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과 밤이 교차하는 짧은 순간, 상처의 빛이 어둠 속에 잠긴 삶의 아픈 단면을 드러낸다. - P218
인간에게 영원한 목소리와 영원한 정신이 허락되지 않았기에, 이야기나 소설의 끝은 언제나 외부적인 손의 개입으로 얼룩져 있다. - P218
현재는 결코 의식되지 않는 무제한의 긴장이다. - P219
나는 연애가 아니라 이별을, 사랑이 아니라 그리움을 기억한다. 연애의 시작이나 과정은 조금도 특별할 것이 없지만 연애의 끝은언제나 특별하다. 나는 그 특별한 그리움과 집착, 뒤틀린 내 몸안에 도사리고 있던 특별한 사나움을 기억한다. - P222
둔중한 악기 소리와 합쳐진 피아노 저음부가 장중하게 울리면 그걸 받아서 피아노 건반 하나가 청아하게 울렸다. 무거운 음량이 널의 한쪽 편에 쿵 내려앉으면 널의 반대편에서 몸 가벼운 새처럼 피아노 건반 하나가 내는 낭창한 음이 고독하게 솟아올랐다. 이런 불균형적인 음량의 널뛰기가 반복되었다. 그때 들은 피아노 고음의 외롭고 힘겨운 대결이 주는 처절함은 그후로도 오랫동안 내 귓속 세반고리관을 자극했다. - P228
연애의 시작은 유쾌했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결승점인 달리기 경주와 같았다. 출발선에 마주선 그와 나의 귓밥을 후벼파며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울렸다. 연애는 그렇게 불가사의하고 느닷없는 몰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 P232
사변적인 자들은 말한다. 의심하는 순간 사랑은 완성된다고. 회의에 빠졌을 때 비로소 사랑의 정수를 맛보게 된다고. 사랑에 대한 믿음은 한갓 베일 뒤를 보지 못하고 베일 위의 그림만을 보는 허약한 환상일 뿐이라고. 그러나 철학적인 논객들의 말을 오해해서는안 된다. 그들이 말하는 것이 사랑의 정수나 실체에 관련된 진리일지는 몰라도 행복한 사랑에 대한 언급은 아니다. 적어도 내게 있어서 사랑은 확실성을 동반하는 한에서만 행복이었다. - P237
당시에 내가 품고 있던 사랑에 대한 결론은 매우 단호한 것으로, 존재를 걸고 사랑을 요구할 수 없다면 존재를 걸고 잊어야 한다는 식이었다. - P241
죽음과 웃음을 한데 묶는다는 건 아주 위험천만한 장난이다. - P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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