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치 못했던 일들은 종종 운명적인 무언가를 재촉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 P9

남자는 세련되고 정중한 영어를 사용했는데, 영어가 완전히 자연스러운 것 같지는 않았다.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그림을 그리듯이 조심스럽게 그에게 덧칠된 것 같은 영어였다. - P9

어떻게 그런 낯선 세계에 발을 들일 수있었냐고 내가 물었을 때, 그는 그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돈이라는 게 그 자체로 하나의 국가를 이루죠. 부모님은 선주였고, 우리 가문은 국제적인 사업을 했습니다. 하지만 부모님 두 분 모두 작은 섬에서 태어났죠. 아마 들어보신 적도 없을 겁니다. 관광지로 유명한 섬과 아주 근덥하기는 하지만요" - P10

결혼은 다른 무엇보다도 신뢰에 바탕을 둔 체계, 하나의 이야기이며, 결혼 생활은 지극히 현실적인 것들로 드러나게 마련이지만, 그 생활을 이끌어가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신비한 무엇이라고 - P15

결국 현실은, 집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집은 사라져버린 것들이 있던 지리적 공간, 그리고 내 생각에는, 언젠가는 그것들을 되찾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대변하는 공간이었다. 그 집에서 나왔다는 건, 어떤 식으로든, 이제 더 이상 기다리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 P15

무언가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정확히 그 자리에, 약속 장소에 머무르는 것이다. 문제는 얼마나 오래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 P16

"어릴 때 건초 더미를 담은 수레가 밭에서 돌아오는 걸 본 적이 있는데, 건초를 어찌나 많이 실었는지 쓰러지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였죠. 아래위로 출렁거리고, 깜짝 놀랄 정도로 휘청거리는데, 놀랍게도 쓰러지지는 않더군요. 그런데 어느 날인가 드디어 쓰러진 걸 본 거예요. 수레가 옆으로 쓰러져 있고, 주변에 건초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있고,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이리저리 달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옆에 있던 어른한테 물었더니 길에서 살짝 솟은 부분이 있어서 거기 부딪혔다는 거예요. 그 이야기가 잊히지 않습니다. 언젠가 일어날 사고였지만, 또 참 바보 같은 일이었다고요. 첫 아내와 나한테도 해당하는 말입니다. 우리도 길에서 살짝 솟은 부분에 부딪혔고, 그렇게 넘어진 거죠." - P16

길에서 살짝 솟은 부분은 그의 결혼만 넘어뜨린 게 아니었다. 그 부분 때문에 그는 완전히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 아주 길기만 하고 목적지도 없는 우회로, 실제로는 자신과 아무 관련도 없는, 지금도 가끔은 그저 여행 중에 지나는 길처럼 느껴지는 길이었다. - P18

마치 안락의자를 좋아하게 되는 것처럼. 특히 장인을 더 좋아하게 되었는데, 이 양반은 뭐든 극단적으로 하기 싫어하는 사람이어서, 옆자리 남자는 장인이 과거에 어떤 식으로든 정신적 외상을 입었던 게 틀림없을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까지 삶에 상처를 입은 사람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움직였다. 젊은 시절이었다면 그런 남자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고, 장인이 침묵하는 이유 같은 건 생각해볼 시도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장인의 고통을알아보는 것을 통해 옆자리 남자는, 자신의 고통도 알아보기 시작했다. - P25

사소한 일처럼 보이지만, 그런 인식을 통해 그는 그때까지 자신의 삶을 완전히 반대 방향에서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자신의 의지로 살아왔다고 생각했던 지난 개인사가, 그렇게 관점을 바꾸자, 어떤 윤리적인 여정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등산 중에 뒤를 돌아보는 등산객처럼, 뒤를 돌아보며 자신이 지나온 길을 되살폈다. 더 이상 올라가는 일에만 마음을 두지 않았다. - P26

무슨 짓을 해도, 환상과 실재 사이의 간극은 메울 수 없었다. "나 자신이 점점 비워지는 것같더군요"라고 옆자리 남자는 말했다. - P2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