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의 감정수업 - 스피노자와 함께 배우는 인간의 48가지 얼굴
강신주 지음 / 민음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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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좋아하는 강신주씨.

강신주의 감정수업.

스피노자와 함께 인간의 48가지 얼굴에 대해 알아보는데,

고전이나 영화속 인물을 데려와 알기 쉽게 설명하고,

마지막은 철학자의 어드바이스를 통해 명쾌하게 말한다.

철학의 나무에서 살펴보면 굵은 가지 잔가지 학파나 학자가 얼마나 다양하겠나.

시대에 따라서 늘 재조명 받아 재평가되는 학문이나 학자가 있기 마련이다.

혹자는 스피노자와 감정을 말하는 이 책이 전체 철학계에서 보면 편협할 수 있다고도 하던데,

솔직한 나에게는 이 책이 참 좋았다.

선과 악의 기준이 아니라 좋음과 나쁨의 기준.

 

 

 

 

사실 나는 얼마전,

내 인생이 너무 고단하다고 지칠 무렵이 좀 있었다.

남이 이루어놓은 인생편승 혹은 무임승차 하고 싶다는 못난 생각이 좀 들었거든.

물론 맹목적으로 그 이유 때문이었단 것은 절대 아니지만

치사하게 나라는 인간도 이런 저런 계산을 좀 한 것 같다.

예의를 다했든 최선을 다했든 어쨋든 간에 조금이라도 그런 생각이 들었으면 기면 긴거다.

짤긴 똥도 똥은 똥이니까.

 

그런데

갓뎀! 나는 대충 살 수는 없나보다.

나는 그런 인간이 결코 될 수가 없는게 아닐까.

나는 내 자유의지가 파닥파닥 살아 날뛰는게 좋다.

나를 보면 '오장육부가 흔들린다'고 과대평가했던 그 사람은 

자기방식으로 나를 좀 '멸시'하겠지만.

 

 좋은건 이유가 없어야 한다.

이유가 있는건 좋음(good)이 아니라 선(Good)이다.

 

우리가 말할 때 '나는 너를 좋아해' 라고 말하지,

'나는 너를 옳아해'라고 말하지 않잖아?

 

강신주는 끌림사랑의 차이점을 귀신같이 지적하고 있다.

다시 주체적인 나로 돌아오니깐 그게 또 해방이고 행복이었다.

 

예술은 끊임없는 해방입니다.

 

아- 진짜 너무 좋다.

나는 매일매일 해방되고 싶다.

 

 

 

 

 

 모든 감정은 나와 타자의 마주침에서 발생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특정 감정의 원인을 나 자신에게서 찾기보다는 외부 타자에게서 찾는 경향이 있다. .... 예를 들어 사랑의 감정에 빠져 들었다면, 우리는 상대방에게서 그 원인을 찾는다. 사랑의 감정을 일으킨 원인을 나 자신이 아니라 전적으로 상대에게 돌리니, 과대평가는 불가피한 일이다. 반대로 미움의 감정이 발생할 때도 우리는 전적으로 상대방에게서만 그 원인을 찾는 경향이 있다. 당연히 상대방은 미움을 가져다 준 사람이라고 저주받게 될 처지에 놓인다. 여기서 멸시라는 감정이 시작된다. 멸시라는 신호를 보냄으로써 우리는 상대방이 관계를 끊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자신이 직접 미움의 관계를 단호히 청산하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그는 멸시를 통해 상대방을 막다른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한다. 관계의 시작과 끝에서 자신은 어떤 책임도 없다는 듯이 그러니까 상대방을 멸시하게 될 때, 우리는 관계에 대한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지 않으려는 비겁함을 드러내는 셈이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나를 멸시한다면, 우리는 그가 모든 관계의 책임을 나에게 미루려는 연약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된다. 그러니까 타인을 멸시하는 사람은 비겁한 사람이라고 하겠다. 자신이 원했던 것처럼 관계가 파탄나면 그는 희생자 코스프레를 아낌없이 하게 될 것이다. 마치 부당한 일을 당한 선량한 사람인것 처럼. (p.208)

 

 

 한 인간에게는 다양한 가치들이 존재한다. 노래를 잘할 수고 있고, 섬세할 수도 있고, 이야기를 잘 들어 줄 수도 있고, 부드럽게 잘 안아 줄 수도 있고, 여행을 좋아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런 다양한 가치들도 모조리 돈으로 살 수 있도록 만드는 것, 이것이 자본주의가 가진 폭력성이다. 그런데 별로 돈이 안되는 가치들이 정말로 소중할 수도 있다. 영화나 음악에 대해 나와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가치를 누가 돈으로 사려고 하겠는가. 그렇지만 그것이 어떤 사람의 삶에서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가장 중요한 것일 수도 있는 법이다. (p.282)

 

 

 섹스를 나누는 사이라면, 누구든지 그 관계를 통해 서로 어떤 존재인지 가장 분명하게 이해하는 법이다. 일시적으로 성욕을 풀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남녀의 섹스는 두 사람의 전체 실존을 주고받는 행위니까 말이다. (p.313)

 

 

그렇지만 우리는 이제 알고 있다. 그것 없이는 자신이 제대로 존재하기 어려울 때만이, 우리는 그것을 필연적인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다른 것이 그 자리를 대체할 수 있어서 그것 없이도 살 수 있다면, 그것은 우연인 것이다. (p.404)

 

 

 끌림은 사랑이 아니다. 끌림이 나의 과거 상태에 의존한다면, 사랑은 나의 본질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어떤 음식이 배가 고파서 맛있다고 느끼는 것과 내 입맛에 맞아서 맛있다고 느끼는 것은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러니까 허기짐이 없을 때에만 내 입맛에 맞는 음식을 찾을 수 있는 것처럼,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앞서 나의 삶 자체가 지나치게 불행한 건 아닌지 점검해 봐야 한다. 다시말해 끌림을 사랑으로 착각하지 않으려면, 우리의 삶이 어느 정도는 행복하도록 스스로를 배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p.408)

 

 

 감정을 순간적이라고 저주하면서 현재를 부정하는 사람들, 그래서 현재에 살지만 과거나 미래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행동 준칙은 '선(Good)과 악(Evil)'이다. 반면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의 목소리에 충실한 사람들이 따르는 행동 준칙은 '좋음(good)과 나쁨(bad)'이다. 돌이켜 보면 경제적인 이유로 사랑하는 남자를 포기한 여성은 '좋음과 나쁨'의 기준이 아니라 '선과 악'의 기준을 따른 것이다. 여러가지로 무능력해 보이는 남자와 결혼하는 것, 그것은 자본주의라는 공동체의 가치를 수용하고 있는 부모나 친구들에게는 악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들은 지금 그 여자의 감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얼마나 그녀가 지금 그 남자와 함께 있는 삶을 '좋다'라고 느끼는지 따위가 그들의 안중에 있을 리 없다. 진짜 비극은, 그녀가 자신의 '좋음'을 버리고 부모나 친지들이 '선'이라고 평가하는 가치관을 받아들였다는 데 있다. 이 순간 그녀는 스스로 자기 삶의 정수였던 감정을 포기한 거라는 진실을 알까? ....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다. 단지 지금 내가 마주하고 있는 대상이 삶을 향한 의지를 강화시켜 준다면, 다시 말해 내 삶에 경쾌함을 준다면 그것은 '좋은' 것이다. 반대로 삶을 향한 의지를 약화시켜 내 삶을 우울하고 무겁게 만든다면, 그것은 '나쁜'것이다.(p.513~514)

 

 

 

이것은 내가 마침 책을 읽을 타이밍에 눈에 쏙 들어와서 표시한 주관적인 발췌내용들이다.

 어떻게 발췌한 내용들이 다 연결되어서 하나의 스토리가 만들어지게 되는데,

이건 딱히 내가 의도한 것은 아니다.

이보다 더 훌륭하고 좋은 내용이 책에 많다 :)

그대가 발췌한 내용으로 새로운 스토리를 써보는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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