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자욱했는데, 아무도 말을 믿지 않았다. - P55
그는 말을 내질러서 글에 머뭇거림이 없었다. - P58
사내들의 말은 가깝고 다급했지만, 말 끝난 자리의 허허로움을 다들 알고 있었다. - P59
아이의 이를 들여다보면서 안중근은 빛을 떠올렸다. 그 빛은 빌렘에게 세례를 받던 때 멀리서 다가오던 빛과 같았다. 빛이 아이의 분홍빛 잇몸 속에서 젖니를 밀어올리고 있었다. 빛은 분명해서 빛을 증거하는 일은 쉬웠다. - P61
세습으로 태어나 뒷짐지고 거들먹거리는 유생들이나 송곳 꽂을 땅도 없는 무지렁이들이나 죄의 규모는 차이가 있었지만 죄의 내용과 죄의 계통은 대체로 비슷해서 인간의 죄는 몇 개의 유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하되 어떠한 유형에도 속하지 않는 내밀한 죄들을 다들 깊이 지니고 있을 터인데, 그 죄는 마음에 사무치고 몸에 인 박여서 인간은 결코 자신의 죄를 온전히 성찰하거나 고백할 수 없을 것임을 빌렘은 알고 있었다. 그런 생각이 떠올라서, 빌렘은 고해성사를 베풀 때마다 하느님께 민망했다. 죄인과 하느님 사이에서 사제의 자리는 늘 거북했다. 빌렘은 고백받지 못한 죄까지를 합쳐서 하느님께 고하고 용서를 빌었다. - P63
·도마야, 악으로 악을 무찌른 자리에는 악이 남는다. 이 말이 너무 어려우냐? 네가 스스로 알게 될 때는 이미 너무 늦을 터이므로 나는 그것을 염려한다. - P66
짐이 내리는 시간이다. 라고 메이지가 이은에게 말할 때, 이토는 그 말의 크기를 어린 이은이 감당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짧게, 간단히 말하는 미카도의 위엄에 숨이 막혔다. - P14
메이지는 말과 말 사이에 적막의 공간을 설정했다. - P14
동양과 서양, 대양과 대양을 연결하는 이 문명사적인 항구의 옛 등대를 이토는 거룩히 여겼다. 그것은 이 세상 전체를 기호로 연결해서 재편성하는 힘의 핵심부였다. 신호로써 함대를 움직이고 신호로써 대양을 건너가는 기술은 바로 제국이 갖추어야 할 힘의 본질이라고 이토는 늘 생각하고 있었다. - P16
이토는 조선 사대부들의 자결이 아닌 무지렁이 백성들의 저항에 경악했다. 왕권이 이미 무너지고 사대부들이 국권을 넘겼는데도, 조선의 면면촌촌에서 백성들은 일어서고 또 일어섰다. - P18
상해에 돈을 가진 자들은 더러 있었으나 뜻을 가진 자는 없었다. - P24
아버지가 죽자 아들이 태어나는 질서는 삶과 죽음이 잇달음으로 해서 기쁘거나 슬프지 않았고, 감당할 만했다. 모든 죽음과 모든 태어남이 현재의 시간 안에 맞물려 있었다. - P26
아이가 젖을 자주 토해서, 김아려의 몸에서 젖 삭은 냄새가 났다. 아이의 몸과 어미의 몸이 섞인 냄새였다. 냄새는 깊고 아득했다. 안중근은 그 냄새에서 출처를 알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그 슬픔은 한 생명의 아비가 되고 어미가 되는 일의 근본인 것 같았다. - P27
길에서 빌렘은 사람들과 말을 섞지는 않았지만 마주치는 사람들의 표정과 체취를 자신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넣었다. 그렇게 각인함으로써 빌렘은 사람들에게 건너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 P29
오래전에 세례를 받던 때의 기쁨은 때때로 안중근의 마음속에서 솟구쳐올랐다. 그때, 멀리서 빛이 다가왔고 안중근은 밝아오는 영혼의 새벽을 느꼈다. 그때, 안중근은 악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 두렵지 않았다. - P32
영혼을 가진 사람은 어디에나 있다. - P33
쇠가 이 세상에 길을 내고 있습니다. 길이 열리면 이 세계는 그 길 위로 계속해서 움직입니다. 한번 길을 내면, 길이 또 길을 만들어내서 누구도 길을 거역하지 못합니다. 힘이 길을 만들고 길은 힘을 만드는 것입니다.순종이 말했다.-세상의 땅과 물을 건너가는 길도 있지만, 조선에는 고래로 내려오는 길이 있소. 충절과 법도와 인륜의 길이오. - P40
두려움은 못 느끼듯이 느끼게 해야만 흠뻑 젖게 할 수 있을 것이었다. - P8
메이지는 일본어로 말하는 이은의 입을 바라보면서 사람의 땅 위에서 왕자 노릇 하는 일의 슬픔을 느꼈다. - P12
-시간을 아껴라. 시간으로 세상을 잴 수 있다. 부디 시간과 더불어 새로워져라. 새롭게 태어나라. - P13
핵폭발로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엄마 로웨나와 아들 덜란이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어 살아가는 이야기. 이 세상에 자신들 둘뿐이라는 두려움 속에서도 잊지 않기 위해 엄마와 아들이 그들의 삶을 기록으로 남긴다.
길고 느린 시간의 개념을 체화하려면 운동선수가 새벽 여섯 시에 일어나 아침 식사 전 훈련을 하는 것처럼, 자신을 몰아붙이고 단련할 필요가 있다. 느림이 없으면 삶은 숨이 막히고, 만족감을 주지 못하고, 머리와 꼬리도 구분할 수 없이 급히 꿰매진 조각이 되고 만다. 나무는 뿌리에서 위로만 자라는 것이 아니다. 추운 겨울을 나는 나무는 천천히 그리고 오랫동안 생존에 필요한 휴식을 취하며 위쪽만큼이나 아래쪽으로도 자란다 - P191
오늘을 즐기는 것과 장기적인 안목을 갖는 것은 모순되는 개념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능력은 먼 미래를 생각하는 능력과는 다른 종류의 삶의 의미를 제공한다. 둘다 시간 속에 존재하는 방식이며 둘 다 꼭 필요하다. 역사에 깊이가 더해지려면 강렬한 순간이 필요하며, 그것이 기억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더 큰 무언가가 된다. - P207
균형의 기술은 복잡한 세상에 잡아먹히지 않도록 나를 지켜준다. 세상이라는 바다에 빠졌을 때 아무도 그 물을 다 마셔버리라고 할 수 없다.나는 균형의 기술을 통해 세상이라는 바다에서 내 페이스대로 헤엄칠 수 있다. - P257
죽음은 철학하는 능력에 관계 없이 좋은 것이어야 한다. 힌두교와 불교에 정통한 사람들에 따르면 좋은 죽음에는 준비가 필요하다. 자신의 삶을 포함하여 모든 것의 덧없음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하며, 죽음의 순간에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한다. - P2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