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나는 소주 마시는 취향도 달랐다. 아버지는 잔이 조금만 비어도 첨잔했고 나는 잔이 바닥이 나야 술을 따랐다. 아버지는 빨리 마셨고 나는 천천히 마셨다. 아버지와 나는 각자 한 병씩을 꿰어차고 각자의 잔에 각자 따라 마셨다. - P180

아버지와 나는 대화에서도 합의점을 찾을 수 없었다. 라면 냄비와 소주병을 나누었듯 아버지와 나는 대화에서도 각자의 몫을 독백했다. 아버지는 당신만의 울분을 큰 소리로 토로했고 나는 나만의 상념을 중얼중얼 주워섬겼다. - P181

낮술을 마시면서 나는 사람들을 순수하게 사랑하지 못하고, 고귀한 목적을 위해 추호의 의심 없이 나아가지 못하고, 가치를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지 못하는 나 자신을 원통하게 여기면서 내게 결여된 열정, 그 열렬한 활동력과 에너지를 갈망했다. 내 정신이 아무리 부인하더라도 내 몸은 나를 보수주의자로 주조해냈고,
그래서 내 몸은 내 정신에 대해 늘 죄의식을 느껴야만 한다고 나는침통하게 생각했다. 첫째 이모가 남편에게 버림받은 후 생겨난 모든 불행의 무게를 이겨내기 위해 민정이를 제물로 삼았듯이, 나는풍비박산 난 내 젊은 날의 신념을 약하고 게으른 내 육체의 탓으로돌렸다. 정신력과 의지의 결핍을 문제삼기보다 순수히 육체의 결함과 한계를 원망하는 것은 얼마나 더 불가항력적인 듯이 보이는가. - P181

죄의식이란, 그것이 무엇에 대해서건 알리바이로 기능하는 한에서는 늘 과잉일 수밖에 없었다. 나의 휴학 생활을 버티게 해준 것은 이러한 과장된 죄의식의 힘과 한 권의 책 아라비안나이트였다. - P182

권태가 표정을 우그러뜨리던 시간들이었다. - P185

상처가 아무리 크고 깊다 해도 샤푸리야르 형제는 남은 세월을 살아나가야 한다. 이야기는 계속 이어져야 한다. 아, 이제 어쩌란 말이냐! 여자들의 저 발칙한 욕구를 어떻게, 무슨 수로 막을 수 있겠는가? 도저히 막을 수 없다! 도저히 막을 수 없다! 이런 좌절에서 샤푸리야르 형제의 복수극이 시작된다. 이 형제의 복수극은 인류를 멸종하게 만드는 반문화적인 것이다. 이들은 인간이 정숙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하여 형성된 모든 제도들을 부정하고 파괴하는 문명의 이단자들이 된다. 이들을 치유하는 문명의 한 방식, 가장 강력하고 고전적인 방식이 소위 ‘이야기‘라는 것, 이야기가 상처투성이 인간을 문명으로 재편입시킬 수 있다는 것을 감히 아라비안나이트』는 주장하고 있다. - P188

그 당시의 나도 샤푸리야르왕처럼 이야기를 통해 치유되고 싶었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치유의 환상 속에 머물 수 있었다. 책은 내게 이야기를 건넸고, 매일 밤 이야기를 이어갔고, 이야기가 영원하다는 것을 보증했다. 이야기에 둘러싸여 있다는 기쁨은 문명 속에 편입되어 있다는 기쁨과 한가지였다. 나는 소외되지도, 고통받지도 않았다. 나는 밤마다 아라비안나이트』라는 가공의 문명 속에서 안도했다. - P188

이야기는 인간으로 하여금 과거의 모든 것을 망각하게 만드는 로터스 열매이다. - P189

이야기는 자신의 상처만을 곰곰이 들여다보고 있는 불행한 인간을 임시로 치유하는 장치이다. -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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