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실리아는 마셜이 연설을 시작한 후 몇 분간 그를 유심히 관찰했다. 꽤 괜찮은 외모에 엄청난 부자이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무식해 보이는 이런 남자와 결혼을 하면 얼마나 감미로운 자기 파괴가 될지를 생각하며 그녀는 유쾌한 허탈감을 느꼈다. - P79

그녀 앞에 펼쳐진 장면은 이미 오래 전에 일어났고, 모든 결과가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엄청나게 큰 것에 이르기까지 이미 정해져 있는 듯한 느낌. 앞으로 아무리 이상하거나 충격적인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리 놀랍지 않고 오히려 어딘가 낯익은 듯한 느낌이 들고, ‘아 그래, 맞아, 그거였구나, 왜 진작 몰랐지?‘하고 혼잣말을 하게 될 것만 같았다. - P84

이혼이라는 단어는 아이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외설과 가족의 수치를 담고 있는 말이었다. - P88

어쨌든 잭슨은 이혼이라는 말을 큰 소리로 내뱉는 것이 이혼이라는 행위 - 그것이 어떤 행위인지는 쌍둥이들뿐만 아니라 롤라조차도 잘 모르고 있었지만- 만큼이나 큰 죄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P8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억 명의 사람들이 20억 개의 목소리와 하나같이 중요하다고 아우성치는 20억 개의 생각들을 가지고 자신만은 특별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이 세상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곳이었다. 이런 세상에서는 사실 어느 누구도 특별할 수 없었다. 모두 자신은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아무도 특별하지 않았다. - P61

사람을 불행에 빠뜨리는 것은 사악함과 음모만이 아니었다. 혼동과 오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 역시 우리 자신과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똑같은 존재라는 단순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불행을 부른다. 그리고 오직 소설 속에서만 타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모든 마음이 똑같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었다. 이것이 소설이 지녀야 할 유일한 교훈이었다. - P67

진실은 허구만큼이나 붙잡을 수 없는 유령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 P6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때로는 섬뜩함을, 때로는 지극한 슬픔을 불러일으키는 이 연극에서 브리오니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운을 맞춘 서막에서 표현했듯이, 이성에 근거하지 않은 눈먼 사랑은 불행하게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 P13

대부분의 어른들은 아이들이 정말로 바라는 것은 어른들의 간섭을받지 않는 자기들만의 시간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 P23

부모의 보호 안에서 별다른 어려움 없이 살아온 브리오니는 다른 사람과 심각하게 맞서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알 수 있었다. 다른 사람과 맞서는 일은 쌀쌀한 기운이 남아 있는 6월 초에 수영장 물 속으로 뛰어드는 일과 같았다. 이것저것 재볼 필요 없이 행동으로 옮기면 되는 일이었다. 그녀가 의자에서 몸을 빼내 일어서서 사촌이 서 있는 곳으로 걸어가는 동안 심장은 쿵 소리를 내며 내려앉는 것같았고 숨이 가빠졌다. - P31

사람들은 혼자 있을 땐 일을 바른 순서대로 하지 않는 법이다. - P4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순한 열정 (무선)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직접 체험하지 않은 허구를 쓴 적이 한 번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말하는 아니 에르노는 프랑스의 작가로 202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단순한 열정‘은 사랑에 빠져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사랑에 빠진 여자의 심리를 너무나도 잘 드러내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고통스러운 미래의 쾌락 속에 살고 있었다. - P39

수많은 영상과 몸짓과 대화가 있었던 그 사람과의 첫날밤 이후 내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인 기억들, 모스크바의 고양이 조련사, 목욕 가운, 바르비종 같은 모든 것들이 내 머릿속에서 쓰이지 않은 열정적인 소설의 텍스트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것들이 서서히 스러지기 시작한다. 살아 있는 텍스트였던 그것들은 결국은 찌꺼기와 작은 흔적들이 되어버릴 것이다. 언젠가 그 사람도 다른 사람들처럼 내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리겠지. - P59

사람들은 연합군의 지상 공격과 화학무기를 이용한 사담 후세인의 반격전, 그리고 라파예트 백화점 테러 등 이미 예고되었지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들을 가슴 졸이며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사랑의 열정을 겪을 때 생겨나는 것과 똑같은, 진실을 알고 싶어하는 불가능한 욕망과 고뇌이다. 그러나 그 둘 사이의 유사성은 여기서 그친다. 이런 기다림에는 꿈이나 상상이란 존재하지 않으니까. - P62

그 사람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고 지금은 그 모든 일들이 다른 여자가 겪은 일인 것처럼 생소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사람 덕분에 나는 남들과 나를 구분시켜주는 어떤 한계 가까이에, 어쩌면 그 한계를 뛰어넘는 곳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나는 내 온몸으로 남들과는 다르게 시간을 헤아리며 살았다.
나는 한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 얼마만큼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숭고하고 치명적이기까지 한 욕망, 위엄 따위는 없는 부재, 다른 사람들이 그랬다면 무분별하다고 생각했을 신념과 행동,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스스럼없이 행했다.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세상과 더욱 굳게 맺어주었다. - P66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 따위를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 아닐까. - P6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