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다큐프라임 자본주의
EBS 자본주의 제작팀 지음 / 가나출판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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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지 않고 일하는데

나는 왜 이렇게 살기 힘든가?

다들 이런 생각 한번씩 들지 않나요?

경제철학관련 서적들을 사면서 꼭 읽어봐야지 하며 고른 책입니다.

저는 다큐프라임 방송은 보지 못했고, 책으로 읽었는데요.

1년 6개월간의 제작진의 노력이 고스란히 담긴,

그야말로 좋은 다큐멘터리란 이런것이야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학교 다니실 때 경제 배우셨나요?

이 책에 나오는 내용이야말로 살아가면서 꼭 알아야 할

경제에 관한 기본적이고도 거시적인 안목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면서도 우리가 몰랐고, 학교에서는 알려주지 않는 포인트들이 많이 들어있습니다.

학생들부터 일반인까지 모두 이해하기 쉽게 쓰여졌고.

세계 유명 석학들의 고견을 이렇게 들을 수 있다는게 정말 책 읽는 기쁨입니다.

개인적으로 교직에 계신 역사과, 사회과 선생님이 읽어보시고

수업하실 때 학생들에게 코멘트하는 형식으로 이야기 해주시면

학생들의 삶에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D

 

 


 

수상내역인데요.

정지은 프로듀서고희정 작가의 이력은 책의 뒷날개에 나와있습니다.

고희정 작가가 사범대학 과학교육과 출신인건 저한텐 특별하게 느껴지네요.

수상내역만 봐도 꼭 한번 보고싶은 다큐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셔요? :)

 



 

정지은PD의 프롤로그 몇 페이지로 책은 시작됩니다.

자본주의의 본질을 모르면서 자본주의 사회를 살겠다는 것은

아무런 불빛도 없는 깊고 어두운 터널에서 아무 방향으로나 뛰어가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저는 이 문장이 가장 와 닿더라구요.

 

  중요한 것은 '과연 왜 그럴까?' 하는 점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안정과 행복을 워하는데, 왜 정작 세상은 우울하고 피곤한 방향으로만 흘러가는 것일까? 이것이 바로 당신이 '자본주의의 진실'을 알아야 할 첫 번째 이유이다. 자본주의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복잡한 경제학을 배우는 것도 아니고, 나와는 상관없는 이론을 배우는 것도 아니다. 나의 행복과 내 가족의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에 대한 지식이다. ..... 자본주의의 본질을 모르면서 자본주의 사회를 살겠다는 것은 아무런 불빛도 없는 깊고 어두운 터널에서 아무 방향으로나 뛰어가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 돈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고 생존이 위태로워지는 사회, 바로 그곳이 당신이 살고 있는 자본주의 세상이다. ....TV 속 영상으로만 보여주기에는 부족했던 내용들이 이 책에서 심층적으로 보완됐고 훨씬 이해하기 쉽고 논리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우리가 평소 일상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세계 최고의 석학들이 '돈에 관한 진실', '자본주의의 비밀'을 이 책에서 낱낱이 밝혀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길을 밝혀주는 등불이 될 수 있을 것이며, 어떻게 자본주의 속에서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통찰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프롤로그 중 발췌)

 

 

 


 

 

다큐프라임에 방송되었던 화면도 넣어서 이해를 돕고,

세계유명 석학들의 말을 인용할 때에는 그 사람의 사진과 간단한 약력도 넣습니다.

마치 방송을 보는 듯 이해가 잘되요.

전체적인 글의 흐름도 매끄럽고 이해가 잘 되서 술술 잘 읽힙니다. 



 

이건 <2030 대담한 미래>에서도 수없이 나오는 이야기죠.

그 책에서는 전쟁을 해서 다른 나라를 정복하던 시대는 옛날이고,

이제는 금융투자자라는 비밀용병을 파견한다고 표현합니다. 

책이 전체적으로 좋아서 무엇하나만 발췌하기가 참 그렇더라구요~

그래도 몇 부분 귀퉁이 접어놓은 부분 발췌 남기고

제가 읽으면서 생각한 점 등을 코멘트 하는 방식으로 기록남겨보려 합니다.
이런 기록 남기지 않으면 몇개월 지나면 뭘 읽었는지, 무슨 내용이었는지 다 까먹어요 :D

 

 

 

 

Part 1. '빚'이 있어야 돌아가는 사회, 자본주의의 비밀 

 

 

 

  Part 1 에서는 물가는 절대 내려가지 않는다, 은행은 있지도 않은 돈을 만들어낸다,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예금을 찾지는 않는다, 중앙은행은 끊임없이 돈을 찍어낼 수 밖에 없다, 인플레이션의 거품이 꺼지면 금융위기가 온다, 내가 대출이자를 갚으면 누군가는 파산한다, 은행은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도 대출해 준다, 달러를 찍어내는 FRB는 민간은행이다. 라는 소주제로 풀어나갑니다.

 <2030 대담한 미래>를 읽으면서도 느꼈지만, 돈이라는 건 숫자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통장에 꼬박꼬박 저축하면, 우리는 우리의 돈이 은행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아니죠. 피라미드 식의 기업대출과 은행이 상품을 팔아야 하기 때문에 저신용자들에게도 과도한 대출상품을 권하고 허가해줘서 마치 잘 살게 된 것 처럼 착각하게 만들고, 경제의 호황거품이 꺼지면 그들은 다 주저앉게 된다는 것. 미국의 서브프라임사태에서 보았죠. 저는 사실 우리나라도 조만간이다 하는 걱정이 되기도 하고 그래요. 그리고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는 원래 '이자'라는 항목 자체가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것도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알았습니다. 누군가 은행대출을 다 갚으면 또 다른 누군가는 파산한다는 원리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파산하게 될까. 당연히 수입이 적고 빚은 많은 사람들, 경제 사정에 어두운 사람들, 사회의 가장 약자들이 파산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이라는 것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시스템에는 없는 '이자'가 실제로는 존재하는 한, 우리는 다른이의 돈을 뺏기 위해 끊임없이 경쟁해야만 한다. 저마다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매일 '돈,돈,돈'하며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전부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온다. 화폐경제 역사 연구가 앤드류 가우스는 이것을 '의자 앉기 놀이'에 비유한다. "현 은행 시스템은 아이들의 의자 앉기 놀이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노래하고 춤추는 동안은 낙오자가 없기 때문이죠. 하지만 음악이 멈추면 언제나 탈락자가 생깁니다. 의자는 언제나 사람보다 모자라기 때문이죠." 은행 시스템의 이자와 의자 앉기 놀이는 아주 절묘하게도 일치한다. (P.65)

 

....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의 깊게 봐야 할 점은 이 모든 것이 은행의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는 점이다. 인플레이션이 막바지에 이른 상태, 즉 돈이 넘쳐나는 상황에서 은행은 생존을 지속하기 위해 저신용자에게 눈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보통의 기업에서도 상품이 계속해서 팔려야만 기업 활동이 유지된다. 은행의 상품이란 곧 대출을 의미한다. 계속해서 대출을 맏는 사람들이 있어야만 은행이라는 기업도 운영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돈이 많아지자 신용 상태가 좋은 사람들은 더 이상 은행에서 대출을 하지 않아도 됐다. 그러니 결국 은행은 돈인 없는 사람들에게 대출을 해주면서 계속해서 자신의 상품을 팔아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부동산 가격이 추락하니 빚을 갚지 못하는 사람들이 속출하게 되었다. 세계적인 금융위기라고 부르는 디플레이션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우리나라도 상황은 비슷하다. 우리의 아버지들은 집값이란 항상 오르기만 하는 것으로 알았다. 그것은 경제의 사계절 중 여름에 사셨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부동산 가격이 계속해서 떨어지는 것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단순한 '경기불황'이나 '경기침체'가 아닌 자본주의에 구조적으로 내재화되어 있는 문제라고 봐도 좋다. 우리는 미국 공공은행연구소 엘렌 브라운 대표의 말처럼 ' 민주적인 시스템이 아닌 은행가를 위한, 은행가에 의한 민간 시스템'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 것이다. 왜 금융위기가 생겼고, 왜 좀처럼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으며, 왜 부동산 가격은 좀처럼 오르지 않는지, 왜 젊은 사람들이 취직을 못하는지 모든 것의 원인은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찾을 수 있다. 갚아도 갚아도 없어지지 않는 빚, 우리는 결국 벗어날 수 없는 부채의 사슬에 묶여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은행이 돈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는 것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차원이 아니다. 그들이 동정심이 있어서, 또는 가혹한 현실에 처한 저신용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 모든 것은 이미 자본주의 체제 안에 내재된 법칙이며, 또한 약자를 공멸로 몰아가는 비정한 원리다. .... 자본주의의 이러한 원리로 인해 우리가 처하게 되는 현실은 무엇일까, 그것은 투쟁이다. 각박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무한 투쟁'이라는 삶의 방식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p.77)

 

 

 

 

 

Part 2. 위기의 시대에 꼭 알아야 할 금융상품의 비밀

 

 

  Part 2 에서의 소주제는 - 재테크 열기는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은행이란 수익을 내야하는 기업일 뿐이다/ 8%의 이자를 주는 후순위채권의 비밀/ 은행은 판매수수료가 많은 펀드를 권한다/ 보험, 묻지도 따지지도 않다가 큰코다친다/ 파생상품은 투자를 가장한 도박과 같다/ 저축만으로는 행복해질 수 없다/ 금융지능이 있어야 살아남는다 - 로 전개됩니다.

언젠가부터 월급을 꼬박꼬박 저축해서 돈을 모으는 건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이나 하는 소리가 되었죠. 펀드니 주식이니, 투자가치가 있는 상품을 찾아 큰 돈을 쉽게 벌었다는 사돈의 팔촌들도 많구요. 그런데 왜 나는 모르겠냐며. Part 2에서 말하는 요지는 단 한줄로 요약 가능합니다. 수익이 크다는 것은 위험성도 크다는 뜻!

  미국의 금융교육을 잠시 볼까요. 위의 사진에 돼지 저금통 보이시죠?

'머니 세이비'는 미국 시카고 재무부에서 마련한 금융 교육 프로그램으로 해마다 학교를 선정해 특별활동을 하는 금융수업입니다. 이 금융수업은 네개의 부분으로 나뉘어진 돼지 저금통을 이용한 수업입니다. 첫 번째 칸이 가장 중요한 저축이고, 다음이 소비, 기부, 투자의 순입니다. 돼지 저금통을 이용해 각각의 방법이 뭔지, 왜 중요한지에 대해 부모와 소통하며 배우게 된다고 해요.(P.171)

 "너는 우리집에 돈이 얼마나 있는지 궁금해 할것 없고, 공부나 열심히 해!!" 라고 할 것이 아니라, 어릴 적 부터 이렇게 자녀와의 금융교육, 돈 씀씀이에 대한 자연스러운 대화의 장이 필요한 것 같아요. 돈에 대해 무지한 채로 공부만 열심히 한 아이가 과연 금융지능을 가질 수 있을까요? 아니죠. 뭐든 저절로 되는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드네요. 모르는게 약이라는 말도 있지만 아는것이 힘이라는 말도 있죠. 몰랐다는 이유가 자신이 입은 피해를 면해주지는 않습니다. 평범한 우리들도 조금더 부지런해지고, 공부하고, 똑똑해져야 개인의 삶을 살뜰하게 꾸려갈 수 있을것 같아요.

 

 

  우리는 아직도 너무 게으르고 순진하고 무지하다. .... 금융관련 사건의 피해는 우리가 고스란히 지고 있다. 그런데 몰랐다는 이유만으로 그저 내 탓이요, 하는 게 잘하는 짓일까. 우리가 아파서 의사를 찾아가면 의사는 병과 치료방법을 설명해 줘야 한다. 그것은 의사로서의 의무이다. 니얼 퍼거슨 교수의 이야기를 다시 들어보자. "오늘날 많은 사람이 금융계의 윤리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은행, 헤지펀드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도덕관념이 전혀 없고 온갖 수단을 동원해 오로지 돈을 버는 데만 집중한다고요. 의사들이 하는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금융권에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것이 없어요. 은행가가 되는 사람들은 공식적인 선서를 하지 않습니다. 문제가 있죠." (p.185~186)

 

 

 

 

 

Part 3. 나도 모르게 지갑이 털리는 소비 마케팅의 비밀

 

 

 

  Part 3 에서는 - 어릴 때부터 우리는 유혹당한다/ 쇼핑할 때 여자는 훨씬 감정적이다/ 보안용 CCTV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 '사고싶다'고 느끼면 '필요한' 것 같다/ 소비는 불안에서 시작된다/ 필요하지 않아도 친구가 사면 나도 산다/ 과소비는 상처받은 마음이다/ 자존감이 낮으면 더 많은 돈을 쓴다 - 의 소주제로 전개됩니다. 

 나의 지갑을 털어가는 소비마케팅도 흥미로웠고, 소비성향 자체가 아주 어릴 때부터 미디어에 노출되면서 학습되어버린다는 것도 공감이 갑니다. 미국 월트디즈니 사와 장난감 회사가 만들어 낸 어린이 시장 '공주시장' 이 떠오르네요. 마이클 샌델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 보면 광고로 오염된 세상에 대해 많이 나오는데 샌델의 책도 내용이 좋습니다. 우리 블로그만 봐도 그렇죠. 광고성 댓글 싫어하는데 정말 많이 달리잖아요. 지우면 달리고 지우면 달리고 알고 보면 사람이 아니라 프로그램이 달고 있으니 짜증은 나지만 화를 낼 수도 없고 참. 예의없는 광고는 오염이라는 말이 적절하죠.

 이 파트를 읽으면서 많이 찔리기도 하고, 내가 그래서 그랬군, 지름신은 쿨스팟의 활성화구나 감탄사 연발 ㅋㅋㅋ많이들 공감하실거에요.

정말로 행복하고 싶다면 소비에서 행복을 찾지말고 주변사람들과의 관계맺음에서 답을 찾으라는 부분에 공감했습니다. 강신주의 <철학이 필요한 시간>에서도 누차 언급하죠. 쇼핑이나 커피숍에 앉아 외로움의 종기를 핥으며 값싼 위로를 사지말고, 근본적인 해결을 하라고, 주변사람들과 소통하고, 자기 자신을 이따금씩 대면해야 한다구요. '돈이 행복의 전부가 아니다'라는 이 유치한 말을 저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마케팅의 꿈은 소비자의 무의식을 점령하고 마음대로 조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꿈의 정점은 바로 '브랜드'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브랜드라는 것은 어떻게 우리를 조종하는지 남녀의 만남으로 표현해 보자. 어떤 파티에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처음 만났다고 가정해보자. 먼저 마케팅은 '직접 자신을 알리는 것'이다. 남자가 여자에게 다가가 "나는 돈이 많아"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마케팅이다. PR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 자신을 알리는 것이다. 친구가 여자에게 다가가 "나를 믿어. 그는 돈이 많대"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광고는 지속적으로 "나는 돈이 많아"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떠드는 것이다. 그러나 브랜드는 말하지 않아도 상대방이 자신을 먼저 알아보는 것이다. "내 생각에 당신은 돈이 많은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브랜드를 살 때면 우리의 뇌에는 아주 특별한 변화가 일어난다고 한다.마틴 린드스트롬은 이를 '쿨 스팟'의 활성화라고 말한다. ...... 우리가 브랜드를 보면 일단 시각적으로 알게 된 정보가 뉴런으로 전달되고, 시냅스를 거치고 마지막에 쿨 스팟에 도달해 이를 활성화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브랜드만 보면 지름신이 내려 꼭 사야만 하는 이유이다. 우리의 뇌는 브랜드를 통해 세상에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P.227)

 

 

  과소비를 부추기는 또 다른 요인은 바로 카드이다. 소비를 부추기는 우리 안의 감정이 카드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카드를 쓸 때 우리 뇌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그 해답이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현금을 쓰면 뇌는 고통을 느낀다. 자신에게 있던 중요한 자산이 손실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드를 쓰면 뇌에서 고통을 느끼는 중추신경이 마비가 된다. 현금의 경우 돈을 일방적으로 주는 것이지만, 카드는 쓸 때는 계산하면서 카드라는 물건을 줬다가 다시 돌려받기 때문에 우리 뇌가 착각하여 손실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뇌 활동을 보여주는 기능성 자기공명영상MRI을 보면 현금보다 카드로 낼 때 고통이 덜하다고 한다. 결국 그만큼 죄책감도 덜해서 자꾸만 쓰게 되는 것이다. (P.249~250)

 

  자본주의 사회에서 쇼핑은 패배가 예정된 게임이다.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를 살면서 정말로 행복하고 싶다면, 소비에서 행복을 찾기 보다는 내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맺음에서 답을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내 안의 감정을 관찰하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개선에서 스스로의 자존감을 회복하는 과정, 그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P.275)

 

 

 

 

 

Part 4. 위기의 자본주의를 구할 아이디어는 있는가

 

 
 
  Part 4 에서는 금융위기는 반복해서 일어난다/ 노동만이 최상의 가치다 -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쉬지 않고 일해도 왜 가난한다 -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 실업률을 낮출 정부의 개입을 권하다 - 케인스의 거시경제학/ 정부가 커지면 비용도 늘어난다 - 하이에크의 신자유주의를 다룹니다.

  경제학의 패러다임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경제학자들이 나옵니다. 그들의 패러다임을 다루면서 과연 위기의 자본주의를 구제할 아이디어는 어디에 있는지 고찰해나갑니다. 저는 하이에크는 잘 몰랐는데 이 책 읽으면서 알게 되었어요. 아담 스미스와 마르크스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도 바로 잡습니다. 이 부분에서 또 한가지 드는 생각이. 뭐든지 원작자의 텍스트와 원작자의 말과 행동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이요. 누군가를 판단할 때 한 다리 건너서 그 정보를 들으면 일단 그 정보는 가공되어지니까요. 저는 원작자의 텍스트를 보아도 이게 콩인가 팥인가 잘 모르니, 믿을 만한 텍스트 저자를 고르는 편이고, '이런 의견도 있고 저런 의견도 있구나, 나는 그것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해야겠다' 라는 패턴을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그래도 아직 부족하긴 하죠. 여튼, 지식이 얕은 저한테는 아담 스미스는 하면 '보이지 않는 손'이고, 브루주아 편드는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편견이 있었던거죠. 아담 스미스와 마르크스에 대한 편견을 불식시키고, 그들의 사상에 뿌리한 인간에 대한 애정도 다룹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인간에 대한 애정, 삶에 대한 애정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결국 위기의 자본주의를 구할 수 있는 것도 인간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한다고 결론내고 있습니다.

 

 아담 스미스의 사상이 시작된 첫 번째 지점은 바로 '사람들의 본성과 행동'에 대한 것이었다. 그간 꾸준히 이 분야를 연구해 온 그는 결과물을 모아 <도덕감정론>이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이 책은 아주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이다. 그런데 어떻게 인간이 이기심을 누르고 도덕적인 판단을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 아담 스미스는 기본적으로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이고, 사회적 존재로서 도덕적인 행동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것은 마음 속에 우리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는 '공명정대한 관찰자'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관찰자가 이기심을 잘 조절해서 우리를 도덕적으로 행동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서 폭넓은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아담 스미스는 순식간에 유명인이 되었다. (P.290)

 

  가난한 자들에게 많은 연민을 느끼던 스미스는 그들을 돕는 최선의 길은 자유시장 경제라고 생각했고, 이를 강력하게 옹호한 것이다. 또한 인간은 이기적이지만, 우리의 마음 속에 서로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있기 때문에 그 이기적인 행동도 공공의 이익으로 전환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자본주의'란 말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이상은 '인간의 도덕적 범위 내에서 완저히 자유로운 시장체제'로 요약할 수 있다. (P.299)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을 통해 꿈꾸고,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통해 펼쳤던 이상적인 사회는 결코 지금의 모습은 아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공통점은 사상의 시작점이 바로 '인간에 대한 사랑'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바탕으로 '어떻게 하면 모든 사람이 잘 살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어쩌면 어렵고 복잡한 용어와 수식어가 난무하는 현대 경제학과는 사고의 시작부터 다르다. 어떻게 보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바로 이러한 부분이다. 경제를 보는 것이 아니고, 돈을 보는 것이 아니고, 분배의 시스템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봐야 한다는 것. 그래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고통을 생각하고, 그것을 덜어주기 위한 따뜻한 마음에서부터 우리의 경제를 다시 보고 재구축해 가야 하는 것이다. (P.318)

 

 

 

 

 

 


Part 5. 복지자본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Part. 5에서는 자본주의와 복지가 함께 가야하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국민소득이 오르면 내 소득도 오른다?/ '복지=분배'는 오해다/ 복지는 창의성의 원천이다/ 시장도 정부도 아닌 국민이 주인이다 - 의 소주제로 전개됩니다.

 자본주의가 지닌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소득의 불균형과 그에 따른 불평등입니다. 이 책에서는 복지를 '공동구매'라고 표현합니다. 혼자 하려고 하면 비싸고 부담스럽지만, 공동구매하게 되면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죠. 뒷표지에 일반인들의 책 서평이 실려있는데, 마음에 드는 서평 하나 인용할게요. " 어조는 차분하지만 메시지는 강력하다. 한국 천민자본주의의 민낯을 드러내고 복지를 모럴해저드로 치부하거나 동정심으로 해결하기를 종용하는데 대해 논파하고 있습니다. 복지가 궁극적으로 국가경쟁력의 기반이 됨을 논리적으로 주장하네요."

 

 전문가들은 자본주의의 현 단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가난한 사람들을 양산하는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근로자를 양산하는 시스템이 아니라요."

- 데이비드 케이 존스턴 (미국 저널리스트)

  "윌스트리트 시위는 금융위기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실업률이 9%에 달하는 심각한 위기가 일어났는데 그 누구도 벌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죠. 아무도 교수형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장기간 감옥에 들어간 사람이 한 명도 없어요."

- 라구람 라잔 (미국 시카고 대학교 경영대학원 교수)

  "중요한 점은 금융계의 도덕성 결여입니다. 예전과 비교할 때 확실히 그렇습니다. 어떤 산업이든 어느 정도의 윤리의 틀이 필요합니다. 금융은 특히 더 그렇죠." - 니얼 퍼거슨 (미국 하버드 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P.354)

 

  맬더스는 이렇게 말했다. '가난한 자의 주머니를 채워라. 그러면 소비가 촉진된다.'

가난한 사람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적인 비용이 많이 들게 되므로, 방치하는 만큼 더 큰 부메랑이 되어 모두를 힘들게 할 거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복지를하는 것이 더 경제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복지 얘기가 나오면 우리는 으레 도덕성을 부추기고, 동정심을 가지라는 결론으로 끝을 맺곤 한다. 가난한 사람들을 어떻게 그냥 두냐고, 같이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그것이 바로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냐고. 하지만 사실상 복지 문제는 그저 동정심에 기대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오리혀 복지를 해야만 자본주의가 붕괴되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 저널리스트인 데이비드 케이 존스터의 이야기다. "빈곤은 자유재지만 매우 비쌉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있으면 돈이 많이 들어요. 세금을 내지 않고 세금을 받기만 하죠. 복지의 목적은 사람들이 힘든 시기를 지나서 생산적이 되도록 돕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일자리가 있어야 하죠." 우리가 해야 할 복지는 '퍼주기식 복지'가 아니다.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생산적인 복지이며 약자들이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건강한 복지이며 약자들이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건강한 복지다. 이런 방법을 통해 소비가 촉진되고, 자본주의는 활력을 되찾을 수 있다. 복지와 성장을 서로 상충하는 개념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해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부, 그리고 엄청난 성장력이라는 장점을 고스란히 유지시키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복지라는 대안을 생각할 수 밖에 없다.

(P.374)

 

  인류 역사상 등장했던 그 어떤 체제도 자본주의를 이기지 못했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지금껏 막대한 인류의 부를 만들어냈던 근본적인 동력이자 시스템이 되어왔다. 문제는 '누구를 위한' 자본주의가 되어야 하느냐는 점이다. 지금까지 자본주의는 자본가, 은행, 정부를 위한 자본주의였다. 자본주으의 혜택은 이제 99%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돌아갈 때가 되었다.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그 강력한 성장엔진을 우리 모두를 위해 나누어 써야 할 때가 된 것이다. 낙오자가 될 수 있다는 사람들의 불안감을 해소하고 소득의 불균형을 해결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더 행복한 자본주의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 모습이 바로 가장 영속가능한 자본주의는 아닐까, 하는 제언을 감히 해본다. (마지막 장)

 

 

 

 

  

 

이 책은 간디가 말한

일곱가지 악덕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1. 철학없는 정치

2. 도덕 없는 경제

3. 노동 없는 부

4. 인격 없는 교육

5. 인간성 없는 과학

6. 윤리 없는 쾌락

7. 헌신 없는 종교

 

 

저한테는 참 좋은 책이라 한 번 더 읽고 싶은 책이에요 :)

어아기와 정민이가 살게 될 세상은 어떤 세상일지 잠시 생각해봅니다.

이제 EBS 교양, 다큐 프로그램은 공공기록물로 영구보존 된다네요.

바람직하죠? :D

이렇게 좋은 프로그램, 좋은 책을 만든 분들 응원하고 싶네요.

앞으로도 좋은 프로그램, 좋은 책 많이 만들어 주시길 바랄게요 :D

 

내가 살기 위해 돈을 버는 것인지,

돈을 벌기 위해 사는 것인지 햇갈리나요?

숲 속의 나무 사이에서 빠져나와

산 전체와 숲이 돌아가는 원리를 한 번 바라보시는 건 어떨까요?

EBS 다큐프라임, <자본주의> 추천합니다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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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 지금+여기 3
오찬호 지음 / 개마고원 / 2013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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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패션도 마찬가지지만,

그 사람이 듣는 음악의 목록,

그 사람의 서재에 꽂힌 책의 제목들,

지하철에서 그가 들고 있는 책제목이 그 사람의 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가 수혈하는 음악과 책이야말로 그를 형성하는 일부로 흘러들어가면 그건 당연한 것이긴 한데,

어찌보면 이것도 지나치게 타인의 시선을 신경쓰는게 아닐까 생각하니 좀 그렇긴 하네.

최근 내가 잡는 책들은 일련의 경향성을 띠는가 하면, 함께 있으면 어색.

가령 <우리는 왜 불평등을 감수하는가>,<불평등의 대가>,<세계의 절반은 왜 굶주리는가> 옆에

<파는 것이 인간이다>,<내 생의 첫번째 재무설계>가 나란히 꽂혀있다든가 그런 형국.

몇 권 안되는데도 올 상반기 안에 다 읽겠나 싶다.

지난 토요일 이동시간을 이용해서 다 읽은 책에 대해 기록을 남기려고 한다.

 

지난 책 리뷰에서

이순신장군은 논밭을 갈아 군자금을 만들었고 스물세번 싸워 스물세번 이겼다라며,

정신차리고 똑바로 살자, 시장에 내팽개쳐진 개인은 자신만의 경쟁력을 가져야 한다는 등의 말을 지껄였는데.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 왜 이렇게 얼굴이 화끈거리나.

사람이 어제 한 말 조차도 이렇게 부족하게 느껴질 수가 없다는 생각을 다시금 한다.

친구를 만나서 이야기하다가 배움을 멈추는 순간 늙는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좁은 자기만의 경험을 온 세상인 냥 알고, 

눈을 감고 귀를 막은 채 늙어버린 노인이 가진 투표권이 얼마나 끔찍한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한편으로는 젊어서 살아온 시대의 경험이 만드는 사고의 한계와 그 안타까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여튼, 우리는 배움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는 결론.

좋은 도서관이 있는 동네에서 자녀를 양육해야 한다는 우리스타일의 맹모삼천지교로 결론.

 

 

 

 아프리카에 사는 '스프링 폭스' 라는 산양들은 가끔씩 집단 전체가 맹렬히 달리다가 절벽에서 함께 떨어져 죽는다. 이 양들은 수천 마리가 함께 살다보니, 앞쪽의 무리가 먼저 지나가며 풀을 먹어버리면 뒤쪽의 무리들이 먹을 것이 없게 된다. 그래서 뒤의 양들은 자꾸만 앞으로 밀고, 앞에 있는 양들은 점점 밀리다가 기어코 달리기 시작한다. 그러면 뒤의 양들은 비어진 공간에서 천천히 풀을 뜯어먹으면 되는데도 집단으로부터 떨이지기 두려워 악착같이 따라 뛴다. 결국 앞의 양이 미니까 뛰고, 뒤의 양은 앞의 양이 뛰니까 따라 뛰는 것이다. 그렇게 왜 뛰는지, 어디로 뛰는지 모르고 그저 서로 달리다가 절벽을 만나면 함께 죽는 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 이십대의 모습도 이 산양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지만 우리는 스프링폭스가 아니다. 멈춰야 할 이유를 안다면 멈추지 않을 이유가 없다. 우리가 그 '레일'을 굳이 그렇게 폭주 기관차처럼 달려야만 하는가. 우리는 서로를 밀어내야만 할 이유도 없고, 악착같이 따라붙어야만 할 이유도 없다. 우리가 스프링폭스가 아닌 이상 무턱대고 내달리기만 할 게 아니라 달리는 이유도 따져볼 수 있어야 한다. 아무리 달리더라도 '양대가리' 소리는 듣지 말아야 할 것 아닌가.

- 머리말 <지금 이십대가 위험하다> 중 발췌

 

 

이 책은 지난달에 나온 신간인데, 아주 잘 읽은 책이고

실패를 경험하고 있거나 좌절하고 있는 20대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해주고 싶다.

언젠가 내가 자기계발서를 몹시 싫어한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책장에는 엄마가 사온 <여자의 모든 인생은 20대에 결정된다>라는 책이 두 권이나 있다.

유수연의 <20대, 나만의 무대를 세워라>라는 책도 있고.

내 책장에 두고 싶지 않아서 다른방으로 다 빼버렸다.

작년에 김미경의 강연도 티비로 보고, 엄마는 나에게 유수연의 책을 읽으라고 해서 읽었는데,

나는 유수연의 책을 읽고 이제 더 이상 자기계발서는 읽고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작가들에게 개인적인 감정은 없고, 나에게 책을 추천해준 이들도 내가 몹시 좋아하는 사람들이긴 하나,

나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매우 싫어하고, <멈추면 보이는 것들> 이런거 보면 속상하다.

연인과의 결별 후에는 법륜스님의 책이 참 도움이 되긴하던데,

취업이나 직장문제에 관해서 자기계발서를 비롯한 힐링도서들은

솔직히 말해서 다 퍽유♡ 를 날리고 싶다.

그래서 어.쩌.라.고?

조선시대 기우제 지내는 것도 아니고, 어줍짢은 위로말고 현실적인 대안은 없냐고.

아, 나 지금 상당히 날카롭게 보이겠구나, 가끔 발현되는 날카로움.

 

 

 

 

자기계발서가 필요한 시점이 분명이 있다.

자기계발서의 장점도 안다.

긍정적인 말과 자기 최면이 중요한 것도 안다.

개인의 노력이 부족해서 발생하는 문제도 분명히 있다.

 

다만 전체적인 현상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근시안적인 시야맹목적인 믿음으로 시시포스의 바위 굴리기를 계속 시킨다는거.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모든 일이 잘 풀린다고 나도 한때 주문처럼 외고 다녔는데, 사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일들을 내가 그렇게 생각한 것 같다.

 주술을 믿는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이런 당연지사를 입으로 반복해대는 접근법이 갖는 명백한 한계에 대해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P.33).

긍정적인 기본 마인드를 갖는 것이야 당연하지만, 긍정과 노력이 무슨 엄청난 필살기는 아니지 않나.

 

우리가 마오쩌뚱도 아니고.

대약진 운동 머리카락으로 용광로 만들고,

의화단이 권법 연마해서 조총 물리치는 소리하고있네.

 

  아무리 봐도 지금의 자기계발 현상에는 '이렇게 하라!'는 주문만 있지 그로 인해 '달라진 결과'가 없다. 그렇게도 자기계발이 현 상황을 극복할 유일한 진리라면, 그래서 여기에 한 개인이 '예스'라고 응답했다면 그로 인해 조직에 적응이 되든지, 자아가 구체적으로 치료되든지, 아니면 평생에 걸쳐 '즐길' 어떤 기술이라도 연마되든지 해야 할 텐데, 지금 도대체 어떤 결과가 이십대들에게 있단 말인가. 오히랴 지금의 청년들은 그런 결과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걸 특성으로 갖고 있지 않은가.

..... 문제는 자기계발과 성공의 간격이 이처럼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에' 강조되는 것은 늘 자기계발이라는 점이다.

  즉, 문제의 극복이 가능하다는 자기계발의 논리가 사실은 평생 '극복만 주문' 받는 개인을 만들어버린다. 이십대는 불안하니까 자기계발 담론을 받아들여 위기를 넘어서려 하지만, 불행히도 그 불안한 상태는 계속 유지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도돌이표처럼 갇혀버리는 것이다. 모두가 이 자기계발의 수행에 동참하면 그 어마어마한 참여자들 덕택에 성공하는 하나의' 사례는 또 발견될 것이고, 이는 '가능성'의 객관적 증거로 활용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희박한 성공의 가능성이 표면화될 때,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수천수만의 사례는 '노력부족'이라는 말로 간단하게 정리 처분된다. 이렇게 좌절하는 자아가 많아질 수록 자기계발서 시장은 더커진다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 노골적으로 말해, 자기계발서를 읽었다는 건 '낚였다!'의 다른 말인 것이다. (p.33)

 

 

영화 <내 깡패같은 애인>의 한 장면

 

오동철: 너 아직도 노냐?

한세진: 예? 노는 게 아니라.....

오동철: 요새, 취직하기도 힘들다는데.... 불황 아니냐, 불황.

우리나라 백수 애들은 착해요. 첼레비전에서 보니까 프랑스 백스애들은 일자리 달라고 다 때려 부수고 개지랄을 떨던데,

우리나라 백수 애들은 다 지탓인줄 알아요. 가 못나서 그런 줄 알고,

아유~ 새끼들, 착한건지. 멍청한 건지. 다 정부가 잘못해서 그런건데~~

야! 너도 너 욕하고 그러지마. 취직 안 된다고.

너 탓이 아니니까. 당당하게 살어! 힘내 씨발!

(p.50)

 

 

자기계발서를 읽는게 나쁘다는게 아니라, 이런 악순환이 가져오는 결과물이 소름끼친다.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나는 다를거라고 생각하였지만 나에게도 이런 모습이 조금 있다는 걸  깨닫고나서 씁쓸했다.

 

 

연세대는 서강대를, 서강대는 성균관대를, 성균관대는 중앙대를,

중앙대는 세종대를, 세종대는 서경대를, 서경대는 안양대를, 안양대는 성결대를 '무시'한다.

행여나 후자가 전자를 '비슷한 대학'으로 엮기라도 할라치면 그 순간 전자들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고 난리가 난다.

그렇게 4년제는 다시 2년제를, 2년제는 또 같은 기준에 근거해서 자기들 내부를 쪼개고 줄세운다.

모두가 이렇게 같은 논리를 가지고 가해자 역할을 하며,

또 그래서 당연히 피해자 신분이 되는 상황에도 매우 능동적으로 기여하는 셈이다. (p.86)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p.87~)

 

첫째: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지기

 

  자기계발의 논리로 무장하게 될 때, 개인은 어떤 성향을 보여주게 될까? 먼저 혹독한 현실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은 속출하고 있지만, 그런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시중에 출간된 자기계발서들을 얼핏 넘겨만 보더라도, 이 책들이 자신의 고통은 스스로 이겨내야 하는 것임을 강요하고 있단 걸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내 고통이 세상 누구나 겪는 성장통 정도고 간주되는 판에, 남의 고통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생길까? 이렇게 자신의 고통도 늘 스스로 참아야 하는 것으로 강요되는데, 남의 고통까지 왜 신경을 써줘야 한단 말인가? '이런 철학'을 개인이 가지게 되면 그는 특정한 시각을 갖게 된다. 힘들어 죽겠다며 하소연하는 사람들에게 "어쨋든 자기문제지, 그것도 못 받아들여? 너보다 더 힘든 사람도 많아!"라고 반응하게 된다. "정말 힘들겠구나"하는 공감대 형성은 당연히 어려워진다. ...... 개인이 사회적 원인으로 고통 받는 상황이 늘고 있다는 게 현재 이십대가 처한 상황희 한 특징이라면, 이를 사회적 원인에서 비롯된 문제로 이해하지 않는 것 역시 지금 이십대가 지닌 특징의 하나로 보인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공감할 이유를 찾지 못하는 것은, 어쨋든 모든 건 자기 할 탓이라는 자기계발 논리에 길들여진 결과이다. 자기계발서는 측정할 수 없는 것을 측정하고자 했다. 고통이란, 한 개인이 특정한 현상에 반응하는 지극히 주관적인 감정상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자기계발서는 고통을 객관적으로 비교 가능한 것으로 해석한다. 즉, A가 아파할 때 그보다 더 심한 고통을 이겨낸 B가 있다면 A의 고통은 참아야되고, 이겨내야 하고, 사회적 요인과 무관한 것이 되어버린다. .... 자기계발서의 저자들은 타인의 상황을 늘 자기 기준으로 평가하곤 한다. 그 근거로서 저자 자신, 혹은 유명 인사가 주인공으로 설정된다. 당연히 이 주인공이 겪는 고통의 총량은 무지막지하다. 고생도 그런 고생이 없다. 그런데 성공한다. ......그렇게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고 꿈을 이룬 주인공들을 접할 때마다, 이십대들은 십중팔구 '지금 내가 힘든 건 힘든 축에도 못 끼는 구나' 하는 자기반성을 하게 된다. 취업준비 어렵다는 하소연은 한순간에 '입 닥쳐야 할 징징거림'이 되다. 이는 자연스레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능력을 저하시키나. 그렇게 고통의 비교법칙이 이십대를 통제한다.

 

  이렇게 이십대들에게 개인의 고통은 그보다 더한 고통을 이겨낸 누군가를 본받으면서 마땅히 참아야 할 것이 되어버렸다. 흥미로운건, 앞선 장에 등장한 이십대들은 한편으론 취업을 못하고 있는 자신들의 고통을 알아달라고 호소하면서 또 한편으론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 요구에 반대한다는 점이다. 이런 이율배반적이 또 어딨는가.

 그러나 여기서 두 가지 지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먼저, 이들의 호소는 자신들의 고통에 '아무도' 반응해 주지 않기에 나타난 절규나 다름없다. 아무도 이십대들의 고통을 이해해주지 않기 때문에, 이들도 아무의 고통도 이해할 수 없게 돼버린 셈이다. 자신을 아무도 역지사지해주지 않는데, 자신이 어찌 역지사지의 입장을 가질 이유가 있겠는가. 또한 이들은 고통의 비교 법칙을 그대로 적용했을 뿐이다. 취업대란이란 말이 상징하듯, 이십대들이 마주하게 되는 고통 자체가 객관적으로 엄청 늘어나 있다. 신입생 때부터 해야될 일은 상상을 초월하며, 게다가 보상마저 확실하지 않으니 심신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런 이들이 비정규직의 목소리에 공감할 여유가 있을까? 이리저리 계산기를 두들겨 보아도 '나만큼' 힘들진 않은 것 같다고 느낀단 말이다.

 

둘째: 편견의 확대재생산

 

  고통에 대한 공감력이 떨어지면 필연적으로 특정 대상에 대한 기존의 편견이 더 강화된다. 기실 '공감'이란 단지 함께 느낀다는 점에서 중요한 게 아니라, 이를 시작으로 한 개인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의 오류를 발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권장된다. 그래서 타인의 상황을 깊고 넓게 이해할 수록 당연히 타인을 섣불리 이렇다 저렇다 재단할 수 없는 이유를 발견하게 될 가능서이 높아진다. 바로 이렇게 되는 걸 일컬어 '공감대가 넓다'고 하지 않는가. ...... 이런 경험이 부족할 경우, 기존의 고정관념이 이런저런 검증도 없이 신념으로 굳어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어떤 대상을 제대로 모를 때 우리는 사회적으로 널리 퍼진 고정관념에 의존한 판단을 하기 십상인 탓이다. 예를 들어, '장애인의 성욕' 문제가 그렇다고 할 수 있다.

 

.... 아무리 아름다운 문구로 치장된, 그래서 읽기에 한없이 편안하게 쓰였다 할지라도 그것이 자기계발서라면 어떤 책이든 패자에 대한 편견을 강화하는 내용이 넘쳐난다. 그 사람이 취업하지 못한 건 이 땨문이다, 그런 태도로 어떻게 승진할 생각을 한냐, 저렇게 사니 살을 못빼지.... 하는 식으로 실패의 원인을 구국절절하게, 하지만 근시안적으로만 제시한다. 그만큼 패자에 대한 편견들은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다. 앞으로 확인하게 될 이십대들의 '일상'은 바로 이런 편견이 내재화된 결과들이다. 이는 가난한 것도, '우울한 것도 다 자기 잘못인데 왜 그걸 사회가 관심 가져야 하냐는 식의 반문과도 직결된다.

 

 

셋째: 주어진 기존의 길만 맹목적으로 따라가기

 

  패자에 대한 편견의 이면에 자리하고 있는 건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 두려움이 클수록 비교적 안전한 '기존의 길'에 대한 선호 역시 커진다. 더 나아가선 그 길만이 가장 안전하다고 믿고, 다른길은 거들떠보지도 않게 된다. 그리하여 '몇 가지' 길만이 당연한 길이 되고, 그 외의 길을 걷는다는 건 다 쓸데없는 짓이 되고 만다. 이런 생각이 '그 외의 길'에 대한 부정적 편견을 만들어 내는 건 시간문제다. 다름에 대한 거부감이 날카로워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는 이십대가 보여주는 모습이면서, 그들이 받는 압박감이 더 커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십대는 누구도 자신들에게 공감해주지 않는 걸, 그리고 다른 이들이 자신의 모습을 온갖 편견으로 재단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현재의 자기 모습, 이를테면 수능성적이나 학교 이름만 가지고 자신을 손쉽게 판단해버리는 편견이 난무한다는 것을 잘 알기에, 이들은 앞으로의 모습, 이를테면 '번듯한 취업' 같은 사회적 성공 여부에 오로지 목을 맨다. 개인의 고통은 어디에다 하소연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극복해야 하는 걸로 생각하는 게 속편하다. 취업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 혹은 정규직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 그 자체보다 자신의 삶이 실패한 것으로 규정되고 온갖 낙인이 박히는 것이 더 두려운 일이다.

 

 타인에 대한 공감이 부족하고, 자기 편견을 강화해온 이십대들은 주어진 길만을 가는 데 익숙해진다. 문제는 자신이 추구하는 길만을 정도正道라 이해하고, 이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자체에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것이다. ..... 경쟁이 내면화된 세상에서 개인의 공동체의식은 약화될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는 사회학자로서 뱔 문제없이 할 수 있는 발언이다. 하지만 학생들 중에는 이를 학문적 경향으로 이해해줄 수 없다는 이들이 적잖다. 그 연장선상에서 '모든 것의 책임은 개인에게 있다' '열심히만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 등의 논의를 비판해본다는 생각을 잘 하지 못한다. 그래서 경쟁, 시장질서, 나아가 자본주의라는 체제를 조금이라도 비판하게 되면 일반적인 논쟁에서도 더 예민하게 반응하며 비아냥거리기 일쑤다. 마치 '금기의 말'을 들었다는 듯이.

 

 이러한 다름에 대한 거부감은 이십대들이 내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옥죈다. 자기 스스로 '달라진다'는 것을 두려워 한다는 듯이며, 그만큼 정해진 '레일' 위에 안착하겠다는 의지를 굳건히 한다. 이런 경향 자체가 시대적 특징이 되어 '당연한 것' '어쩔 수 없는 것' 으로 개인에게 강요된다. 그 결과 개인은 앞뒤 가리지 않고 레일 위를 달리기 위해 해야 될 자기계발을 찾고 있으며, 또 그런 자기계발의 일부 성공적인 결과를 보고 부러워하면서 더 적극적인 수행을 다짐하게 된다. 결국 이 모든 과정은 순환적으로 이어지고, 이로 말미암아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지고, 그로 인해 고정관념이 강화되는 현상은 더 가속된다. 이런 환경에 노출된 이십대는 당연히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이'경직' 될 수밖에 없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게 보여진 20대의 자화상 부분만 많이 옮기고 나머지는 요약하는 식으로 정리해야겠다.

이러다가는 책 한권을 다 옮길 판이네, 그대가 직접 읽어보심이 좋다.

 

 

 

미래도 희망적이지 않다(P.187~)

- 20대가 이런 얼굴을 가지게 된 원인에 대해 말하고 있음.

 

원인1: IMF의 추억

유년시절 IMF를 겪은 우리세대가 경쟁에서 실패했을 때 겪게 될 두려움은 성장하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음.

 

원인2: 경영학과의 사회학

모든것을 투입과 산출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의 팽배화라고 할까.

 

원인3: before/after의 덫

성형 열풍과도 같은 지금은 고통스럽지만 취업에 성공하면 달라질거야.

 

 

자기계발을 권하는 사회를 치유하자!

원래 그런 세상은 없다, 긍정과 희망을 논하기 전에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

- 기회는 균등한가?

- 과정은 공정한가?

- 결과는 정의로운가?

 

 

 

내가 더 읽어야 할 저자들

- 마이클 샌델, 지그문트 바우먼

 

 

나는 이 책이 노력하지 않는 사람의 합리화 수단이 되어서도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자기계발서를 맹목적으로 의지하며 시시포스의 바위굴리기를 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이미 의심하고 있지 않은가?

그대가 가진 불안은 그대로 남아있다는 걸 왜 못 본 척하는가?

 

 

이 책을 읽을 무렵,

지인 두세명을 만나서 여러 이야기를 하였는데,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된다.

 

학교교육의 무용론에 대해서도 생각했고,

대학은 교수가 가르쳐 주는 곳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공부하는 곳이라는 것.

좋은 도서관이 있는 동네에 살아야 한다는 것.

내 아이가 자라서 자기계발서를 읽게 된다면 연계된 사회학 책도 함께 던져줘야 한다는 것.

그리고 포스팅 하면서

전화 통화 버튼을 누를까 말까...

고민하게 만드는 사람들의 얼굴이 계속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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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순간의 인문학
한귀은 지음 / 한빛비즈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국어교육과 교수님이 쓰신 책인데, 좋더라.

마흔이 넘으면 이런 글을 쓸 수 있는걸까?

 

 

 

 

<모든 순간의 인문학>

01. 사랑이 사유로 반짝이는 순간

02. 나에게서 낯선 행복을 발견하는 순간

03. 고독이 명랑해지는 순간

04. 상처가 이야기로 피어나는 순간

05. 우리가 기꺼이 환대할 순간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인문학을 앓는다

.... 그러므로 인문학은 '앓는' 것이 될 수 있다. 앓고 나면 우리는 한층 더 성숙해진다.

앓는다는 건 단지 고통의 차원이 아니다. 그 앓는 시간을 지나 우리는 자신과 세상을 더 깊고 투명하게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지혜와 지식이 있는 것은 항상 질병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는 맹자의 말씀도,

"'아름다움'의 원래 표기는 '앓음다움'이었다"는 소설가 박상륭의 설명도 이와 같은 맥락일 것이다. (p.6 - 왜 인문학을 앓는다고 할까)

 

지적이면서 감성적인 남녀가 만나 대화를 나눌 때 생기는 인문학적 감성의 시너지 효과는 실로 대단하다.

둘 사이에는 지적, 감성적 긴장 뿐만 아니라 오묘한 성적 긴장까지 가세되어 더욱 매혹적인 풍경을 만들어낸다.

물론 그 풍경은 당사자들의 내면의 풍경이다. 제삼자들은 그들의 모습에 아예 관심이 없거나, 만약 그들의 대화를 엿듣게 되기라고 한다면

그 지적, 감상적 과잉에 혀를 내두를지도 모른다. 그러거나 말거나, 중요한 것은 내면풍경.

둘이 연인이면 더 좋겠지만 그런 행운을 가진 이는 퍽 드물다.

간헐적이라도, 일회적이라도, 그런 만남과 대화를 가져본 경험이 있다면 그 시간에 대한 그리움과 후유증에 대해서 잘 알 것이다.

그것은 마치 흠뻑 사랑해보지도 못하고 헤어진 연인을 생각할 때와 비슷해서, 꼭 물을 들이킬 필요가 없을 정도의 애매한 갈증을 남긴다.

그 애매한 갈증이 인문학에 더 가까이 가게 함은 물론이다. (.p.8 - 인문학 딜레탕트가 되자)





 

남자들이 깜짝 놀랄만한 시

... 바람난 여자가 진실하기까지 하다면 그녀는 정말 팜 파탈이 될 수 밖에 없다.

바람난 여자가, 자신은 바람이 나지 않았다고 오직 너밖에 없다고 말한다면 얼마나 추한가?

가장 추한 것은 사악한 것도 아니고 포악하거나 잔인하거나 잔학한 것도 아니고 비열한 것이다.

바람난 여자가 비열할 때 가장 추하고, 바람난 여자가 진실할 때 가장 위험하다. (p.91)







착한 여자, 존재 자체를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자

... 착한 여자와 착한 남자만이 진짜의 것을 느끼고 향유한다.

바디우의 말대로 '진리'를 만들 수 있고, 크리스테바의 말대로 '실물'을 느낄 수 있고, 라캉이 말한 욕망 이상의 욕망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존재 자체를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결국 착한 사람이란 상징이나 기호, 이미지가 아닌 실재의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렇게 사물과 실재를 수용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행복할 것이다.

'너를 사랑한다'고 할 때 너에 대해 내가 갖고 있는 이미지의 환각이 아니라 실감으로 만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p.113)

 

 

 

 

 

헤어진 애인에게 이메일이 온다면

... 헤어진 애인은 안 만나는 것이 낫다.

만약 지금 다른 사람과 연애 중이라면 더욱 그렇다.

사랑은 신뢰 위에서만 강하게 지탱될 수 있다. 상대에 대한 신뢰, 그것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와 자기 사랑에 대한 신뢰, 그것을 저버려서는 안된다.

자신의 사랑을 고귀하고 일생일대의 절대적인 사건으로 맺음 짓고 싶다면 헤어진 애인과의 가벼운 촌극은 만들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또한 헤어진 애인에 대한 예의이기도 할 것이다. (p.172)

 

 

 

 

 

외롭고 선량한 사람들

나 말곤 다 남이다. 간혹 나 자신도 남처럼 느껴진다.

내가 나를 어찌 할 수 없다. 그것이 '타자'다.

남도 타자고, 내가 모르는 나 자신의 일부도 타자다.

이 중에서도 정말 내가 도저히 알 수 없는 어떤 큰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나에게 유언, 무언으로 명령을 내리면 그/그녀를 '대타자'라고 한다.

신은 대타자다. 그리고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자면 아버지도 대타자다.

그리고 나와 어떻게 해서도 하나가 될 수 없는, 내가 결코 동일시할 수 없는 존재를 ' 절대적 타자'라고 한다.

절대적 타자는 신비하고 비유적이다.

연인이 절대적 타자가 될 수 있는 건 그 때문이다.

연인은 그렇지 않은가. 신비하고 모호하고 언제나 나를 햇갈리게 한다.

타자들이 모인 세상은 삭막하거나 외롭거나 난해하거나 두려울 것 같지만, 또 그 때문에 재밌고 모험심도 생기고 예상치도 않은 황홀한 사건도 일어난다. (p.161)

 

'타자' 하면 떠오르는 철학자가 들뢰즈와 레비나스다.

둘은 타자에 대한 응대 혹은 환대라는 윤리적 철학을 정립했다.

들뢰즈는 타자란 각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세계를 인식하게 하는 조건이자 환경이라고 했고,

레비나스는 타자와 진정으로 만나는 일을 '얼굴의 현현'이라고 하면서 인간은 그 타자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들뢰즈나 레비나스는 '타자는 지옥이다'고 선언한 샤르트르와 전혀 다른 지점에 있는 것이다.

타자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이유이며, 살아감의 매혹이다. (p.165)

 

 

 

 

 

엄마, 나를 부탁해

 가족에게도 공동의 트라우마란 게 있다. 그리고 그 트라우마를 서로 치유해주고 쓰다듬어주는 가족은 좋은 가족이다.

모든 가족이 다 그렇지 않냐고 생각하겠지만, 실은 우리 주변의 많은 가족들이 그 공동의 트라우마를 모른척한다.

아예 그 트라우마를 드러내는 것 자체를 금기시하는 가족도 있다.

문제는 가족 중 한 사람은 트라우마를 치유해주고 치유하고 싶어 하는데 다른 한 사람은 트라우마를 모른척하려 하거나

트라우마를 드러내는 상대를 거부함으로써 또 다른 상처를 주는 경우다.

트라우마를 모른척 하는 것,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는 것은 '헹복한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행복한 가족 이데올로기가 행복을 막는 것이다. (p.209)

 

 

 

 

 

건강함이란 상처받을 수 있는 능력

'말들'은 죽음하고만 연관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대중에게 노출된 정치인, 연예인, 사업가 등을 쉽게 비난하고 평가한다.

언론이나 저널리스트, 대학교수, 비평가의 직함을 가진 사람들은 마치 현자나 판관인 양 행세한다.

그것이 논리적이라 하더라도 논리가 '사실'은 아니며,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 사실들의 결합은 왜곡된 '해석'을 낳을 수 있다.

그것이 소위 '진실'이라 하더라도 그 진실을 밝히는 태도나 행동이 윤리적이지 않을 경우 그 진실은 진실의 가중치를 가질 수 없다. (p.227)

 

 

 

 

 

최고의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어요

니체의 명언 중 명언은 '결혼은 위대한 대화'라는 말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이런 말이 나온다.

"결혼은 긴 대화다. 결혼하기 전에 자문해보라, 나는 이 여자/남자와 늙어서도 여전히 대화를 잘 나눌 수 있을까?"

늘 같은 대화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대화는 새로워야 하고, 새로운 대화는 새로운 삶과 새로운 관계에서 나온다.

부부, 그것은 끊임없이 갱신되어야 할 관계이다. (p.284)

 

 네이버 블로그 http://blog.naver.com/sooday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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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의 감정수업 - 스피노자와 함께 배우는 인간의 48가지 얼굴
강신주 지음 / 민음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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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좋아하는 강신주씨.

강신주의 감정수업.

스피노자와 함께 인간의 48가지 얼굴에 대해 알아보는데,

고전이나 영화속 인물을 데려와 알기 쉽게 설명하고,

마지막은 철학자의 어드바이스를 통해 명쾌하게 말한다.

철학의 나무에서 살펴보면 굵은 가지 잔가지 학파나 학자가 얼마나 다양하겠나.

시대에 따라서 늘 재조명 받아 재평가되는 학문이나 학자가 있기 마련이다.

혹자는 스피노자와 감정을 말하는 이 책이 전체 철학계에서 보면 편협할 수 있다고도 하던데,

솔직한 나에게는 이 책이 참 좋았다.

선과 악의 기준이 아니라 좋음과 나쁨의 기준.

 

 

 

 

사실 나는 얼마전,

내 인생이 너무 고단하다고 지칠 무렵이 좀 있었다.

남이 이루어놓은 인생편승 혹은 무임승차 하고 싶다는 못난 생각이 좀 들었거든.

물론 맹목적으로 그 이유 때문이었단 것은 절대 아니지만

치사하게 나라는 인간도 이런 저런 계산을 좀 한 것 같다.

예의를 다했든 최선을 다했든 어쨋든 간에 조금이라도 그런 생각이 들었으면 기면 긴거다.

짤긴 똥도 똥은 똥이니까.

 

그런데

갓뎀! 나는 대충 살 수는 없나보다.

나는 그런 인간이 결코 될 수가 없는게 아닐까.

나는 내 자유의지가 파닥파닥 살아 날뛰는게 좋다.

나를 보면 '오장육부가 흔들린다'고 과대평가했던 그 사람은 

자기방식으로 나를 좀 '멸시'하겠지만.

 

 좋은건 이유가 없어야 한다.

이유가 있는건 좋음(good)이 아니라 선(Good)이다.

 

우리가 말할 때 '나는 너를 좋아해' 라고 말하지,

'나는 너를 옳아해'라고 말하지 않잖아?

 

강신주는 끌림사랑의 차이점을 귀신같이 지적하고 있다.

다시 주체적인 나로 돌아오니깐 그게 또 해방이고 행복이었다.

 

예술은 끊임없는 해방입니다.

 

아- 진짜 너무 좋다.

나는 매일매일 해방되고 싶다.

 

 

 

 

 

 모든 감정은 나와 타자의 마주침에서 발생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특정 감정의 원인을 나 자신에게서 찾기보다는 외부 타자에게서 찾는 경향이 있다. .... 예를 들어 사랑의 감정에 빠져 들었다면, 우리는 상대방에게서 그 원인을 찾는다. 사랑의 감정을 일으킨 원인을 나 자신이 아니라 전적으로 상대에게 돌리니, 과대평가는 불가피한 일이다. 반대로 미움의 감정이 발생할 때도 우리는 전적으로 상대방에게서만 그 원인을 찾는 경향이 있다. 당연히 상대방은 미움을 가져다 준 사람이라고 저주받게 될 처지에 놓인다. 여기서 멸시라는 감정이 시작된다. 멸시라는 신호를 보냄으로써 우리는 상대방이 관계를 끊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자신이 직접 미움의 관계를 단호히 청산하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그는 멸시를 통해 상대방을 막다른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한다. 관계의 시작과 끝에서 자신은 어떤 책임도 없다는 듯이 그러니까 상대방을 멸시하게 될 때, 우리는 관계에 대한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지 않으려는 비겁함을 드러내는 셈이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나를 멸시한다면, 우리는 그가 모든 관계의 책임을 나에게 미루려는 연약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된다. 그러니까 타인을 멸시하는 사람은 비겁한 사람이라고 하겠다. 자신이 원했던 것처럼 관계가 파탄나면 그는 희생자 코스프레를 아낌없이 하게 될 것이다. 마치 부당한 일을 당한 선량한 사람인것 처럼. (p.208)

 

 

 한 인간에게는 다양한 가치들이 존재한다. 노래를 잘할 수고 있고, 섬세할 수도 있고, 이야기를 잘 들어 줄 수도 있고, 부드럽게 잘 안아 줄 수도 있고, 여행을 좋아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런 다양한 가치들도 모조리 돈으로 살 수 있도록 만드는 것, 이것이 자본주의가 가진 폭력성이다. 그런데 별로 돈이 안되는 가치들이 정말로 소중할 수도 있다. 영화나 음악에 대해 나와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가치를 누가 돈으로 사려고 하겠는가. 그렇지만 그것이 어떤 사람의 삶에서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가장 중요한 것일 수도 있는 법이다. (p.282)

 

 

 섹스를 나누는 사이라면, 누구든지 그 관계를 통해 서로 어떤 존재인지 가장 분명하게 이해하는 법이다. 일시적으로 성욕을 풀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남녀의 섹스는 두 사람의 전체 실존을 주고받는 행위니까 말이다. (p.313)

 

 

그렇지만 우리는 이제 알고 있다. 그것 없이는 자신이 제대로 존재하기 어려울 때만이, 우리는 그것을 필연적인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다른 것이 그 자리를 대체할 수 있어서 그것 없이도 살 수 있다면, 그것은 우연인 것이다. (p.404)

 

 

 끌림은 사랑이 아니다. 끌림이 나의 과거 상태에 의존한다면, 사랑은 나의 본질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어떤 음식이 배가 고파서 맛있다고 느끼는 것과 내 입맛에 맞아서 맛있다고 느끼는 것은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러니까 허기짐이 없을 때에만 내 입맛에 맞는 음식을 찾을 수 있는 것처럼,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앞서 나의 삶 자체가 지나치게 불행한 건 아닌지 점검해 봐야 한다. 다시말해 끌림을 사랑으로 착각하지 않으려면, 우리의 삶이 어느 정도는 행복하도록 스스로를 배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p.408)

 

 

 감정을 순간적이라고 저주하면서 현재를 부정하는 사람들, 그래서 현재에 살지만 과거나 미래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행동 준칙은 '선(Good)과 악(Evil)'이다. 반면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의 목소리에 충실한 사람들이 따르는 행동 준칙은 '좋음(good)과 나쁨(bad)'이다. 돌이켜 보면 경제적인 이유로 사랑하는 남자를 포기한 여성은 '좋음과 나쁨'의 기준이 아니라 '선과 악'의 기준을 따른 것이다. 여러가지로 무능력해 보이는 남자와 결혼하는 것, 그것은 자본주의라는 공동체의 가치를 수용하고 있는 부모나 친구들에게는 악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들은 지금 그 여자의 감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얼마나 그녀가 지금 그 남자와 함께 있는 삶을 '좋다'라고 느끼는지 따위가 그들의 안중에 있을 리 없다. 진짜 비극은, 그녀가 자신의 '좋음'을 버리고 부모나 친지들이 '선'이라고 평가하는 가치관을 받아들였다는 데 있다. 이 순간 그녀는 스스로 자기 삶의 정수였던 감정을 포기한 거라는 진실을 알까? ....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다. 단지 지금 내가 마주하고 있는 대상이 삶을 향한 의지를 강화시켜 준다면, 다시 말해 내 삶에 경쾌함을 준다면 그것은 '좋은' 것이다. 반대로 삶을 향한 의지를 약화시켜 내 삶을 우울하고 무겁게 만든다면, 그것은 '나쁜'것이다.(p.513~514)

 

 

 

이것은 내가 마침 책을 읽을 타이밍에 눈에 쏙 들어와서 표시한 주관적인 발췌내용들이다.

 어떻게 발췌한 내용들이 다 연결되어서 하나의 스토리가 만들어지게 되는데,

이건 딱히 내가 의도한 것은 아니다.

이보다 더 훌륭하고 좋은 내용이 책에 많다 :)

그대가 발췌한 내용으로 새로운 스토리를 써보는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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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기순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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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같은 세상에 돈으로 살 수 없는게 있을까?

도덕성이나 진정성을 따지지 않는다면 거의 모든게 가능하다.
사랑, 우정, 가족, 신체의 장기, 청부살인, 성형수술, 성매매 등은 언뜻 떠오르는 것들이고,
미국에서는 대리줄서기 서비스, 의사우선진찰 서비스, 과속가능 서비스 등등
내가 상상하기 힘든 부분에서까지 돈만 지불하면 가능해지는 세상이 되었다.

 

 얼마전에 종영된 드라마 <돈의 화신>에서 지세광은 이런 말을 한다.

"돈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다만, 돈이 모자랄 뿐이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작가
마이클 샌델
출판
와이즈베리
발매
2012.04.24

 

 

 

 

 

 

 

 

우리가 만나는 거의 모든 곳에서 시장기반의 접근방식이 수시로 공격해대는 이 시대에 

우리가 이따금 지갑을 열면서도 무언가 찜찜한 마음을 떨쳐낼 수 없는 순간 또는 매스컴의 어떤 소식을 듣고 분개할 수 있다는건. 

아직 일말의 윤리, 도덕성, 품위가 우리에게 남아있다는게 아닐까.

나는 드라마 재방송을 볼때, 화면 아래의 광고들을 처음 접했을 때 몹시 거슬렸다.

살아있는 거북이를 영양제팩에 넣어 열쇠고리로 만든 중국상인의 기사를 보고 몹시 거슬렸다.

대리모, 자기 아이를 입양시키는데 가격흥정을 하는 고발프로그램을 보면서도 거슬렸고,

거머리가 가득한 욕조에 들어가서 일정시간을 버티면 상금을 받는 외국프로그램도 거슬렸다.

(관련지을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만 귀신이 빙의되는 프로그램 엑소시스트도 싫었다.

거슬린다고 생각지도 못하게 지나가면서 거슬리는 것들이 많았다.

그러면서도 내가 돈이 없을 때에는

누군가가 나에게 큰 돈을 준다면 나는 무엇까지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곤 했다.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1년 감옥에서 살고나오면 몇억을 준다면 하겠는가?> 라는 조사를 했을 때,

절반이 넘게 하겠다고 한걸로 기억한다.

마이클 샌델은 그것들을 콕콕 찌르고 있다.

 

 

 What Money Can't Buy

 

마이클 샌델

Michael J. Sandel

  195335일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난 샌델은 1975년 브랜다이스대를 졸업하고, 영국 옥스퍼드대 발리올 칼리지에서 박사학위를 수료하였다. 옥스퍼드대에서 27세의 최연소 나이로 하버드대 교수가 된 샌델은 29세이던 1982년 자유주의 이론의 대가인 존 롤스를 비판한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를 발표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하였다. 특히 그가 하버드대에서 지난 20년간 해 온 '정의' 강의는 1만 명이 넘는 학생들이 수강해 하버드 역사상 가장 많은 학생들이 청강한 강좌 중 하나로 손꼽힌다. 샌델 교수에 따르면 정의를 판단하는 세 가지 기준은 행복, 자유, 미덕이다.

  샌델은 저서인 <정의란 무엇인가 (Justice : What's the Right Thing to Do?)>로 국내에 정의 열풍을 일으키며 큰 인기를 얻었고, 2005년과 2010년에 방한해 강연을 한 바 있다. 이어 샌델은 2012년 출간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 대해 강의하기 위해 45일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 61일 연세대학교 노천극장에서 강연을 열기도 하였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내가 생각하는 핵심 키워드

 시장기반 접근방식, 인센티브, 공평성, 부패, 강제성, 벌금 대 요금, 시민정신, 도덕성, 품위

 

 

1.새치기

 

시장 대 줄서기

 암표거래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줄서기가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들에게 유리한 차별"이라고 비판한다. 맞는 말이지만, 시장이 돈 많은 사람들을 유리하게 '차별'한다는 말과 같은 맥락에서만 그러하다. 시장이 자발적으로 돈을 지불하려는 마음과 능력을 바탕으로 재화를 분배하듯, 줄서기는 자발적으로 기다리려는 마음과 능력을 바탕으로 재화를 분배한다. 그리고 자발적으로 가격을 지불하려는 마음이, 자발적으로 줄을 서서 기다리려는마음보다 더 나은 가치 평가 기준이라고 추정할 근거는 없다. (p.56)

  

 

2. 인센티브

 

불임시술을 장려하기 위한 현금보상

  일반적인 뇌물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비양심적인 인물이 부당 이익을 획득하거나 청탁을 하기 위해 판사나 정부 관리에게 뇌물을 줄 때, 그 추악한 거래는 오로지 자발적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양쪽 모두 강압되지 않으면서 이익을 취할 수 있다. 뇌물이 불미스러운 이유는 강압이어서가 아니라 부패행위 이기 때문이다. 부패는 유리한 판결이나 정치적 영향력 등 판매해서는 안되는 대상을 사고 파는 행위다.

  공무원에게 주는 불법 뇌물을 부패와 관련시키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1장에서 살펴보았듯 부패에는 좀 더 광범위한 의미가 있다. 명분이나 활동이나 사회적 관행은 적합한 수준보다 낮은 규범에 의해 다뤄질 때 부패된다.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팔아서 수익을 얻을 목적으로 아이를 임신하는 행위는 부모의 역할이 부패한 것이다. 자녀를 사랑해야 할 존재로 보지 않고 사용해야 할 사물로 다루기 때문이다. 정치적 부패도 마찬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다. 한 판사가 뇌물을 받고 부정한 판결을 내릴 때, 그는 자신의 사법적 권위가 대중의 신뢰가 아니라 개인의 이득을 취하는 수단인 양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적합한 수준보다 낮은 규범에 따라 사법적 권위를 다룸으로써, 자신의 공직을 타락시키고 그 품위를 떨어뜨린다.

    부패한 판사나 공무원처럼, 돈을 받고 불임시술을 받은 여성은 사고 팔아서는 안되는 대상을 판다. 그 여성들은 자신의 생식능력을 책임감과 보살핌의 규범에 따라 행사해야하는 선물이나 의무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금전적 이익을 취하기 위한 도구로 다룬다. (p.74~75)

 

 

건강유지를 위한 뇌물

  하지만 사람들이 금연하거나 체중을 감량하도록 돕기 위한 현금 인센티브 제도까지 뇌물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기업이나 국립보건원이 지불해야 하는 의료비용의 감소 등 외부적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돈은 수령인의 건강을 증진시키는 행동을 장려한다. 이것이 어떻게 뇌물일 수 있겠는가? 약간 다르게 질문하자면, 건강에 좋은 행동이 뇌물을 받은 사람의 이익과 부하하는데도 뇌물이라는 혐의가 적절하게 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뇌물이라는 혐의가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금전상의 동기가 더욱 바람직한 다른 동기를 밀어낸다는 의심이 들기 때문이다. 이유는 그렇다. 건강에 좋은 자세는 콜레스테롤 수치와 체질량 지수를 적절한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는 자신의 신체적 행복에 대해 올바른 태도를 계발하고 자기 신체를 돌보고 존중하는 것이다. 하지만 약을 복용하도록 사람들에게 돈을 지급하는 행위는 이러한 행동을 키울 수 없고 오히려 해칠 수도 있다.

  이는 뇌물이 사람을 교묘하게 조종하기 때문이다. 뇌물은 수령인을 설득하는 절차를 생략하고 내재적 이유를 외재적 이유로 대체한다. “ 담배를 끊거나 체중을 감량해야 하는 웰빙에는 관심이 없죠? 그렇다면 내가 750달러를 줄 테니 그렇게 해요.”

  건강증진을 위한 뇌물은 우리를 속여서 어쨋거나 해야 하는 일을 하도록 만든다. 때로는 우리가 속아 넘어가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물론 혼자의 힘으로 담배를 끊거나 체중을 감량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결국 뇌물에 조종당하는 상황은 극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뇌물을 받는 것이 습관으로 굳어질지도 모른다.

  건강증진을 위한 뇌물이 효과가 있다면 뇌물이 건강에 대한 좋은 태도를 변질시킬 수 있다는 우려는 대책없이 배부른 소리처럼 들린다. 현금으로 비만 문제를 바로잡을 수만 있다면 조종당하는 것이 뭐가 문제란 말인가? 우선 우리의 신체적 행복에 적절하게 관심을 쏟는 것은 자기 존중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좀 더 실질적인 또 다른 이유는 건강을 유지하고자 노력하는 태도가 없으면 인센티브가 중단되었을 때 감량했던 체중이 되돌아 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 살펴본 유급 체중 감량 프로그램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금연하는 사람에게 현금을 지급하는 제도에는 희미하나마 희망을 걸어볼 만하다. 하지만 가장 호의적인 연구결과를 보더라도, 돈을 받고 금연을 시작한 흡연자 가운데 인센티브가 중단되고 6개월이 지나서 다시 담배를 피기 시작한 사람이 90퍼센트가 넘었다. 일반적으로 현금 인센티브는 장기간의 습관이나 행동을 바꾸기 보다는 의시의 진찰을 받거나 주사를 맞는 등 특정 행사에 사람들을 참여하게 하는 경우에 효과가 있어보인다.

  사람들이 건강을 관리하도록 돈을 주는 것은, 건강을 유지하는 것에 대한 가치를 장려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오히려 역효과가 발생할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현금 인센티브 제도가 효과가 있는가?” 라는 경제학자의 질문과 도덕주의자의 현금 인센티브에는 반박의 여지가 있는가?”라는 질문은 언뜻 들었을 때보다 훨씬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인센티브가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는 그 목적에 달려 있다. 그리고 적절하게 설정된 목적은 현금 인센티브가 퇴색시킬 수 있는 가치와 태도를 포함할 것이다. (p. 90~92)

 

 

벌금 대 요금 

벌금과 요금의 차이는 무엇일까?

벌금은 도덕적으로 승인 받지 못하는 행동에 대한 비용이고 요금은 도덕적 판단이 배제된 단순한 가격이다. (p.99)

 

 

오염권 거래제도

 여기서 쟁점은 뇌물이 아니라 의무를 외부에 위탁하는 행위다. 이러한 현상은 국내보다 국제무대에서 더욱 첨예하게 나타난다.

 국제적 협조가 필요한 상황에서, 부유한 국가가 다른 국가에게서 오염권을 사거나 다른 국가가 오염배출량을 감축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금전적으로 지원하는 방법으로 자국의 에너지 사용량을 감소해야 하는 의무를 피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면 두 가지 규범에 위배된다. 우선 자연을 도구로 생각하는 태도를 굳히고, 국제 환경윤리를 구축하는 데 필요한 공동 희생정신을 약화시킨다. 만약 부유한 국가가 돈으로 자국의 탄소배출량 감축 의무를 회피할수 있는 방법을 살 수 있다면, 결국 그랜드캐니언을 찾은 등산객의 경우와 다를 바가 없다. 단지 이 경우에는 부자 관광객이 히말라야에서 자신이 버린 쓰레기를 주워줄 사람을 고용하여 벌금을 내는 대신,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그랜드 캐니언에 빈 맥주 깡통을 버릴 수 있는 것이다.

 부유한 국가들이 자국의 환경파괴적인 습관을 바람직하게 바꿔나가야 할 의무를 돈으로 벗어던질 수 있게 한다면, 자연에 대한 잘못된 태도를 강화시켜서 지불할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자연은 쓰레기장이 되어 버린다. (p.112~113)

 

 

성적이 좋은 학생에게 주는 상금

  나는 환경, 부모애, 교육에 대한 고결한 태도를 취하자는 견해가 이와 상충되는 다른 견해보다 늘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뇌물을 주는 것이 때로는 효과가 있다. 가끔은 옳은 일 일 수도 있다. 학력 미달인 아이에게 돈을 주어 읽기 능력을 극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다면, 배움의 즐거움은 나중에 가르칠 수도 있겠다는희망을품고 우선 그렇게 시도해보기로 결정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때 우리가 가담한 뇌물 제공은 독서를 좋아해서 책을 읽는 높은 차원의 규범을 돈을 벌기 위해 책을 읽는 낮은 차원의 규범으로 대체하는, 도덕적으로 타협된 관행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바다코끼리 사냥권

 바다코끼리 사냥 시장에는 도덕적으로 용인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논쟁을 위해, 이누이트 족이 수백 년 동안 해왔던 대로 생계를 위한 바다코끼리 사냥을 허용하는 정책이 합당하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 하더라도 바다코끼리를 죽일 권리를 사냥꾼들에게 팔도록 허용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도덕적으로 반박의 여지가 여전히 있다.

  한 가지 이유는 바다코끼리 사냥이라는 이상야릇한 시장이 사회적 효용에 전혀 보탬이 되지 않는 비뚤어진 욕구를 채워줄 뿐이기 때문이다. ... 두 번째 이유는 이누이트 족이 자기 부족에게 할당된 바다코끼리 사냥 권리를 외부인에게 파는 것은 애당초 자신들의 공동체가 부여받은 면제 혜택의 의미와 목적을 변질시키기 때문이다. (p.123)

 

 

3. 시장은 어떻게 도덕을 밀어내는가

 

시장을 둘러싼 두가지 반박 (공정성과 부패)

  사람의 신장을 생각해보자. 가치를 훼손하지 않고 돈으로 신장을 살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신장을 사고 팔아야 할까? 그래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전형적으로 한두 가지 근거를 들어 반대한다. 그들은 신장 거래 시장이 순수하게 자발적으로 선택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노린다고 주장한다(공정성에 관한 반박), 혹은 신장 거래 시장이 인간을 여러 부속이 합쳐진 존재로 보는 변질되고 객체화한 인간관을 부추긴다고 주장한다(부패에 관한 반박).

 

혈액판매

 티트무스는 혈액시장이 가난한 사람을 착취한다고 강조한다(공정성에 대한 반박).... 혈액이 시장 상품으로 바뀌면 혈액 기증에 대한 사람들의 의무감을 잠식해서 이타주의 정신을 약화하고 사회적 삶의 능동적 특징인 '기증관계'를  훼손한다는 것이다(부패에 대한 반박).

 

사랑의 경제화

"우리는 정당하게 행동함으로써 정당해지고, 절제함으로써 절제하는 사람이 되고, 용감하게 행동함으로써 용감해진다"(아리스토텔레스). 이타주의, 관용, 결속, 시민 정신은 사용할 수록 고갈되는 상품이 아니다. 오히려 운동하면 발달하고 더욱 강해지는 근육에 가깝다.

 

 

 

4. 삶과 죽음의 시장

  전통적으로 '삶과 죽음'은 시장에서 금기시되는 영역이었다. 하지만 이것에 시장논리가 침투하면서 이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와 가치관에 변화가 생겼다. 유가족에게 재정적 안전망을 제공하려고 생긴 생명보험은 투기를 목적으로 그 증서를 사고파는 것이 허용되면서 타인의 죽음을 해타게 기다리게 하고, 웹사이트에서 유명인의 죽음을 놓고 도박을 벌이는 행위도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과연 시장의 영역은 어디까지 인가? 시장이 제공하는 효용과 선을 위해서라면 도덕성을 잠식시키는 시장 관행은 감내해야 한는 것일까? (p.181. 들어가는말)

 

  뉴 햄프셔 주 틸턴에 있는 월마트 매장에서 부지배인으로 일하던 48세의 마이클 라이스는 고객이 구매한 텔레비전을 자동차까지 운반해주다가 심장마비를 일으켜 쓰러졌다. 그는 쓰러진 지 일주일 만에 사망했다. 라이스가 사망하자 30만 달러의 사망 보험금이 지급되었다. 하지만 보험금은 그의 아내와 두 자녀에게 돌아가지 않고, 라이스의 명의로 생명보험을 가입해 보험 수혜자로 이름을 올렸던 월마트에 돌아갔다. (p.183)

 

청소부 보험

  나는 청소부보험을 '혐오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비양심적인 회사가 치명적인 위험요소를 직장에 나뒹굴도록 방치하거나 위험에서 눈길을 돌릴 수 있는 가능성을 언급할 뿐 아니라 이를 넘어선 도덕적 반박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를 둘러싼 도덕적 반박은 무엇이고 그 반박에는 설득력이 있을까?

 문제는 동의(consent)의 부재와 관계 있을 것이다. 고용주가 알리지도 승낙을 받지도 않고 우리 명의로 생명보험에 가입했다는 사실을 알면 어떤 느낌이 들까? 이용당한다고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 항의할 근거가 있을까? 보험증권의 존재가 우리에게 아무 해도 끼치지 않는다면 고용주가 우리에게 보험가입 사실을 알리거나 동의를 받아야 할 도덕적 의무는 없지 않을까? ...... 청소부 보험을 둘러싸고 제기될 수 있는 도덕적 반박의 근거에는 동의의 부재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직원이 이런 제도에 동의하더라도 도덕적으로 못마땅한 점은 여전히 남아있다. 부분적으로는 이러한 정책에서 살펴볼 수 있는 직원에 대한 회사의 태도다. 청소부 보험은 직원이 살아 있는 것보다 죽었을 때 더욱 가치가 있는 조건을 만들어내면서 직원을 사물화한다. 즉 회사는 직원의 가치를 직원의 업무에서 찾지 않고 직원을 상품선물(일반 상품을 매매 대상으로 하는 선물 계약)로 다루게 된다. 기업소유의 생명보험이 생명보험의 목적을 왜곡한다는 반박도 있다. 한때 유족에게 안전망 역할을 했던 생명보험이 지금은 기업을 위한 세금혜택 정책의 일종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세금 체계가 왜 재화와 용역의 생산보다는 직원의 사망에 수십억 달러를 투자하도록 회사를 부추기는지 파악하기 어렵다.(p.189)

 

생명을 담보한 도박, 말기환금

 말기환금은 대부분의 투자에는 없는 도덕적 문제를 낳는다. 투자가는 보험계약자가 빨리 죽기를 기대한다.

보험 계약자가 오래 살수록 투자 수익률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5. 명명권

 

상업주의는 무엇이 문제일까?

 지나친 상업주의에 대한 반박은 첫째, 경제적 필요로 인한 강압이지 사실상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 아니라는 것이고,  둘째, 그것 자체가 부패와 타락이라는 점이다. 기업의 후원을 받은 광고 문신을이마에 새기고 돌아다니는 것은 비록 자발적인 선택으로 거래가 이루어졌다하더라도 개인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행위다. (p.257)

 일부 광고는 그 자체로는 문제가 안되더라도 사회를 전체적으로 상업화시키는 데 기여할 수도 있다.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행위자체는 잘못이 아니지만 지나치게 많이 배출하면 환경을 파괴하듯이, 새로운 영역으로 팽창한 광고가 처음에는 받아들여질 만하더라도 지나치게 광범위하게 퍼지면 사회 전체가 기업 후원과 소비지상주의의 지배를 받는다. (p.258)

 

감옥과 학교

  학교에 범람하는 상업화는 두가지 면에서 부패했다. 첫째, 기업의 후원으로 제작된 교육자료는 편견과 왜곡, 피상적 내용으로 가득하다. 둘째, 기업이 객관적인 자료를 제공한다 해도 상업적 광고는 학교의 목적에 어긋나기 때문에 여전히 유해하다.

  마케팅 담당자들이 학교 문을 밀고 들어오면, 재정적으로 허덕이고 경기 침체, 재산세 상한제, 예산 삭감, 입학생 수 증가로 비틀거리는 학교들은 이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고 느낀다. 하지만 학교보다 더 큰 잘못은 우리 시민에게 있다. 아이들을 교육시키는데 필요한 공공자금을 늘리지 않고 버거킹과 마운틴듀에 아이들의 시간을 팔고 아이들의 마음을 빌려주겠다는 결정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p.273)

 

스카이 박스화

  이런 저런 재화의 의미에 관해 논쟁하는 것을 넘어, 좀 더 큰 의문을 던져야 한다. 우리는 어떤 사회에서 살고 싶은가? 명명권과 시정마케팅이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점유하면서 공적 성격을 약화시킨다. 상업화는 특정 재화를 훼손할 뿐 아니라 공통성을 잠식한다. 돈으로 살 수 있는 대상이 많아질 수록 각계 각층 사람들이 서로 마주칠 기회는 줄어든다. 야구경기장에서 스카이 박스를 올려다보면서, 혹은 스카이 박스 안에서 내려다보면서 이러한 현상을 목격한다. 과거에 야구 경기장에서 여러계층의 사람들이 한데 섞여 응원했던 경험이 사라지고 있는 현상은 스카이 박스를 올려다보는 사람 뿐 아니라 그 곳에서 내려다보는 사람에게도 상실이다.

  민주주의는 완벽한 평등을 필요로 하지는 않지만 시민에게 공동체적 생활을 공유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려면 배경, 사회적 위치, 태도, 신념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매일 생활하면서 서로 마주하고 부딪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서로의 차이를 견뎌내고 이를 놓고 협상하고 공공선에 관심을 쏟는 법을 배울 수 있다.

  따라서 결국 시장의 문제는 사실상 우리가 어떻게 함께 살아가고 싶은가에 관한 문제다. 모든 것을 사고팔 수 있는 사회에서 살고 싶은가? 시장에서 거래되지 않고 돈으로도 살 수 없는 도덕적, 시민적 재화는 존재하는가? (276~마지막장)

 

 

이 책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

(해제 부분 발췌)

 

샌델 도덕이론의 핵심: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김선욱(숭실대 베어드학부대학 학장)

 

  이 책은 지난 수십 년간, 아니 최근 4~5년간 한국사회의 핵심문제라고 믿어왔던 시장지상주의의 확대, 사회의 모든 영역에 시장논리가 지배하는 현상을 정확히 겨누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이 궁금하고 답답하게 여겼던 문제들을 구체적인 사례들을 통해 낱낱이 해부하여 그 속에 존재하는 암세포를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p.312)

 센델의 입장은 한마디로 '옳음에 대한 좋음의 우선성(the priority of the good over the right)'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정의를 지향하는 옳음의 관점을 무시하고 좋음의 관점에서만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옳음의 이념을 완성하려면 좋음의 관점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정의를 추구할 때 행복을 도외시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도 품는 방식이어야 한다는 말로 옮겨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행복은 아리스토 텔레스가 의미한 자기본성, 덕의 실현에 따른 것이며 단순한 만족감 같은 의미에서의 행복은 아니다.(p.323)

  돈으로 사서는 안 되는 것에는 신체의 장기같은 것만이 아니라 아이들의 예쁜 짓까지 포함되는데, 거기에는 변하지 말아야 하는 본래적인 선이 내재해 있다. 그 과정에 사람이 개입되면 본질적으로 윤리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샌델은 우리가 시장의 무한한 확장에 속절없이 당할 것이 아니라 이런 사안들이 공적담론과 토론의 대상이 되어야 하며, 우리가 그것을 허용할 것인지를 공적으로 검토를 통해 깊이 고민하고 서로 대화하고 합의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이것은 곧 정치의 문제다. 참된 정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적 삶의 구조를 다루는 것이며, 경제는 그러한 구조를 이루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정치는 경제를 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매개는 윤리다. (p.325)

  지금 대한민국은 큰 위기에 빠져있다. 그 위기는 우리 사회가 점점 더 시장논리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고 본다. 지난 몇년간 한국 사회에 깊이 드리워진 그림자는 경제에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는 정치의 참 의미를 망각한 채, 국가의 부를 좀 더 늘이면 시민들이 행복해 질것이라는 정치가들의 잘못된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더 나아가 무엇을 잃어버리고 있는지조차 돌아보지 못한 채 좀 더 부자로 살아보려는 그릇된 욕망을 채우기에 급급했던 우리 자신의 탓도 크다.(p.326) 

 

 

  

 
 
KBS 인간의 조건, 돈 뒤에 가려졌던 행복의 가치 조명!
 

 

 

  지난 27일 KBS2 ‘인간의 조건’에서는 돈 없이 살기 미션의 마지막 회가 방송되었다.

  이번 돈 없이 살기 미션은 지난 휴대전화 없이 살기, 쓰레기 없이 살기, 차 없이 살기 미션보다 더욱 가혹한 미션이었다. 돈 없이 살되 정 필요하다면 직접 돈을 벌어야 하고, 연예인으로서 방송 등을 통해 번 돈은 사용할 수 없다는 제한이 붙었던 이번 미션에 ‘인간의 조건’ 멤버들은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스케쥴 때문에 부산에 갔다와야했던 허경환의 기름값과 도로비를 마련하기 위해 옷을 팔거나 세차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이후에도 기본적인 식사와 스케줄 이동을 위한 차비, 기름 값을 위해 멤버들은 각자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돈을 벌었다. 놀이공원에서 인형 탈을 쓰고 퍼레이드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식당에서 서빙과 설거지로 돈을 벌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김준호는 야광 팔찌 등을 사서 클럽 앞에서 파는 사업을 벌이기도 했지만 생각처럼 쉽게 풀리지는 않았다.

  이번 주제에 대해 미션은 돈 없이 살기인데 ‘인간의 조건’ 멤버들은 돈 벌기 체험을 하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조건’은 휴대전화 없이 살기 미션을 통해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 되돌아보게 하고 차 없이 살기 미션을 통해 바쁘게 지나치던 거리에서 못보고 지나쳤던 풍경과 여유를 찾아 주었다. 이번 미션 역시 단지 돈 없이 생활하는 체험이 아닌, 편리한 생활을 위해 쉽게 쓰던 돈 뒤에 가려진 무언가를 끄집어내기위한 의미가 담겨있는 축소된 문구일 뿐이다.

  멤버들은 힘들게 육체노동을 통해 돈을 벌며 쉽게 썼던 5천원의 가치를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이렇게 초반에는 돈 벌기에 급급하던 멤버들이 마지막 날 쯤에는 돈을 어떻게 쓰는 것이 잘 쓰는 것인가를 깨달았다. 박성호와 정태호는 멤버들이 다 같이 먹을 카레를 만들기 위해 각자의 사비를 털었다. 소소한 밥상일지라도 돈 없이 생활하는 탓에 마음껏 먹지 못하던 ‘인간의 조건’ 멤버들에게는 굉장히 행복한 만찬이었다. 그런가하면 양상국은 생일을 맞은 정태호와 박성호의 케이크를 사기 위해 계속해서 육체노동 아르바이트를 했고 나머지 멤버들도 가격은 싸지만 각 멤버들에 대한 애정이 담긴 선물을 마련했다.

  ‘인간의 조건’ 멤버들은 평소에는 당연하게 사용하던 돈이 결핍된 생활을 통해 그제야 돈이 지니고 있는 가치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번 ‘인간의 조건’ 미션은 “내가 행복을 찾는다는 건 돈을 얼마큼 들이느냐의 문제가 아니다”라는 박성호의 말처럼, 행복의 가치는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다는 모두가 알고 있지만 잊고 있는 사실을 다시금 조명해 냈다.

  지금까지의 미션이 그랬듯이, ‘인간의 조건’의 미션들은 단지 편리함이 제거된 상황에서 고군분투하는 멤버들을 보는 재미 뿐 아니라, 그 편리함 뒤에 가려졌던 가치와 행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앞으로 진행될 미션들을 통해 우리가 잊고 있거나 당연시 여기던 많은 가치들을 다시금 생각할 수 있게 하기를 기대한다.

  

글: 이현아(무비조이 기자)
<저작권자 ⓒ 영화종합 인터넷신문 무비조이 MOVIEJO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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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조건을 보면 카레먹는 장면이 나온다.

이들이 카레를 만들기 위한 재료를 사는데 들어간 돈은 대략 17000원 정도였지만,

인도의상 코스프레를 하고, 인도노래를 부르면서, 인도스타일인 손으로 밥을 먹는 과정에서 돈은 더 이상 한푼도 들지 않았다.

그들이 다른 멤버들을 위해주려는 일종의 노력과 자연스럽게 발현된 재미즐거움행복함의 가치는

경제적인 가치로 환산가능한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들이 이 날 느낀 인생에 대한 풍족함, 만족감, 행복함은 돈으로 살 수 없다.

행복은 돈으로만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행복도 연습이고 습관이고 노력인 것 같다.

국가의 파이를 자꾸 키우자고 하는 사람들을 의자에 묶어서 이 책을 읽히고 싶다.

가치관에 혼란이 오는 사람들도 읽어으면 좋겠다.

무엇보다도 자라나는 학생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내일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줄 것이다.

 2013.5.22 독서리뷰

http://blog.naver.com/sooday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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