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을 오래 자다보면 고즈넉하게 늙는 기분이 들었다. 남몰래 시간이 흘러가는 그 느낌이 치열하지 않아서 좋았다. - P149

그때 알았다. 가까운 사람에게 비밀을 털어놓는 것은 언제고 꺼낼 수 있는 무기를 쥐여주는 거나 다름없다는 걸. - P181

나는 로봇 청소기가 반복적으로 돌아가는 고모의 작은 방을 상상해 보았다. 그곳에서도 나름의 일들이 일어나고 생활이 쌓여 세월이 되고 축적된 삶의 방식과 고유의 냄새 같은 것들이 응집되어 있을 터였다. - P187

해나는 처음 수상 소식을 들었던 순간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세상이 딱 죽지 않을 정도로만 자신의 삶을 독려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P195

곧 떠날 사람이라는 마음으로 일하는 것은 골치 아프고 서러웠다. 이곳저곳 떠돌더라도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곳이 필요했다. - P203

자기 연민이란 게 무서워 - P206

요즘 날씨는 늘 맑음과 흐림 사이였다. 아마 기상청은 이전과는 다른 단어와 아이콘을 만들어내야 할 것이다. 이제 완벽하게 맑은 날씨와 완벽하게 흐린 날씨는 손에 꼽으니까. 날씨조차 스며들듯, 알아차리지 못하는 새 달라진 것이었다. - P206

보상은 결코 온전한 노력의 결과물이 아니었다. 해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연이은 실패 후로도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는 삶은 젖은 나무판자처럼 쉽게 뒤틀렸다. 해나는 그렇게 훼손된 마음으로 쉽게 남을 판단하는사람이 되어버렸다. - P214

사회는 조리 있게 굴러가야 하지만, 가족이라는 제도 안의 조리는 다른 문제였던 것이다. - P227

어쩌면 한 사람의 역사를 알면 그 사람을 쉬이 미워하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 P227

근데 말이야. 나이라는 게 사람을 주저하게도 만들지만 뭘 하게도 만들어. - P238

"있잖아, 수민아. 그냥 죽고 싶은 마음과 절대 죽고 싶지 않은 마음이 매일매일 속을 아프게 해. 그런데 더 무서운 게 뭔지 알아? 그런 내 마음을 어떻게 알고 온갖 것들이 나를 다 살리는 방식으로 죽인다는 거야. 나는 너희들이 걱정돼.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돈이 더 많이 들어서." - P239

그러니까, 나 같은 요즘 애들은 똑딱 핀을 만들면서 무언가를 도모할 거리는 없었지만, 그래도 뜻이라는게 있었다.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뜻, 의지, 그런 것들. 비록 미적지근할지언정, 중요한 건 분명히 그런 게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 P244

꽤 오랜 시간을 살아왔지만 사는 것에는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 P254

윤재는 다 죽어가는 식물을 주워오는 할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죽어가는 것을 살리고자 하는 마음이었을까. 윤재는 만약 할머니를 이해하게 된다면 버리는 사람들 또한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모르긴 해도 그 두 마음은 아주 미세한 차이에 불과해 보였으니까. - P266

남편이 죽고 나서야 끊었던 술을 다시 입에 댔다. 수진은 늘 그런 식이었다. 마른 손을 불쑥 내밀었다가 금세 거둬버리는 식. 마음 붙일 곳 하나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자꾸 화가 났다. 모든 걸 다 바쳐 사랑해도 미안해할 것이 생겼다. 그러니까, 삶은 바치는 종류의 무언가가 아닌데,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남편에게, 수진에게, 윤재에게, 대모님에게 화가 났다. 왜 나를 이렇게 대하는 거지. 차연은 자꾸 속 시끄러운 마음이 되어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기어코 대모님에게 또 전화를 걸었다. - P272

어떤 삶에 관여하는 일은 정말 무서운 일이에요. - P277

나이가 들수록 혼자 살아갈 힘이 생길 거라고 생각했는데, 해를 거듭할수록 혼자일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 끔찍해졌다. - P293

무언가를 대비하기 위해 삶을 갈아낸다는 것은 그 자체로 잔인한 일이었다. 혹시 내가 삶을 망가뜨리지 않기 위해 하는 일들이 사실은 정말 내 삶을 망가뜨리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 무서워졌다. - P302

나는 정선이에게서 내가 가장 싫어하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며 동질감을 느꼈고 그건 애초에 잘못된 관계의 시작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린 속수무책으로 가까워졌다. 미리내와 내가 지금 이렇게 가까워진 것처럼. - P315

모든 관계에 귀속된 잘잘못들. 그런 것들을 따지다보면 내가 혼자 세계를 맴도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걸 온전히 인정하게 되었다. - P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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