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나지막한 소리로 어린아이가 발음 연습을 하듯 또박또박 로비라고 불렀다. 뒤이어 그가 그녀의 이름을 속삭였을 때, 그녀의 이름은 완전히 새롭게 느껴졌다. 철자는 달라진 게 없었지만, 그 의미가 완전히 새롭게 변해버렸다. 마침내 그는 어떤 저속한 문학작품이나 인간의 위선으로도 깎아내릴 수 없는 세 단어를 그녀에게 속삭였다. 그녀는 자신이 먼저 이 말을 하는 것처럼 둘째 단어에 강세를 넣어 같은 말을그에게 속삭였다. 그는 종교가 없었지만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가 증인으로 그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해준 그 말은 보이지 않는 계약서에 남긴 서명 같았다. - P198

가슴이 오그라들 것 같은 그 순간, 그는 지금까지 누군가를 진심으로 증오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증오는 사랑과 마찬가지로 순수한 감정이었지만, 사랑과는 달리 얼음처럼 냉정하고 이성적인 감정이었다. - P200

언젠가 손님들을 초대한 저녁식사 자리에서 무슨 분야인진 몰라도 과학을 가르친다는 어느 교수가 분위기를 바꿔볼 요량으로 큰 장식촛대들 위를 날아다니는 벌레 몇 마리를 가리키며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는 이 벌레들을 빛 속으로 유혹하는 것은 빛 너머에 있는 더 깊은 어둠이라고 했다. 벌레들은 잡아먹히는 한이 있더라도 빛의 가장자리에 있는 가장 어두운 곳을 찾아가려는 본능에 충실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곤충들 눈에 보이는 빛 속의 어둠은 착시에 불과하다고도 했다. 그의 이런 설명은 궤변처럼, 단지 설명을 위한 설명처럼 들렸다. 어느 누가 곤충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단 말인가? 세상 모든 것에 다 그럴듯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닌데도 그것들을 알아내려고 노력하는 것은 세상사를 그르치는 일이며 쓸데없는 짓일 뿐 아니라 화를 부를 수도 있다. 어떤 일들은 정말로 그렇다. - P215

다른사람들이 심심풀이로 읽는 책들을 전공으로 읽어놓고도 어떻게 자신이 남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까? - P219

그의 증오가 두렵기는 했지만, 어른에게서 증오를 받는다는 것은 자신이 어른으로 자리매김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아이들도 남을 증오할 수는 있지만 변덕이 너무 심하다. 어린애의 증오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어른의 증오의 대상이 되는 것은 새로운 세계로 들어서는 엄숙한 의식과도 같았다.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올라섰다는 의미였다. - P226

원래 진리란 이렇게 낯설고 사람을 미혹에 빠뜨리곤 하며, 일상의 흐름을 거슬러가며 애써 찾아야 하는 것이니까. - P227

자신이 본 것을 진실이라고 믿는 순진한 브리오니가 롤라가 해야 할 일까지 다 떠맡아줄 것이다. 롤라는 그저 진실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으면서, 그 진실을 빨리, 그리고 완전히 잊어버리고, 자신이 브리오니와는 다른 진실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확신이 없는 거라고만 믿으면 되었다. 그의 손이 눈을 가리고 있어서 그를 보지 못했고, 공포에 떨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고 자신을 설득하기만 하면 되었다. -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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