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정조에게 경영을 묻다 - 분노와 콤플렉스를 리더십으로 승화시킨 정조
김용관 지음 / 오늘의책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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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2년 윤05월 21일
아버지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아들을 뒤주 속에 가둬 굶겨 죽입니다. 역사서는 아버지가 자식을 죽인 이유를 자식의 어미가 아버지에게 '자식이 군사를 동원해 아버지를 위해하려 한다'고 고해 바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공통적으로는 사도세자의 정신병과 노론을 배척하고 소론 정권을 세우려는 것에 반기를 든 노론의 주도면밀한 음모로 인해 생긴 참화라고 합니다. 1762년 윤5월은 양력으로는 7월이었습니다.

   기구한 운명 속에서 자라난 정조는 평생을 반대 세력들과 힘겨루기를 하며 국가를 통치하였습니다. 저자는 정조가 죄인으로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인 콤플렉스를 드러내어 오히려 이를 긍정적인 에너지로 변화시킨 점을 높이 평가합니다. 정조는 이러한 에너지를 바탕으로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펼쳤고, 탕평책을 실시하였으며,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는 세력들과는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저자는 정조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영조를 의도적으로 비하합니다. 자신의 주장을 설득하기 위해 필요한 부분만을 이용하는 것은 사실의 왜곡입니다. 저자에 따르면, 영조도 자신의 어머니 숙빈 최씨가 무수리 출신이었다는 컴플렉스를 평생 가지고 살아가지만,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컴플렉스를 긍정적으로 승화시키지 못하였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영조도 꾸준히 탕평책을 실시하며 인재를 고르게 쓰고자 노력하였고, 백성들의 세금의 어려움을 도와주기 위해 균역법을 시행하였으며, 백성들의 사정을 들어보기 위해 궁밖으로 나가는 궁성도 50여차례나 하는 등 그의 치적도 작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기업을 꾸려나가는 최고 경영자들이 정조로부터 배워야 할 경영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정조의 리더십을 참고할 만합니다만, 리더십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부하직원과의 의사 소통을 하는 방법에 있어서 정조가 신하들과 소통한 방법을 참고할만 한 것이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어 보입니다. 어쩌면, 정조의 리더십 전체에 대해 오늘날에도 효력이 있느냐는 의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그는 편지를 통해 막후 정치를 펼칩니다. 저자도 이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다만, 저자는 정조가 이렇게 행동하게된 배경에 대해 더 신경을 씁니다. 즉, 확실한 자신의 세력이 없는 상황에서 거대한 노론과 싸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를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면 현재 기업의 최고 경영자들의 입장이 정조과는 달리 자신의 지지 세력이 든든하다면 정조의 리더십이 맞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흔히 정조와 세종을 비교합니다. 두 임금 모두 학식이 높고, 개혁을 하려는 의지가 남달랐기 때문입니다. 다만, 세종의 시대와 정조의 시대가 달라 두 사람이 발휘하는 리더십이 다르다는 데 주목하게 됩니다.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 하지만, 번번이 이를 막아서는 반대 세력을 어떻게 극복하여야 할까요? 회사의 최고 경영자도 국가의 최고 경영자도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숙제입니다.

   두 위대한 임금을 비교한 성균관대 국가경영전략연구소 함규진 박사의 글을 빌어 리더십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며 이 글을 마칩니다. 물론 함규진 박사의 글이 정답은 아닙니다.

   
  “세종은 불협화음과 마주쳤을 때 조직의 개방도를 높이고 여러 목소리를 함께 아우름으로써 화음을 이루려 했다. 반면 정조는 자신만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오직 그의 목소리에만 공명하는 새로운 조직을 건설하려 했다. 하지만 성과는 세종보다 처졌던 것 같다. 기존 체제가 공고하게 유지된 상황에서 정조 개인의 카리스마와 특권에 힘입은 신진세력들이 쉽게 힘을 내기란 어려웠다. 노골적인 측근정치는 불평과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초계문신 중 일부가 가졌던 ‘이념적 과격성’, 즉 서학(西學)을 익힌다는 사실이 정치 문제로 부각되면서 신진세력들은 기를 펴지 못했다. 
 
정조는 이런 상황에서 신하들의 문체가 경박하다, 도리에 어긋난다는 의 문제를 들춰내 기를 꺾었다. 또 숨가쁠 정도로 자리를 바꾸는 인사정책을 써서 신하들의 결집을 막으려 했다. 이조판서는 고작 2개월, 대사헌은 보름을 버틸까 말까 하는 정신 없는 인사이동이었다. 정조 자신만 말을 하고 조직의 다양한 목소리를 막아버리는 방법을 쓸수록, 보이지 않는 뒷자리에서의 공론은 더 크고 심각해졌다. 

개인적인 능력 면에서는 세종보다 오히려 앞섰던 정조는 재위기간 동안 많은 업적을 이루었으나, 그것은 대부분 정조 혼자 힘으로 이루다시피 한 것들이었다. 세종처럼 여러 사람의 재주와 생각을 모아 이뤄낸 것은 적었다. 그래서인지 세종에 비해 근본적으로 혁신적인 업적도 많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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