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한 번 더 겨울을 난다는 것은 죽음을 뜻했다. - P8

남자가 아는 것이라고는 아이가 자신의 근거라는 것뿐이었다. 남자가 말했다. 저 아이가 신의 말씀이 아니라면 신은 한 번도 말을 한 적이 없는 거야. - P9

이윽고 그들은 암회색 빛 속에서 아스팔트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발을 질질 끌며 재를 헤치고 나아갔다. 서로가 세상의 전부였다. - P10

우린 죽나요?
언젠가는 죽지. 지금은 아니지만. - P15

네가 머릿속에 집어넣은 것들은 거기 영원히 남는다는 걸 잊지 마. 한번 생각해보렴. 남자가 말했다.
어떤 건 잊어먹지 않나요?
그래. 기억하고 싶은 건 잊고 잊어버리고 싶은 건 기억하지. - P17

암흑은 어떤 것도 보여주지 않았다. 귀를 기울이면 귀가 아플 암흑이었다. - P2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제는 밤에 잠도 잘 잤고, 꿈에 기차를 자주 보았다. 특히 자주 나오는 기차가 있었는데, 그는 석탄 연기 냄새를 맡으며 그 기차에 타고 있었다. 세상이 휙휙 지나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는 그 세상 속에 서 있고, 기차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 P79

글래디스는 이 모든 것을 보았다. 그리고 이제 그에게도 말해주었다. 그녀는 죽음 때문에 미래를 잃었고, 산 자들에게 아이를 잃었다. 케이트는 불길을 피해 도망쳤다. - P82

그가 왜 찾아가기도 힘든 그 오두막으로 자꾸만 가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아마 한두 명쯤 있었겠지만, 그레이니어는 단 한번도 말해주지 않았다. 거기에 머무르기로 서약했기 때문이라는 진실을. 그는 숲이 불탄 뒤 십 년쯤 지났을 때 일어난 모종의 일에 놀란 나머지 그런 서약을 하게 되었다. - P102

짐승들의 합창은 보름달이 뜬 밤에 가장 화려해지는 것 같았다. 가장 광란의 소리 같기도 했다. 무엇보다 비루했다. - P103

틀림없이 산꼭대기와 능선에서 모이강을 내려다보는 동물 중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녀석들이 한 마리도 빠지지 않고 울어대는 것 같았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이 짐승들을 그 무엇도 달랠 수 없다는 듯이. 그레이니어는 감히 잠을 자지 못했다. 이 모든 것이 엄청난 징조 같아서였다. 어쩌면 세상의 종말을 알리는 경보일 수도 있었다. - P103

그가 더 가까이 다가가는데도 아이는 굳은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알아본 기색 같은 것이 저절로 나타나서 이 아이가 케이트임을 증명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아이의 눈에는 오로지 두려움뿐이었다. 늑대의 눈처럼. 그래도. 그래도. 케이트였지만, 이제 케이트가 아니었다. 이제 케이트가 아닌 아이가 모로 누워 있었다. 옆으로 구부러진 왼쪽 다리의 무릎 아래에 부서진 뼈가 피투성이가 되어 튀어나와 있었다. 세 발로 기어다니다가 완전히 지쳐서 부서진 다리를 질질 끌고 온 아이일 뿐이었다. 그는 가끔 아기 케이트의 머리카락이 어떤 모양인지, 아이가 그대로 살았다면 어떤 모습이 되었을지 궁금했다. 하지만 아이는 거의 대머리였다. 듬성듬성 몇 군데에만 머리카락이 있을 뿐이었다. - P106

아이는 숨이 반만 붙어 있는 상태로 잠들어 있었다. 그는 한참동안 아이를 지켜보았다. 노인처럼 피부가 쪼글쪼글했다. 손은 아래로 구부러지고, 손목 등 쪽에는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발은 나무의 마디처럼 단단하고 울퉁불퉁했다. 잠들어 있는데도 왜 얼굴이 늑대처럼, 짐승처럼 보이는 걸까? 그는 답을 알 수 없었다. 눈을 감고 있는 얼굴에는 생기가 하나도 없어 보였다. 이 생물의 머릿속에는 눈에 보이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 P108

저쪽 세컨드 스트리트에서 감리교 신자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보너스 읍내에서 다른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레이니어는 아직 드물게 예배에 참석했다. 마침 예배가 있는 시간에 읍내에 나왔을 때. 교회에서 사람들은 그에게 상냥하게 말을 걸어주었다. 글래디스와 함께 거의 매주 예배에 나오던 시절의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는 대체로 교회에 간 것을 후회하는 편이었다. 교회에서 그는 자주 울었다. 모이 계곡에서 살 때는 자잘하게 할 일이 워낙 많아서 다른 데 신경을 쓸 틈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삶이 슬프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그러다 찬송가가 시작되면 기억이 났다. - P111

그레이니어는 여든 살이 넘어서 1960년대까지 살았다. 살아있는 동안 태평양에서 수십 마일 떨어진 서부까지 여행한 적도 있지만, 바다를 직접 본 적은 없었다. 동쪽으로 가장 멀리 간 곳은 몬태나주 경계선 안쪽으로 40마일 거리인 리비였다. 그가 사랑한 사람은 한 명(아내 글래디스)이었으며, 재산은 땅 1에이커, 말 두 마리, 수레 한 대였다. 그는 술에 취한 적이 없고, 총기를 구매한 적도 없고, 전화기로 대화를 나눈 적도 없었다. 기차를 자주 탔지만 자동차도 많이 탔고 비행기도 한 번 타본 적이 있었다. 말년의 십 년 동안 그는 읍내에 나올 때마다 텔레비전을 보았다. 그는 자신의 부모가 누구인지 전혀 몰랐으며, 자손을 남기지도 않았다. - P119

그 지역의 거의 모든 사람이 로버트 그레이니어를 알았지만,1968년 11월 언제쯤에 잠을 자다 숨을 거둔 그가 가을과 겨울내내 오두막에 혼자 누워 있었어도 그를 궁금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봄에 등산객 두 명이 우연히 그의 시신을 발견하고는, 다음날 의사를 데리고 왔다. 의사는 사망증명서를 작성한 뒤 두 등산객과 함께 오두막에 기대어져 있던 삽으로 땅을 파서 마당에 무덤을 만들었다. 로버트 그레이니어는 지금도 그곳에 잠들어있다. - P11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러나 막힌 담이 높을수록 담을 뚫고 나가려는 파도의 압력은 강해지는 법이다. - P110

수호천사처럼 모든 천재의 길을 함께 하는 신비스런 본능은 그로 하여금, 자기 내부에 들어 있는 힘이 안내와 지도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이해와 사랑의 손길, 긴장을 풀어주고 느슨하게 만들어줄 손길, 그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그의 거친 내면을 섬세하게 만들어주고 매끄럽게 해줄 손길을 말이다. 그를 격려하면서도 동시에 그에게 잘못을 지적해주는. 그러나 비판적 악의에 가득 찬 방법이 아니라 함께 만들어가면서 도와주는, 그의 생각을 함께 생각하려고 애쓰고 그의 과도한 꿈들을 어리석음이라고 비웃지 않는 그런 사람이어야 했다 - P114

그는 얼마나 새롭고 다른 분위기로 들어선 것인가! 그녀와의 교제는 자기 시대 다른 누구보다도 사람과 시대를 하나의 맥락으로 보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던 이 젊은이에게 역사를 가장 생생한 현재로 느끼고 체험하도록 가르쳐주었다. - P116

발자크는 가족에게서 벗어난 것이다. 그는 자신의 고약한 어린 시절을 병처럼 극복해버렸다. 그가 치유된 것을, 자신의 힘에 대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을 볼 수 있다. - P123

그러나 한 번 더 어머니는 겉보기에 고분고분하고 향락적인 성향을 가진 이 젊은이에게 있는 굽히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의지를 자기가 얼마나 얕잡아보았는지를 깨달아야 했다. 이 정열은 그를 ‘망치기‘는커녕 이 불안한 청년이 자기 자신을 찾는 데 도움이 되었다. - P124

그녀는 내게 어머니, 여자친구, 가족, 동반자. 충고자였다. 그녀는 나를 작가로 만들었고, 젊은 나를 위로해주었으며, 내게 취향을 마련해주었고, 누이처럼 함께 울고 웃었다. 그녀는 언제나 고통을 진정시켜주는 선량한 꿈처럼 나타났다……. 그녀가 없었다면 나는 분명히 죽었을 것이다. - P124

그녀는 거대한 폭풍 속에 들어 있는 나를 격려로써, 그리고 헌신적인 행동으로 붙잡아주었다. 그녀는 한 남자를 온갖 비천함에서 지켜주는 자부심을 내게 일깨워주었다. 내가 살아 있는 한 이 점에 대해서 그녀에게 감사한다. 그녀는 내게 있어 모든 것이었다. - P125

‘경험의 충고자‘를 통해서 발자크는 비로소 진정한 발자크가 되었다. - P12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917년 여름 로버트 그레이니어는 아이다호 팬핸들에서 스포케인 국제철도회사 상점의 물건을 훔치다가 잡힌. 그러니까 어쨌든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혐의를 받는 중국인 노동자를 죽이려는 사람들 무리에 가담했다. - P7

"그냥 재미로 시작한 건데. 재미로." 흙바닥에 앉은 남자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동료들을 향해 말을 이었다. "어이, 젤 투미스, 이제 그만하지." - P9

점점 짙어지는 어둠 속에서 집으로 걸어가던 그레이니어는 사방에 그 중국인이 있는 것 같았다. 길에 서 있는 중국인. 숲속의 중국인. 양팔을 밧줄처럼 늘어뜨린 채 천천히 걷고 있는 중국인. 개울에서 거미처럼 사사삭 기어나오는 중국인. - P11

어둠 속에서 딸이 궁지에 몰린 짐승 같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괜한 상상일 뿐이었지만,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레이니어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이불을 목까지 끌어당겼다.
로버트 그레이니어는 그뒤로 평생 동안 이날 밤의 그 순간을 잊지 못했다. - P14

그레이니어가 맡은 일은 밧줄 담당이었다. 기차 도착점 쪽이 아니라 숲 쪽에서 숲에서 벌목꾼들이 둘씩 짝을 지어 톱으로 가문비나무를 쓰러뜨리면, 가지 담당이 도끼로 잔가지를 깨끗하게 쳐내고, 톱장이가 통나무를 18피트 길이로 잘랐다. 그다음에는 밧줄 담당이 통나무를 밧줄로 감아 말이 운반할 수 있게 준비했다. 그레이니어는 이 일이 좋았다. 불끈불끈 힘을 쓰고 나면 탈진해서 도취한 것 같은 상태가 되고, 그렇게 하루 일을 끝낸 뒤에는 푹 쉬었다. 숲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규모가 웅장한 것도, 멀고 외딴 곳에 있는 것 같은 느낌도, 이렇게 많은 나무들이 감시병처럼 서 있으니 어떤 위험도 자신을 찾아오지 못할 것 같다는 감각도 좋았다. - P18

나무가 우리를 친구로 대해주는 건 우리가 건드리지 않을 때뿐이야. 톱날이 파고들어간 다음부터는 전쟁이 벌어지는 거라고. - P19

안 피플스는 가만히 서 있는 나무가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말했지만, 그에게 죽음을 내려보낸 것은 바로 그런 나무였다. - P23

성경책도 보이지 않았다. 주님이 자신의 말씀이 기록된 책조차 지키지 못했다면, 그레이니어가 보기에 그것은 이곳을 찾아온 불길이 하느님보다 더 강했다는 증거였다. - P5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에게 있어 모든 것은 자기 의지의 탁월한 형성능력에 종속되었다. 특징적인 일이지만 자신의 삶의 에피소드들을 이렇게 멋대로 변형시키는 능력은 시민적 존재의 - 보통은 변화되지 않는-기본사항,즉 그의 이름에서 드러난다. - P19

후세의 온갖 보고에도 불구하고 문학은 여전히 역사보다 위에 있다. - P21

아버지 발자크가 이토록 인기가 있었던 것은 모든 면에서 이해가 가는 일이다. 그는 자신과 자신의 성공과, 온 세상에 대해서 만족스럽게 생각하는 명랑하고 실질적이고 쾌활한사내였다. 그의 언어는 귀족적인 억양을 가지지 않았고, 그 - P26

열두 살짜리, 열세 살짜리가 살았던 이 다른 세계는 바로 책들이었다. - P40

그 책들은 발자크에게 하나의 구원이었으며, 그 책들은 학창 시절의 모든 고통과 굴욕을 아무렇지도 않게 만들었다. - P40

스무 살짜리는 자기가 무엇이고 앞으로 무엇이 되려는지 아직 분명한 생각이 없었다. 철학자인지. 시인인지, 소설가인지, 극작가인지, 아니면 학자인지. 어디를 향할지 모른 채 다만 힘만을 느끼고 있었다. - P64

나는 내 안에 표현할 생각. 지어올려야 할 체계, 표명해야 할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을 느꼈다. - P64

근사한 공식적 직함보다 시민계급 사람들이 더 존경하는 것은 없다. 국가가 교수로 임명한 사람이고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강의하는 사람이라면 잘못을 저지를 리가 없다. - P78

쳇바퀴 도는 것, 영원히 같은 일을 되풀이하는 그런 것을 가리켜 사람들은 삶이라고 부른다. - P79

삶에서 수백 번이나 실망한 다음에도 언제나 그랬듯이, 굽히지 않고 가족의 질곡에서 ‘독립‘ 하겠다고 전보다 오히려 더욱 굳게 결심하고서 그는 자발적으로 선택한 레디기예르 거리의 감방으로 돌아갔다. - P80

자신 안에서 힘을 느끼는 사람은 강한 충격을 견딜 수 있는 법이다. - P81

동화에서는 언제나 출구 없이 절망적인 순간에 유혹자가 절망한 사람에게 다가와서 그의 영혼을 사려고 한다. - P85

아무도 그의 재능에 주목하지 않았으며, 그 자신이 자기의 재능을 가장 많이 무시하였다. - P10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