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여러 번, 우리의 만남을 상상했었다. 나는 그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 아이는 나의 아들로서 만나는 일을. 그렇긴 하지만,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걸 알았다. 바랄 수 있는 최선은 객석의 한 자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나는 받아들였다. - P45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렸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모든 것을 날려가는 바람이 불지도 않았다. 심장마비도 없었다. 문간에 서 있는 천사도 없었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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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눈에 띄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 P10

나는 다만 누군가의 눈에 띄지 않는 날 죽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 P11

오십 년이 넘도록 열쇠공 일을 했다. 그것은 과거의 내가 상상했을 법한 삶이 아니었다. 그렇긴 하지만. 실은 그 일을 좋아하게 되었다. 나는 사람들이 잠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혹은 안으로 들이면 안 되는 것들을 막아내 악몽을 꾸지 않고 잘 수 있게 도왔다. - P12

바보라도 창가에 세워두면 스피노자가 된다. - P12

심근의 이십오 퍼센트가 죽었다. 몸을 회복하는 데 시간이 걸렸고 다시는 일터로 돌아가지 않았다. 일 년이 지났다. 시간 그 자체를 위해 흘러가는 시간을 의식하게 되었다. - P12

삶은 새로운 언어를 요구했다. - P14

시도했다가 실패하는 편이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 - P14

탁자를 쾅쾅 내리치고 숨을 헐떡이며 나는 생각했다. 아마도 이렇게 가려나보다. 발작적으로 웃다가, 더 나은 길이 뭐가 있을까, 웃으며 울고, 웃으며 노래하고, 웃으며 혼자라는 사실을, 인생이 끝났다는 사실을, 죽음이 문밖에서 기다린다는 사실을 잊는 것보다.

때때로 나는 내 책의 마지막 페이지와 내 인생의 마지막 페이지가 하나이며 똑같다고 믿었다. 책이 끝나면 나도 끝날 거라고, 큰바람이 방을 휩쓸어 원고를 모두 날려버릴 거라고, 허공에 펄럭이던 흰 종잇장들이 모두 사라지고 나면 방이 고요해질 거라고, 내가앉아 있던 의자가 텅 빌 거라고. - P20

앞으로도 하나뿐인 사랑일 여자를 위해 그래야 한다면. 어쨌거나, 완전히 사라져버린 남자에게 한 가지를 더 숨기는 게 무슨 대수겠는가? - P26

죽어 있는 나를 처음으로 보게 되는 사람은 누구일까? - P29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니, 얼굴에 닿는 바람과 빗방울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 P29

어딘가에 말하고 싶다. 용서하려고 노력해왔다고. 그렇긴 하지만. 살면서 분노를 억누르지 못했던 때가, 아니 여러 해가 있었다.
추함이 나를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원한을 품을 때 느끼는 어떤 만족감이 있었다. 원한을 자초했다. 바깥에 서 있는 그것을 안으로 불러들였다. 세상을 향해 인상을 썼다. 그러자 세상도 내게 인상을썼다. 우리는 서로를 향한 혐오의 시선에 묶여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 P34

나는 바로 뒤에 사람이 오는데도 문을 쾅 닫아버리곤 했다. 아무데서나 방귀를 뀌었다. 계산원들이 동전을 가로챈다고, 그 동전을 손에 쥐고서, 욕을 해댔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비둘기에게 독약이나 먹이는 부류의 얼간이가 되어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날 피하려고 도로를 건너갔다. 나는 암적인 인간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정말로 화가 난 것도 아니었다. 더는 그렇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에 분노를 어딘가에 두고 왔다. 공원 벤치에 내려놓고 걸어나왔다. 그렇긴 하지만 너무 오래 그렇게 살아와서 다른 존재 방식을 알지 못했다. 어느 날 나는 잠에서 깨어나 혼잣말을 했다. 아직 너무 늦진 않았어. 처음 며칠은 이상했다. 거울 앞에서 미소를 연습해야 했다. 하지만 되돌아왔다. 마치 묵직한 추를 내려놓은 느낌이었다. 내가 내려놓았더니 무언가가 나를 내려놓았다.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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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앞으로 흘러가는 한, 그녀에게 두려운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가 두려운 건 과거였다. 칼자국이 작살에 배가 꿰뚫린 채 물 속으로 잠겨들던 시간이었으며 폭풍우 몰아치던 밤이었다. 그녀가 진정으로 두려운 건 가슴을 풀어헤친 채 미친년처럼 바닷가를 허우적거리던 순간이었으며, 시간이 거꾸로 흘러 그 순간이 영원히 반복되는 거였다. 그래서 그녀는 잠드는 것이 두려웠다. 잠이 들면 꿈을 꾸고 꿈을 꾸면 어김없이 칼자국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 P128

당연하지. 보고 싶은 것들은 언젠간 다시 만나게 되어 있어.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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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이 보잘것없는 허상을 좇는 동안 나오꼬만 늙은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청춘도 이미 모두 흘러가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잔인한 운명을 저주하며 자신의 인생을 희롱한 신에 대해 이를 갈며 복수를 다짐했다. 그가 택한 복수의 방법은 죽을 때까지 다시는 여자를 사랑하지 않기로 결심한 거였다. 그리고 그 맹세로 그는 손가락을 하나 더 잘랐다. - P96

살다보면 누구나 부지불식간에 엉뚱한 미망이나 부조리한 집착에사로잡힐 때가 있게 마련이다. - P106

과연 객관적 진실이란 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사람들의 입을 통해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란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 것일까? 칼자국이 죽어가면서 금복에게 한 말은 과연 진실일까?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조차도 인간의 교활함은 여전히 그 능력을 발휘할 수있는 것일까? - P117

평생을 하역부로 일한 그가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나르게 된 짐은 바로 그 어떤 짐보다도 무거운 제 자신의 몸뚱이였다.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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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지자, 갑자기 그 놀라운 세계가 눈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금복은 뭔가 속은 것처럼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오르가슴을 향해 솟아오르다 추락한 것 같은 허망함과 아쉬움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서질 못했다. 그 순간 그녀는 방금 눈앞에서 펼쳐졌던 그 신기한 세계가 멈추지 않고 영원히 계속되길 간절히 원했다. 그리고 만일 누군가 그렇게 해줄 수만 있다면 자신의 모든 것과 맞바꾸어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 P78

극장에 들어가 한 짓이라곤 겨우 영화 한 편 본 것뿐이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뭔가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그녀는 그날의 사건이 자신의 운명을 어떻게 바꾸어놓을지 짐작하지 못했다. - P79

이야기란 본시, 전하는 자의 입장에 따라, 듣는 사람의 편의에 따라, 이야기꾼의 솜씨에 따라 가감과 변형이 있게 마련이다. - P82

그날 걱정은 짧은 한 순간에 영웅적인 용기와 어리석은 만용을 순서대로 모두 보여주었다. - P85

-나는, 이번에도, 내가, 그걸 다시, 막아낼 수 있을 줄 알았어.

그것은 무지의 법칙이었다. 금복은 비로소 충만한 기쁨 안에 도사리고 있던 두려움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것은 육체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던 단순함의 비극적 측면이었다.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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