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 지금+여기 3
오찬호 지음 / 개마고원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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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패션도 마찬가지지만,

그 사람이 듣는 음악의 목록,

그 사람의 서재에 꽂힌 책의 제목들,

지하철에서 그가 들고 있는 책제목이 그 사람의 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가 수혈하는 음악과 책이야말로 그를 형성하는 일부로 흘러들어가면 그건 당연한 것이긴 한데,

어찌보면 이것도 지나치게 타인의 시선을 신경쓰는게 아닐까 생각하니 좀 그렇긴 하네.

최근 내가 잡는 책들은 일련의 경향성을 띠는가 하면, 함께 있으면 어색.

가령 <우리는 왜 불평등을 감수하는가>,<불평등의 대가>,<세계의 절반은 왜 굶주리는가> 옆에

<파는 것이 인간이다>,<내 생의 첫번째 재무설계>가 나란히 꽂혀있다든가 그런 형국.

몇 권 안되는데도 올 상반기 안에 다 읽겠나 싶다.

지난 토요일 이동시간을 이용해서 다 읽은 책에 대해 기록을 남기려고 한다.

 

지난 책 리뷰에서

이순신장군은 논밭을 갈아 군자금을 만들었고 스물세번 싸워 스물세번 이겼다라며,

정신차리고 똑바로 살자, 시장에 내팽개쳐진 개인은 자신만의 경쟁력을 가져야 한다는 등의 말을 지껄였는데.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 왜 이렇게 얼굴이 화끈거리나.

사람이 어제 한 말 조차도 이렇게 부족하게 느껴질 수가 없다는 생각을 다시금 한다.

친구를 만나서 이야기하다가 배움을 멈추는 순간 늙는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좁은 자기만의 경험을 온 세상인 냥 알고, 

눈을 감고 귀를 막은 채 늙어버린 노인이 가진 투표권이 얼마나 끔찍한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한편으로는 젊어서 살아온 시대의 경험이 만드는 사고의 한계와 그 안타까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여튼, 우리는 배움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는 결론.

좋은 도서관이 있는 동네에서 자녀를 양육해야 한다는 우리스타일의 맹모삼천지교로 결론.

 

 

 

 아프리카에 사는 '스프링 폭스' 라는 산양들은 가끔씩 집단 전체가 맹렬히 달리다가 절벽에서 함께 떨어져 죽는다. 이 양들은 수천 마리가 함께 살다보니, 앞쪽의 무리가 먼저 지나가며 풀을 먹어버리면 뒤쪽의 무리들이 먹을 것이 없게 된다. 그래서 뒤의 양들은 자꾸만 앞으로 밀고, 앞에 있는 양들은 점점 밀리다가 기어코 달리기 시작한다. 그러면 뒤의 양들은 비어진 공간에서 천천히 풀을 뜯어먹으면 되는데도 집단으로부터 떨이지기 두려워 악착같이 따라 뛴다. 결국 앞의 양이 미니까 뛰고, 뒤의 양은 앞의 양이 뛰니까 따라 뛰는 것이다. 그렇게 왜 뛰는지, 어디로 뛰는지 모르고 그저 서로 달리다가 절벽을 만나면 함께 죽는 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 이십대의 모습도 이 산양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지만 우리는 스프링폭스가 아니다. 멈춰야 할 이유를 안다면 멈추지 않을 이유가 없다. 우리가 그 '레일'을 굳이 그렇게 폭주 기관차처럼 달려야만 하는가. 우리는 서로를 밀어내야만 할 이유도 없고, 악착같이 따라붙어야만 할 이유도 없다. 우리가 스프링폭스가 아닌 이상 무턱대고 내달리기만 할 게 아니라 달리는 이유도 따져볼 수 있어야 한다. 아무리 달리더라도 '양대가리' 소리는 듣지 말아야 할 것 아닌가.

- 머리말 <지금 이십대가 위험하다> 중 발췌

 

 

이 책은 지난달에 나온 신간인데, 아주 잘 읽은 책이고

실패를 경험하고 있거나 좌절하고 있는 20대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해주고 싶다.

언젠가 내가 자기계발서를 몹시 싫어한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책장에는 엄마가 사온 <여자의 모든 인생은 20대에 결정된다>라는 책이 두 권이나 있다.

유수연의 <20대, 나만의 무대를 세워라>라는 책도 있고.

내 책장에 두고 싶지 않아서 다른방으로 다 빼버렸다.

작년에 김미경의 강연도 티비로 보고, 엄마는 나에게 유수연의 책을 읽으라고 해서 읽었는데,

나는 유수연의 책을 읽고 이제 더 이상 자기계발서는 읽고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작가들에게 개인적인 감정은 없고, 나에게 책을 추천해준 이들도 내가 몹시 좋아하는 사람들이긴 하나,

나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매우 싫어하고, <멈추면 보이는 것들> 이런거 보면 속상하다.

연인과의 결별 후에는 법륜스님의 책이 참 도움이 되긴하던데,

취업이나 직장문제에 관해서 자기계발서를 비롯한 힐링도서들은

솔직히 말해서 다 퍽유♡ 를 날리고 싶다.

그래서 어.쩌.라.고?

조선시대 기우제 지내는 것도 아니고, 어줍짢은 위로말고 현실적인 대안은 없냐고.

아, 나 지금 상당히 날카롭게 보이겠구나, 가끔 발현되는 날카로움.

 

 

 

 

자기계발서가 필요한 시점이 분명이 있다.

자기계발서의 장점도 안다.

긍정적인 말과 자기 최면이 중요한 것도 안다.

개인의 노력이 부족해서 발생하는 문제도 분명히 있다.

 

다만 전체적인 현상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근시안적인 시야맹목적인 믿음으로 시시포스의 바위 굴리기를 계속 시킨다는거.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모든 일이 잘 풀린다고 나도 한때 주문처럼 외고 다녔는데, 사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일들을 내가 그렇게 생각한 것 같다.

 주술을 믿는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이런 당연지사를 입으로 반복해대는 접근법이 갖는 명백한 한계에 대해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P.33).

긍정적인 기본 마인드를 갖는 것이야 당연하지만, 긍정과 노력이 무슨 엄청난 필살기는 아니지 않나.

 

우리가 마오쩌뚱도 아니고.

대약진 운동 머리카락으로 용광로 만들고,

의화단이 권법 연마해서 조총 물리치는 소리하고있네.

 

  아무리 봐도 지금의 자기계발 현상에는 '이렇게 하라!'는 주문만 있지 그로 인해 '달라진 결과'가 없다. 그렇게도 자기계발이 현 상황을 극복할 유일한 진리라면, 그래서 여기에 한 개인이 '예스'라고 응답했다면 그로 인해 조직에 적응이 되든지, 자아가 구체적으로 치료되든지, 아니면 평생에 걸쳐 '즐길' 어떤 기술이라도 연마되든지 해야 할 텐데, 지금 도대체 어떤 결과가 이십대들에게 있단 말인가. 오히랴 지금의 청년들은 그런 결과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걸 특성으로 갖고 있지 않은가.

..... 문제는 자기계발과 성공의 간격이 이처럼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에' 강조되는 것은 늘 자기계발이라는 점이다.

  즉, 문제의 극복이 가능하다는 자기계발의 논리가 사실은 평생 '극복만 주문' 받는 개인을 만들어버린다. 이십대는 불안하니까 자기계발 담론을 받아들여 위기를 넘어서려 하지만, 불행히도 그 불안한 상태는 계속 유지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도돌이표처럼 갇혀버리는 것이다. 모두가 이 자기계발의 수행에 동참하면 그 어마어마한 참여자들 덕택에 성공하는 하나의' 사례는 또 발견될 것이고, 이는 '가능성'의 객관적 증거로 활용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희박한 성공의 가능성이 표면화될 때,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수천수만의 사례는 '노력부족'이라는 말로 간단하게 정리 처분된다. 이렇게 좌절하는 자아가 많아질 수록 자기계발서 시장은 더커진다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 노골적으로 말해, 자기계발서를 읽었다는 건 '낚였다!'의 다른 말인 것이다. (p.33)

 

 

영화 <내 깡패같은 애인>의 한 장면

 

오동철: 너 아직도 노냐?

한세진: 예? 노는 게 아니라.....

오동철: 요새, 취직하기도 힘들다는데.... 불황 아니냐, 불황.

우리나라 백수 애들은 착해요. 첼레비전에서 보니까 프랑스 백스애들은 일자리 달라고 다 때려 부수고 개지랄을 떨던데,

우리나라 백수 애들은 다 지탓인줄 알아요. 가 못나서 그런 줄 알고,

아유~ 새끼들, 착한건지. 멍청한 건지. 다 정부가 잘못해서 그런건데~~

야! 너도 너 욕하고 그러지마. 취직 안 된다고.

너 탓이 아니니까. 당당하게 살어! 힘내 씨발!

(p.50)

 

 

자기계발서를 읽는게 나쁘다는게 아니라, 이런 악순환이 가져오는 결과물이 소름끼친다.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나는 다를거라고 생각하였지만 나에게도 이런 모습이 조금 있다는 걸  깨닫고나서 씁쓸했다.

 

 

연세대는 서강대를, 서강대는 성균관대를, 성균관대는 중앙대를,

중앙대는 세종대를, 세종대는 서경대를, 서경대는 안양대를, 안양대는 성결대를 '무시'한다.

행여나 후자가 전자를 '비슷한 대학'으로 엮기라도 할라치면 그 순간 전자들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고 난리가 난다.

그렇게 4년제는 다시 2년제를, 2년제는 또 같은 기준에 근거해서 자기들 내부를 쪼개고 줄세운다.

모두가 이렇게 같은 논리를 가지고 가해자 역할을 하며,

또 그래서 당연히 피해자 신분이 되는 상황에도 매우 능동적으로 기여하는 셈이다. (p.86)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p.87~)

 

첫째: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지기

 

  자기계발의 논리로 무장하게 될 때, 개인은 어떤 성향을 보여주게 될까? 먼저 혹독한 현실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은 속출하고 있지만, 그런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시중에 출간된 자기계발서들을 얼핏 넘겨만 보더라도, 이 책들이 자신의 고통은 스스로 이겨내야 하는 것임을 강요하고 있단 걸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내 고통이 세상 누구나 겪는 성장통 정도고 간주되는 판에, 남의 고통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생길까? 이렇게 자신의 고통도 늘 스스로 참아야 하는 것으로 강요되는데, 남의 고통까지 왜 신경을 써줘야 한단 말인가? '이런 철학'을 개인이 가지게 되면 그는 특정한 시각을 갖게 된다. 힘들어 죽겠다며 하소연하는 사람들에게 "어쨋든 자기문제지, 그것도 못 받아들여? 너보다 더 힘든 사람도 많아!"라고 반응하게 된다. "정말 힘들겠구나"하는 공감대 형성은 당연히 어려워진다. ...... 개인이 사회적 원인으로 고통 받는 상황이 늘고 있다는 게 현재 이십대가 처한 상황희 한 특징이라면, 이를 사회적 원인에서 비롯된 문제로 이해하지 않는 것 역시 지금 이십대가 지닌 특징의 하나로 보인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공감할 이유를 찾지 못하는 것은, 어쨋든 모든 건 자기 할 탓이라는 자기계발 논리에 길들여진 결과이다. 자기계발서는 측정할 수 없는 것을 측정하고자 했다. 고통이란, 한 개인이 특정한 현상에 반응하는 지극히 주관적인 감정상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자기계발서는 고통을 객관적으로 비교 가능한 것으로 해석한다. 즉, A가 아파할 때 그보다 더 심한 고통을 이겨낸 B가 있다면 A의 고통은 참아야되고, 이겨내야 하고, 사회적 요인과 무관한 것이 되어버린다. .... 자기계발서의 저자들은 타인의 상황을 늘 자기 기준으로 평가하곤 한다. 그 근거로서 저자 자신, 혹은 유명 인사가 주인공으로 설정된다. 당연히 이 주인공이 겪는 고통의 총량은 무지막지하다. 고생도 그런 고생이 없다. 그런데 성공한다. ......그렇게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고 꿈을 이룬 주인공들을 접할 때마다, 이십대들은 십중팔구 '지금 내가 힘든 건 힘든 축에도 못 끼는 구나' 하는 자기반성을 하게 된다. 취업준비 어렵다는 하소연은 한순간에 '입 닥쳐야 할 징징거림'이 되다. 이는 자연스레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능력을 저하시키나. 그렇게 고통의 비교법칙이 이십대를 통제한다.

 

  이렇게 이십대들에게 개인의 고통은 그보다 더한 고통을 이겨낸 누군가를 본받으면서 마땅히 참아야 할 것이 되어버렸다. 흥미로운건, 앞선 장에 등장한 이십대들은 한편으론 취업을 못하고 있는 자신들의 고통을 알아달라고 호소하면서 또 한편으론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 요구에 반대한다는 점이다. 이런 이율배반적이 또 어딨는가.

 그러나 여기서 두 가지 지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먼저, 이들의 호소는 자신들의 고통에 '아무도' 반응해 주지 않기에 나타난 절규나 다름없다. 아무도 이십대들의 고통을 이해해주지 않기 때문에, 이들도 아무의 고통도 이해할 수 없게 돼버린 셈이다. 자신을 아무도 역지사지해주지 않는데, 자신이 어찌 역지사지의 입장을 가질 이유가 있겠는가. 또한 이들은 고통의 비교 법칙을 그대로 적용했을 뿐이다. 취업대란이란 말이 상징하듯, 이십대들이 마주하게 되는 고통 자체가 객관적으로 엄청 늘어나 있다. 신입생 때부터 해야될 일은 상상을 초월하며, 게다가 보상마저 확실하지 않으니 심신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런 이들이 비정규직의 목소리에 공감할 여유가 있을까? 이리저리 계산기를 두들겨 보아도 '나만큼' 힘들진 않은 것 같다고 느낀단 말이다.

 

둘째: 편견의 확대재생산

 

  고통에 대한 공감력이 떨어지면 필연적으로 특정 대상에 대한 기존의 편견이 더 강화된다. 기실 '공감'이란 단지 함께 느낀다는 점에서 중요한 게 아니라, 이를 시작으로 한 개인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의 오류를 발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권장된다. 그래서 타인의 상황을 깊고 넓게 이해할 수록 당연히 타인을 섣불리 이렇다 저렇다 재단할 수 없는 이유를 발견하게 될 가능서이 높아진다. 바로 이렇게 되는 걸 일컬어 '공감대가 넓다'고 하지 않는가. ...... 이런 경험이 부족할 경우, 기존의 고정관념이 이런저런 검증도 없이 신념으로 굳어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어떤 대상을 제대로 모를 때 우리는 사회적으로 널리 퍼진 고정관념에 의존한 판단을 하기 십상인 탓이다. 예를 들어, '장애인의 성욕' 문제가 그렇다고 할 수 있다.

 

.... 아무리 아름다운 문구로 치장된, 그래서 읽기에 한없이 편안하게 쓰였다 할지라도 그것이 자기계발서라면 어떤 책이든 패자에 대한 편견을 강화하는 내용이 넘쳐난다. 그 사람이 취업하지 못한 건 이 땨문이다, 그런 태도로 어떻게 승진할 생각을 한냐, 저렇게 사니 살을 못빼지.... 하는 식으로 실패의 원인을 구국절절하게, 하지만 근시안적으로만 제시한다. 그만큼 패자에 대한 편견들은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다. 앞으로 확인하게 될 이십대들의 '일상'은 바로 이런 편견이 내재화된 결과들이다. 이는 가난한 것도, '우울한 것도 다 자기 잘못인데 왜 그걸 사회가 관심 가져야 하냐는 식의 반문과도 직결된다.

 

 

셋째: 주어진 기존의 길만 맹목적으로 따라가기

 

  패자에 대한 편견의 이면에 자리하고 있는 건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 두려움이 클수록 비교적 안전한 '기존의 길'에 대한 선호 역시 커진다. 더 나아가선 그 길만이 가장 안전하다고 믿고, 다른길은 거들떠보지도 않게 된다. 그리하여 '몇 가지' 길만이 당연한 길이 되고, 그 외의 길을 걷는다는 건 다 쓸데없는 짓이 되고 만다. 이런 생각이 '그 외의 길'에 대한 부정적 편견을 만들어 내는 건 시간문제다. 다름에 대한 거부감이 날카로워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는 이십대가 보여주는 모습이면서, 그들이 받는 압박감이 더 커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십대는 누구도 자신들에게 공감해주지 않는 걸, 그리고 다른 이들이 자신의 모습을 온갖 편견으로 재단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현재의 자기 모습, 이를테면 수능성적이나 학교 이름만 가지고 자신을 손쉽게 판단해버리는 편견이 난무한다는 것을 잘 알기에, 이들은 앞으로의 모습, 이를테면 '번듯한 취업' 같은 사회적 성공 여부에 오로지 목을 맨다. 개인의 고통은 어디에다 하소연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극복해야 하는 걸로 생각하는 게 속편하다. 취업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 혹은 정규직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 그 자체보다 자신의 삶이 실패한 것으로 규정되고 온갖 낙인이 박히는 것이 더 두려운 일이다.

 

 타인에 대한 공감이 부족하고, 자기 편견을 강화해온 이십대들은 주어진 길만을 가는 데 익숙해진다. 문제는 자신이 추구하는 길만을 정도正道라 이해하고, 이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자체에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것이다. ..... 경쟁이 내면화된 세상에서 개인의 공동체의식은 약화될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는 사회학자로서 뱔 문제없이 할 수 있는 발언이다. 하지만 학생들 중에는 이를 학문적 경향으로 이해해줄 수 없다는 이들이 적잖다. 그 연장선상에서 '모든 것의 책임은 개인에게 있다' '열심히만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 등의 논의를 비판해본다는 생각을 잘 하지 못한다. 그래서 경쟁, 시장질서, 나아가 자본주의라는 체제를 조금이라도 비판하게 되면 일반적인 논쟁에서도 더 예민하게 반응하며 비아냥거리기 일쑤다. 마치 '금기의 말'을 들었다는 듯이.

 

 이러한 다름에 대한 거부감은 이십대들이 내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옥죈다. 자기 스스로 '달라진다'는 것을 두려워 한다는 듯이며, 그만큼 정해진 '레일' 위에 안착하겠다는 의지를 굳건히 한다. 이런 경향 자체가 시대적 특징이 되어 '당연한 것' '어쩔 수 없는 것' 으로 개인에게 강요된다. 그 결과 개인은 앞뒤 가리지 않고 레일 위를 달리기 위해 해야 될 자기계발을 찾고 있으며, 또 그런 자기계발의 일부 성공적인 결과를 보고 부러워하면서 더 적극적인 수행을 다짐하게 된다. 결국 이 모든 과정은 순환적으로 이어지고, 이로 말미암아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지고, 그로 인해 고정관념이 강화되는 현상은 더 가속된다. 이런 환경에 노출된 이십대는 당연히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이'경직' 될 수밖에 없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게 보여진 20대의 자화상 부분만 많이 옮기고 나머지는 요약하는 식으로 정리해야겠다.

이러다가는 책 한권을 다 옮길 판이네, 그대가 직접 읽어보심이 좋다.

 

 

 

미래도 희망적이지 않다(P.187~)

- 20대가 이런 얼굴을 가지게 된 원인에 대해 말하고 있음.

 

원인1: IMF의 추억

유년시절 IMF를 겪은 우리세대가 경쟁에서 실패했을 때 겪게 될 두려움은 성장하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음.

 

원인2: 경영학과의 사회학

모든것을 투입과 산출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의 팽배화라고 할까.

 

원인3: before/after의 덫

성형 열풍과도 같은 지금은 고통스럽지만 취업에 성공하면 달라질거야.

 

 

자기계발을 권하는 사회를 치유하자!

원래 그런 세상은 없다, 긍정과 희망을 논하기 전에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

- 기회는 균등한가?

- 과정은 공정한가?

- 결과는 정의로운가?

 

 

 

내가 더 읽어야 할 저자들

- 마이클 샌델, 지그문트 바우먼

 

 

나는 이 책이 노력하지 않는 사람의 합리화 수단이 되어서도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자기계발서를 맹목적으로 의지하며 시시포스의 바위굴리기를 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이미 의심하고 있지 않은가?

그대가 가진 불안은 그대로 남아있다는 걸 왜 못 본 척하는가?

 

 

이 책을 읽을 무렵,

지인 두세명을 만나서 여러 이야기를 하였는데,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된다.

 

학교교육의 무용론에 대해서도 생각했고,

대학은 교수가 가르쳐 주는 곳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공부하는 곳이라는 것.

좋은 도서관이 있는 동네에 살아야 한다는 것.

내 아이가 자라서 자기계발서를 읽게 된다면 연계된 사회학 책도 함께 던져줘야 한다는 것.

그리고 포스팅 하면서

전화 통화 버튼을 누를까 말까...

고민하게 만드는 사람들의 얼굴이 계속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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