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염의 탑 - 소설 오우치 요시히로
후루카와 가오루 지음, 조정민 옮김 / 산지니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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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화염의 탑』은 무로마치 막부 초기 야마구치山口를 중심으로 니시츄고쿠西中國 일대와 규슈 북부 일부, 이즈미和泉와 기이紀伊에 이르기까지 꽤나 큰 세력을 떨쳤던 지방 호족 오우치 요시히로大內義弘의 생애와 그의 전쟁일대기를 다룬 작품입니다. 

 

 막연히 오우치 요시히로 하면 일단은 조금 막막한 느낌이 없잖아 들 수도 있겠지만,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임성태자琳聖太子의 후손을 주장하며 조선 제2대왕인 정종과 서신을 주고 받기도 하여, 정종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는 인물입니다. 일본의 유명한 문학상인 나오키상 수상작가이기도 한 후루카와 가오루의 '화염의 탑'은 이러한 오우치 요시히로의 출신과 관련한 국내독자들의 흥미를 고려하여, 부산-시모노세키 간 문화교류의 일환으로 번역, 소개된 작품입니다. 

 

 규슈탄다이九州探題(규슈일대를 관장하는 지방장관)로 부임한 이마가와 료슌에 물들어 아버지 히로요와의 반목, 아버지 사후 슈고직을 승계,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를 따라 상경, 요시미쓰의 정략에 따른 야마나씨와의 전투, 전공을 인정받아 부여받은 센슈 사카이 일대를 번영시키고, 이후 요시미쓰와의 반목으로 어쩔 수 없이 치르게 된 최후의 전투에 이르기까지 짧고 굵은 오우치 요시히로의 생애가 빠른 전개와 필치로 펼쳐집니다.  

 

 크게 세 번의 전투 장면이 등장하는데, 그 중에서도 교토로 진격해 온 야마나씨와의 전투와 마지막 각오를 다지고 돌격한 최후의 전투 장면은 꽤나 처절하고 긴박하며, 박진감 넘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제법 호탕한 정실부인 오미쓰, 교토에서 만나 뜨겁게 불타오른 유키히메와의 정분 등 요시히로의 여인들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들도 살짝 가미됩니다.  

 

 읽어가는 내내 조금은 우려스럽게 느껴진 생각. 역자와 편집부가 열심히 여러가지 어려운 용어들과 단어들을 잘 번역해 놓았지만, 일본사나 관련 지식에 크게 관심이 없는 평범한 독자에게는 쉽게 받아들이고 이해하기 힘든 단어와 용어, 직위와 이름들이 상당히 부담스럽게 다가갈 수 밖에 없을 것 같다는 점입니다. 작품의 태생적 한계이기에 여기서 뭘 더 손쓸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단순히 '백제의 후손'이라는 키워드 만으로 이 작품을 대하는 일반독자에게는 제법 상당한 고행이 예상됩니다.
 
 물론, 기본적인 용어와 지명, 인물들을 어느 정도 파악만 한다면, 명쾌한 이야기 자체의 재미는 충분합니다. 한 사내의 야망과 실현, 그리고 좌절과 최후를 다루고 있기에 시대, 국적을 떠나 나름 가슴뜨거워지는 영웅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홍보 키워드로 내걸고 있는 '백제의 후손을 자처'한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회의적인 기분이 드는데, 말 그대로 후손임을 주장하고 조선 정종과 서신을 교류했다는 기록 그 자체에서 한 발도 더 내딛지 못한 통상적인 기술과 해석에 그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주장과 기록을 바탕으로 (소설일지라도, 아니 소설이니까) 좀 더 드라마틱하게, 숨겨진 이야기를 발굴해 작가의 상상력으로 덧칠하여 좀 더 재미있게 엮어주기를 바랐던 것인데. 겐지냐 헤이시냐를 물으며 시골 출신 호족을 무시하고 농락하는 구게公家들의 도발에 발끈, 겐지도 헤이시도 아닌 백제 왕족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하는 것이 내딛은 한 걸음이라면 한 걸음 입니다. 역시 단순히 '백제의 후손'이라는 키워드 만으로 이 작품을 기대하고 읽는 일반독자에게는 다소 기대가 꺾이는 부분이 아닐 수 없겠지요. 

 

 개인적으로는 본격적인 전국시대가 시작되기 이전의 분위기를 느껴볼 수 있어 좋았고, 제법 익숙한 가문 이름들이 많이 등장해 반갑기도 했습니다. 이마가와今川, 야마나山名, 잇시키一色, 호소카와細川, 하타케야마畠山, 도키土岐, 오토모大友, 모리毛利 등등. 전국시대 관련 작품들을 많이 접한 독자들에게 꽤나 눈에 익은 이름들일텐데, 전국시대에 활약하는 수많은 다이묘와 장수들의 선조 혹은 선대에 해당하는 인물들(비록 잠시잠깐 스쳐지나가는 면면들이기는 하지만)의 모습이 은근히 흥미로웠습니다. 주인공 오우치 요시히로는 말할 것도 없이 후대의 오우치 요시오키大内義興, 오우치 요시타카大内義隆 등을 연상케 합니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이해하지 못할 것 같기도 한 쇼군 요시미쓰의 언행들, 이마가와 료슌의 속내, 오우치 히로요의 마음 등. NHK사극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清盛》를 보면서 느꼈던 것이기도 하지만, 아리송 가리송 이해안되는 인물들의 마음과 행동들을 과연 일본 사람들은 어떻게 바라보면서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있을까 하는 것이 무척 궁금했습니다. 일본 사람들 역시 이해안되는 부분이다 라고 할지, 아니면 외국인들에게는 잘 와닿지 않는, 일본인 특유의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에 결부시켜도 되는 것인지. 작고 은밀한, 일반적인 행동양식과는 살짝 다른, 그 미묘함에 대하여. 말 그대로 "미묘~". 

 

 사실상 7개 구니國를 지배하며 오우치 가문의 부흥기를 이끈 오우치 요시히로. 끝간데 없는 야심과 쇼군 요시미쓰의 음험한 정략이 정면으로 충돌하며 결국에는 부러지고 말았지만, 교토와 중앙을 향해 길고 날카롭게 뻗은 언월도의 서슬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서걱- 베어낸 야망가득하고 풍류넘치는 이야기. 요시히로를 공양하기 위해 세운 오중탑, '화염의 탑'에 빗대어, 화염의 탑 속 가득한 창랑滄浪한 우주에 녹여 담아낸 난세의 화려하고 불꽃같던 사내의 생애. 그 우주란 비단 요시히로 뿐 아니라 뭍 사내들의 뜨거운 마음과 동경이 공존하는, 환하게 불타오르며 태동하는 생명의 파도가 몰아치는 저 먼 이국 어딘가의, 혹은 깊은 가슴 속 어딘가의 작고 거대한, 섬멸하는 한 줄기 '빛의 점'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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