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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만들다 - 특별한 기회에 쓴 글들
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희정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9월
평점 :

세계적인 학자이자 작가인 움베르토 에코의 지난 10여년동안 강연과 신문, 잡지 기고문 등을 통해 발표했던 글들을 모아놓은 작품집인 <적을 만들다 : 특별한 기회에 쓴 글들>이 출간되었습니다. 워낙 방대한 양의 백과사전적 지식을 겸비한 그의 이런 작품은 이전에도 <미네르바의 성냥갑>이나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등과 같은 작품들이 있어서 이번에도 그런 종류의 작품이려니 하면서 읽게 되었죠.
"적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치 체계를 측정하고 그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 그것에 맞서는 장애물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다. 따라서 적이 없다면 (적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움베르트 에코의 이 작품을 내놓게 된 가장 큰 시발점이자 의문을 같게 된 계기는 어느날 뉴욕에서 만난 파키스탄 출신 택시기사가 던진 '당신의 적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참.. 대단합니다.) “적을 만들다.” 사랑하며 살기도 짧은 삶인데 왜 적을 만들어야 하는 것일까. 움베르토 에코는 이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적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치 체계를 측정하고 그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 그것에 맞서는 장애물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다.” 에코는 또한 ‘우리’는 “우리를 위협하는 적을…만들어 내서 악마로 만든다.”고 말하고 있죠.
'우리에게는 적이 없다'고 한사코 부인하던 에코는 자신의 조국 이탈리아가 과거 60년 동안 제대로 된 '외부의 적'을 두지 않은 까닭에 끊임없이 서로 싸워야 했던 현실을 깨닫게 되었고, 이것이야말로 이탈리아인들에게 불행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시작된 사유는 마녀 사냥이나 유대인·흑인 배척으로 대표되는 역사 속의 '적 만들기'가 어떤 이들을 대상으로 어떤 방식을 통해 이뤄져 왔는지를 분석하는 단계로 이어지며, 본능적인 적의 필요성 앞에서 무력해지고 마는 우리의 도덕관념에 대한 논의로까지 뻗어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참... 보통사람은 그런 종류의 질문을 가지면 그저 단순하게 생각하기 마련인데 이 양반은 참... 좋게 말하면 대단한거고 아니면 인생 참 복잡하게 사는 분인거 같습니다.)
'적을 만들다'를 통해 에코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인간 본성의 근원에 자리한 '악'이라고 합니다. 에코는 우리들은 적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사람들 꼭 있죠.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증오하지 않으면 삶의 의미와 목적이 없어져서 끊임없이 미워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그런 사람이 있듯이 적 만들기의 극단이라고 할 수 있는 살육과 전쟁이 세계 곳곳에서 현재진행형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한 에코는 적을 만들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평화를 사랑하는 온순한 사람에게도 적의 필요성은 본능적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단지 적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들을 증오하지 않음으로써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끔찍한 지옥인 상황”을 다소나마 누그러뜨릴 수 있다고 말하고 있으며, 그 적 만들기의 최종적 끝판은 살육과 전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전쟁만이 계급 간의 균형을 보장하고 반사회적인 요소들을 해결하고 이용하게 한다. 평화는 젊은이들의 불안정과 비행을 생산하지만, 전쟁은 그들에게 '지위'를 부여하면서, 통제하기 어려운 모든 힘을 가장 정당하게 사용하는 길로 안내한다. 환경적인 시각에서 볼 때, 전쟁은 잉여 생명체들을 배출하는 배기관 역할을 한다." (P.37)
이 책에는 모두 14편의 글들이 모여 있는데, 한 저자의 글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각각 독립적인 주제와 내용, 접근방식 등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이 14편의 칼럼이 다루는 주제들은 '불꽃'에서부터 '교회의 보물', '배아줄기세포', '위키리스크'에 이르기까지 놀랍도록 독립적이며 너무 방대하고 깊이있는 내용들로 다루어져 있어서 다채롭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과연 이번에도 참 읽으면서 한권의 책 읽는게 이렇게 힘들구나 라는 좌절감을 안겨준 에코의 책... 방대하고 광범위한 지식의 취합과 치밀한 사유로 엮어내는 솜씨는 그대로이지만 가볍지 않으면서도 읽는 이의 지적 호기심을 놓지 않게 만드는 배려 또한 세심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기호학자이며 철학자이자 미학자이면서 살아있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저자인 에코가 이번에도 우리 독자들에게 선사해 준 일종의 한권의 종합선물세트 같은 작품이라고 볼 수 있었던 보람있고 의미있는 책이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