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의 소설에는 잃어버린 상실과 허무가 있다. 그는 개인과 개인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성의 부재를 추적한다. 관계의 부재는 고독을 만들고, 고독을 인식한 현대인은 핀볼이든 쌍둥이든 새로운 관계를 요구한다. - P130
관계는 변혁과 더불어 과거와의 청산을 통해서만 진정으로 새로워질 수 있다. - P138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극히 제한된 것이야. - P143
누군가 말했듯이 수고만 아끼지 않는다면 웬만한 일은 곧 알 수 있기 마련이다. - P155
실존주의에서 ‘죽음‘이란 나이가 들면 죽는 상투적인 의미가 아니다. 실존주의에서 죽음은 삶에 새로운 의미를 주는 계기를 의미한다. - P155
절망하고 절망한다고 완벽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 P73
이 시대를 사는 사람은 새끼손가락이든 무엇이든 ‘상실’한 채 살아간다. - P91
사람은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야 / 사람이라고 불릴 수 있을까? - P96
모든 것은 지나간다. 아무도 그걸 붙잡을 수는 없다. 우리들은 그렇게 살아간다. - P102
아버지는 모든 인간의 숙명이다. 아버지는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초자아 권력의 상징이다. - P121
우리는 광대한 대지를 향해 떨어지는 수많은 물방울 중 이름모를 한 방울에 지나지 않는다. 한 방울의 빗물 나름의 생각이 있다. 한 방울 빗물의 역사가 있어서, 그것을(역사를) 이어나가야 한다는 한 방울 빗물의 책무가 있다. - P50
오랜만에 돌아왔다. 그동안 모든 것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져 손을 놓고 멍하게 살아내다 이제 다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내가 열세 살 때였던가. 아빠와 짜장면을 먹다 말고 왜 봄만 되면 그렇게 머리를 빡빡 미는지 물은 적이 있었다. "음, 그건... 공장 사람들하고 아빠 마음이 같다는 것을 사장한테 보여주려고 그래." 아빠는 잠깐 고민하더니 그렇게 말해주었다. "그래야 다 비슷해 보이거든. 그러면 파업 끝나고 나서도 함부로 못해." - P42
나는 엄마가 티내지않고 따로 달걀을 삶아 으깨서 이시봉의 사료에 섞어준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시봉은 때때로 무언가를 잘못 먹고 토하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엄마가 이시봉을 안고 욕실로 들어가 입 주위를 닦아주고 배를 문질러주었다. 나에겐 그런 엄마의 존재가 은근한 자부심이었다. 이시봉도, 나도 안전하다는 느낌. 우리가 나중에 어떤 존재가 된다 해도 버려지거나 외면당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 - P50
이시봉을 원망한다는 것은 자연을 원망하는 것. 나는 엄마가 곧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길 바랐다. 또 곧 그렇게 되리라고 믿었다. 엄마는 지금 이시봉이 아닌 세상을 원망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그 화풀이를 이시봉에게 해선 안 되는 것이라고…………… 이해와 원망은 엄연히 다른 거니까. - P52
초등학교 선생될 인간들을 다 점수로만 뽑으니까 모범생들만 아이들을 가르치게 되고, 그 모범생들이 모범생 아닌 아이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된다는 것이었다. - P58
"자기가 어떤 상태인지 자기 자신은 잘 모를 때가 있거든." - P64
때때로 인간의 역사와 동물 혈통의 역사는 이런 식으로 다르게 기술된다. 인간의 역사는 사건을 중심에 둔 채 쓰이지만, 동물 혈통의 역사는 필연적으로 생존과 번식에 방점이 찍힌 채 기록되기 때문이다. 누가 태어나고, 누가 인간들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았는가? 누가 돌봐주었고, 누구와 짝짓기를 했는가? 죽는 순간, 바로 옆에 누가 있었는가? 그 사실이 핵심을 이룬다. 그래서 이 역사는 사적이고 생략이 많으며 편협할 수밖에 없다. 생존을, 번식을, 모든 가치의 중심에 두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밝은 사람이라면 잘 알 것이다. 인간의 역사 또한 한 꺼풀 벗겨보면 그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 P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