 빌려온 항아리 슬로베니아 학파 총서 3
슬라보예 지젝 지음, 박대진.박제철.이성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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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3월에 럼스펠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1) "알려진 알려진 것들"이 있다. 이는 우리가 알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들이다. (2) "알려진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알지 못함을 알고 있는 것들이 있다. (3) 하지만 "알려지지 않은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 있다. 즉 알지 못함을 알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19쪽)

 

위에서 럼스펠드는 이라크가 미국에 위협이 되고 있는 까닭을 어떻게든 설명해 내기 위해서 말의 곡예까지를 불사하고 있다. 그는, 이라크와의 대결에서 주요한 위험은 (3)이라고, 즉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감지조차 못하고 있는(즉, 우리가 일지 못하고 있다는 그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있는) 사담 후세인으로부터의 위협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철학자 흉내를 내보려 했던 럼스펠드는 그러나 하나를 빠뜨리고 말았는데, 지젝이 그것을 놓칠 리 없다. "우리가 잊지 말고 덧붙여야 하는 것은 결정적인 네번째 항목이다. (4) "알려지지 않은 알려진 것들 unknown knowns""(19쪽)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데, 다만 우리가 알고 있다는 그 사실을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인 것들이 있다. 그것이 바로 "알려지지 않은 알려진 것들"이다. 물론 이것은 바로 프로이트적의 의미에서의 "무의식"의 정의와 일치한다. 라캉이 "그 자신을 알지 못하는 앎"이라고 절묘하게 정의한 그 무의식 말이다.

 

이 책에서 지젝은 이라크 전쟁에 관해 "알려지지 않은 알려진 것들", 즉 이라크 전쟁의 무의식을 분석한다. 우리에게 소개된 지젝은 주로 정신분석이론가로서의 지젝, 그것도 주로 영화를 통해 정신분석을 재기넘치게 설명하는 이론가로서의 지젝이다. 번역되어 있는 책들 중에서 읽히는 번역들은 대다수가 (영화를 자주 거론하는) 초기 저작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슬라보예 지젝'의 반쪽일 뿐이다. 이 책에서 '지젝'의 정신분석과 '슬라보예'의 정치비평은 비로소 행복하게 만난다. 물론 둘의 만남이 이번이 처음인 것은 아니다. 그에겐 이미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Verso, 2002) 를 위시한 정치적인 저작들이 있다. 그러나 그 책은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인간사랑)라는 고풍스런 제목 하에 '사막'의 모래같은 문장들로 번역된 뒤, '환대'가 아니라 '박대'받았다. "믿음에 대하여"(동문선)의 번역 상태가 우리의 혹시나 하는 '믿음'을 저버린 지 얼마되지 않은 때의 일이었다. 

 

아마도 이 책은 지젝의 정치적인 저작 중에서 김포공항을 무사히 통과한, 즉 우리말로 유려하게 읽히는 첫번째 책으로 기록될 것이다(역자들에게 감사를!). 이 책의 본론 역할을 하는 것은 1장이며, 지젝은 1장을 "미국의 이라크 공격에 관해 펼쳐지는 이야기에 대한 저자의 직접적인 인상들과 반응들의 잡동사니"라고 말하고 있는데, 물론 여기서 '잡동사니'란 탁월한 통찰력(이 책의 부제가 '빌려온 항아리'인 이유를 알게 되는 순간 당신은 그 비유를 곧장 어딘가에든 써먹고 싶어질 것이다), 거침없는 분석(이라크에서 출발하여, 프로이트와 체스터튼을 거치고, 바디우와 베르그송을 통과하여 다시 이라크로),  지젝 특유의 지적인 상쾌함을 동반하는 유머(지젝에 따르면, 2003년 12월 후세인이 체포되었을 때 의료진들이 그의 입 속을 들여다본 것은 대량살상무기를 찾기 위해서다!)를 통칭하는 용어에 불과하다.  

 

설사 당신이 정신분석에 관한 배경지식이 별로 없다 할지라도, 적어도 '잡동사니' 1장을 읽는 데에는 별다른 곤란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물론 이 1장 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다. 지젝의 애독자로서, 기쁜 마음으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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