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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과 살인귀
구와가키 아유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3년 11월
평점 :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현타'를 느끼며 책의 반 정도를 다시 읽었다. 내가 순진한 걸까? 살면서 수 많은 사기꾼을 만났는데도 한 번도 사기를 당하지 않았던 나인데 작가 구와가키 아유의 서술트릭에 보기 좋게 당해버렸다. 그래, 한 장면에 곰돌이 인형옷을 입은 사람과 그를 둘러싼 망치를 든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그 다음 장면에 등장하는 곰돌이 옷을 입은 시체가 '그 사람들'이 죽인 '그'라는 법은 없지. 하지만 이런 종류의 패배는 얼마든지 환영이다. 레몬 치킨 소테처럼 경쾌하고 현대적인 이야기를 언덕 위 저택의 파티장에서 몰입해 듣고 있었는데 갑자기 작가가 참석한 사람들을 거대한 고무 공 안에 쑤셔넣더니 그대로 언덕의 급경사를 향해 뻥 차서 굴려버렸다. 위가 아래고 아래가 위인지 분간 할 수 없이 엎치락 뒤치락하는 반전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고 언덕의 아래에서 겨우 일어나보니 거기에서 기다리던 것은 정말 뜻밖의 범인이었다. 페이지를 보니 10쪽도 채 남지 않았다. 그 안에서 쏟아진 소름끼치는 진실을 듣고 나니 비밀을 다 아는 시각으로 책을 다시 읽었어야 했다. 정말 이렇게 달라 보일 수가. 1+1으로 소설을 즐긴 기분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선형적인 추리소설이다. 누군가 살해 당했고, 그를 누가 죽였는지 알아내야 한다. 세간에서는 살해당한 여동생이 보험 사기 연쇄살인마라서 보복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떠돌고, 왠지 주인공 미오를 도와주겠다고 다가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수상한 구석이 있다. 분명 범인은 연쇄살인마일텐데. 그리고 살인귀의 촉수가 미오의 코 앞까지 뻗어온 시점에 목가적인 풍경화 겉면의 물감이 말라 떨어지며 등장하는 인물들 저마다 내면에 가지고 있는 비뚤어진 욕망과 본능이 조명된다.
색깔과 향기는 조금씩 다르지만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는 사건의 중심이 되는 살인귀 이외에도 기괴하릴만치 비딱한 폭력성과 잔인함을 지닌 사람들이 많다. 섬뜩한 상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이 양상은 많은 일본 소설에서 등장하곤 해서 정말 이렇게 엽기적이고 변태적인 심리를 가진 사람이 흔한 것인지 궁금해졌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잔인하고, 일상적인 장면조차 괴기스럽다. 각 등장인물의 속이 드러나는 과정의 완급과 인물의 심리묘사가 [레몬과 살인귀]의 가장 큰 장점이라 하겠다. 가정폭력이 등장한다. 연인간의 뒤틀린 욕구가 고개를 든다. 누군가에겐 아주 합리적인 이유 때문에 또 다른 누군가는 목숨을 잃는다. 띠지에 "너를 벨 날을 기다렸어" 라는 표현이 읽기 전에는 조금 어색하게 들렸는데 책을 다 읽고 나니 정말 정확한 단어 선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베는 것이 유일한 목적인 살인귀. 사이코패스가 보기에 사이코패스의 정석 같은 인물이다. <심리죄>의 주인공 팡무를 데려와서 이 살인귀를 인터뷰 하도록 시키고 싶었는데 이 책을 읽은 일요일처럼 이야기는 아쉬울 만큼 빨리 끝나버렸다. 주인공이 탐정이 아닌데 후속작을 기대하는 것은 욕심일까?
그리고 다소 웹소설 같이 가벼워 보이는 제목에서 '레몬'이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줄거리를 끌어간다는 의미에서는 중요한 개념이 아니지만 소설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모든 것을 중심적으로 상징하는 대상이라는 점에서는 중요하다. 아쉽게도 현재 구와가키 아유의 데뷔작 포함 다른 저서들은 한국어로 출판되지 않은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