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가을비 이야기
기시 유스케 지음, 이선희 옮김 / 비채 / 2023년 10월
평점 :
아무래도 지금은 겨울에 더 가까운 것 같지만 이상기온에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어제 분위기 잡고 밀실살인의 대가 기시 유스케 작가님의 호러 신작 <가을비 이야기>를 완독했다. 기시 유스케 작가는 호러, 미스터리, SF를 아우르는 장르문학의 베테랑인데, 내가 처음 읽었던 <유리망치>가 워낙 인상이 깊어서인지 (아직도 난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제목이 스포일러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는 점을 분하게 생각한다) 이 책에 수록된 네 편의 호러 단편을 읽으면서도 기시 유스케스러운 미스터리 반전에 대한 갈증을 느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그 필력이 어디 가나, 다음 장이 궁금해지고 또 그 다음 장, 그 다음 장, 내 의지와는 상관 없이 빨려들어갈 정도로 재미있었다. 특히 일본 괴담, 일본 요괴 문화(?), 일본의 전통 양식 등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더더욱 좋아할 것이, 가을비 내리는 외진 신사의 마당에 나타난 기모노를 정갈하게 차려입고 종이 우산을 들고 있는 구미호가 붉은 눈 빛내며 들려줄법한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무섭고 공포스럽다기보다는 으스스하고 초자연적이라 기괴한, 그런 소름 돋는 맛의 단편 모음이다.
🤍 아귀의 논
옛날 드라마 시리즈 <기묘한 이야기>에 나올 법한 가볍고 유머러스 한 괴담류다. 회사 수련회에 간 주인공 미하루는 호감이 있던 남자 선배와 단 둘이 긴 산책을 하게 되고, 선배는 연애를 하지 못 하는 저주에 걸렸다고 토로한다. 미하루는 선배의 저주를 자신이 풀어주겠다고 결심하는데, 그 결과는?
🤍 푸가
의학적으로 "해리성 둔주" 혹은 "배회증"이라고도 부르는 이 정신질환은 주제와 주제의 변형으로 이루어진 음악 스타일과 동음이의어이기도 하다. 해리성 둔주 환자는 일시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거나 존재에 대한 지각을 잃어버리기도 하며 평소 생활 반경에서 크게 벗어나기도 한다. 소설 작가 아오야마의 연재 원고 마감을 기다리고 있는 편집부의 마쓰나미는 곧 아오야마가 해리성 둔주를 겪는데, 일반적인 형태가 아니라 영혼이 배회하고 몸이 순간이동하듯 이끌려 가며 차원이 뒤틀리는 것이다. 그는 이 둔주를 막기 위해 벽을 납으로 두르기도 하고 사람을 쓰기도 하는데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작품 초기부터 상당히 눈에 띄게 거슬리는 '그 물건' 이 결국 핵심적인 물건으로 드러났다.
🤍 백조의 노래
음악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노래를 '잘 한다'를 넘어서 '저런 소리는 어떻게 내는 거지' 싶은 경험을 할 때도 있다. 몽골의 '후미' 창법이 그렇고, 노래는 아니지만 남아프리카의 Xhosa 나 Zulu 등의 Click 언어가 그렇고, 이 단편에서는 미쓰코 존스라는 무명 가수가 두 개의 목소리로 동시에 노래하는 기법을 쓴다고 서술되어 있다. 목감기가 심할 때 평소의 목소리 이면에 그릉거리는 떨림이 따로 있는 것과 원리는 비슷한데 이를 음악으로 승화시켰다는 것이다. 미쓰코 존스에 대해 조사를 의뢰받은 용역이 돌아와 같은 창법을 쓴 다른 가수를 찾았다며 발표를 하는데, 둘 다 유작으로 남긴 오페라 <라크메>의 "종의 노래" 라는 아리아를 더 잘 부르기 위해 어떤 사막을 찾아가서 악마를 만났다고 한다. 과연 이 악마의 정체는?
🤍 고쿠리상
고쿠리상은 일본의 미신이자 미신의 대상이자, 미신에 대한 행위다. 분신사바와 서양의 위저보드 (Ouija board) 를 합쳐놓은 것 같은데, 일본의 50음도와 숫자가 쓰여져 있는 판 위에 동전을 올려 질문자 여럿이 함께 동전 위에 손가락을 올리고 동전이 움직이면서 가리키는 글자로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얻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 단편에서 제시한 고쿠리상의 '다크 버전'은 인생의 끝바지에 내몰린 사람들에게 고쿠리상이 삶을 뿌리째 뒤집어 엎을 새로운 조언을 해 주지만 그 중 한 명은 반드시 목숨을 잃는다. 저마다 인생의 벼랑끝까지 몰렸다고 주장하는 네 명의 초등학생이 모여서 고쿠리상 의식을 행하게 되는 이야기.
기시 유스케 작가는 나에겐 '우선순위' 목록에 있는 작가 중 하나다. 항상 이 작가의 신작이 출간되는지 눈여겨 보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