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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역사 - 언젠가 어디선가 당신과 마주친 사랑
남미영 지음 / 김영사 / 2014년 3월
평점 :
‘사랑이 밥 먹여주냐’는 힐난은 몇 가지 맥락에서 쓰여왔다. 자식의 결혼을 반대하는 TV드라마 속 부모들이 자주 구사하는 클리셰이자, 실연의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친구를 향한 안타까운 호통이자, 땅거미처럼 드리우는 고독을 고백한 술자리에서 ‘먹고살기도 바쁜데 배가 불렀군’ 하는 표정과 함께 돌아오는 핀잔이기도 하죠. 무엇보다, 취업난으로 연애와 결혼과 출산을 포기한다는 ‘삼포세대’에는 저 모든 맥락을 따지지 않고 적용할 수 있는 문장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류가 구축해온 장구한 역사 가운데 사랑의 역사만큼 ‘고요히 역동하며’ 지속되온 게 또 있을까 싶습니다. 전문가들이 사회·문화와 경제 구조의 변혁을 야단스럽게 구분하며 인류사를 고쳐 쓰는 가운데서도, 인종과 남녀와 노소를 가리지 않고 전 인류의 일기장 속에 켜켜이 쌓여온 것이 사랑의 역사라고 합니다. 사랑은, 세상 그 어떤 난리 통에서도 지독하게 움터왔으며, 세상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은 인간의 일생에도 전설의 웅덩이처럼 고여 있습니다. 정말 사랑이 밥도 죽도 주지 않는다면 이 질긴 역사가 가능할 수 있었을까.
“우리 시대에 사랑하고 사랑받기가 이토록 어려운 것은 우리가 사랑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랑은 우리가 탐구해야 할 학문이며, 배우고 가르쳐야 할 가장 중요한 공부이다.” - 프롤로그 ‘아무도 우리에게 사랑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중에서.
첫사랑의 로망을 담은 단편소설 중 황순원의 '소나기'만큼 걸작은 드물다고 합니다.
남미영원장이 서울 강남의 한 중학교 학생들을 만나 황순원의 '소나기'에 대해 수업했을 때의 일입니다.
그는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이 소년은 좋아하는 여자가 죽었지요? 그 사실을 안 순간 소년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반장이 손을 들었습니다.
"이제는 다른 여자를 사귀겠다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남원장은 경악했다.
다른 학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 생각에는요. 이제는 건강한 여자를 사귀어야겠다고 생각할 것 같은데요."
그때 그는 깨달았다고 합니다.
아무도 그들에게 사랑을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것을….우리는 사랑을 배운 적이 없다는 것을.
부모님은 과외공부는 시켜주면서도 사랑은 가르쳐주지 않았고, 학교는 외국어와 방정식을 가르쳐주고, 먼 우주에 대해서도 가르쳐 주었지만 사랑만은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가 펴낸 이 책 <사랑의 역사>는 이러한 자각에서 출발한 책이라고 합니다.
책에는 1597년 출간된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시작으로 2012년에 나온 정이현의 '사랑의 기초'까지 동서양에서 발표된 34편의 사랑 이야기가 실려 있으며 시대와 세대를 초월한 34편의 작품을 선별해 사랑의 가치와 의미, 성장과 인생에 관한 이야기들을 엮고 있습니다.
남 원장은 이들 작품 속에서 사랑에 울고 웃는 주인공뿐만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사회와 환경, 가족과 성장사를 통해 그들의 사랑이 왜 성공하고 실패했는지 날카롭게 분석하고 있으며 또한 현실에 있는 우리의 사랑이 왜 이렇게 힘든지 문학 속 주인공의 삶에서 답을 찾아 내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지금 우리에게는 ‘사랑의 가치혁명’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사랑이란 나를 찾아가는 여행이다. 너를 통해 나를 알아가는 과정. 너와의 사랑이 아니었다면 까맣게 모르고 살았을 나의 오만과 편견, 네가 아니었으면 영원히 몰랐을 깨진 그릇같이 날카로운 질투와 분노. 너를 사랑하지 않았으면 발현되지 않았을 나의 허영심. 너는 나의 거울. 그러므로 사랑은 돌아와 거울 앞에 선 서정주의 ‘누님의 거울’이다. 이런 자기 발견은 십중팔구 결핍의 발견이고, 이 결핍은 상처가 된다. 그러나 상처의 발견은 사람을 겸손하게 하고 성장시킨다.”
독자들은 그들의 성공과 실패를 읽으면서 자신의 인생을 미리 예행연습 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톨스토이, 제인 오스틴, 알랭 드 보통 등 시공을 초월한 작가 34명이 들려주는 사랑의 강의이며, 사랑을 배우지 못하고 인생에 뛰어든 젊은이들에게 바치는 일종의 '사랑의 교과서'라고 합니다.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에서는 인생의 여명기에 찾아온 허무한 사랑이 우리 인생에 놓인 행운의 시작이었음을 발견하고, 가브리엘 루아의 '싸구려 행복'에서는 가난을 벗어나려는 여인의 처절한 몸부림을 들여다보며 우리가 아는 행복이란 철저히 현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오만과 편견'에서는 낭만과 열정을 발견하는 대신 수백 년이 지나도록 변하지 못한 결혼 시장의 모순을 폭로하고 있죠.
또 다른 남자에 맹목적으로 헌신하는 서영은의 '먼 그대'에서는 짓누르는 현실에 반항하지 못하고 작아져 가는 우리 시대 젊은이들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문학 작품 속 사랑을 ‘첫사랑’ ‘열정’ ‘성장’ ‘이별’ ‘도덕과 결혼’ 등으로 나눠 소개하고 있긴 하지만, 그 모든 게 날줄과 씨줄로 촘촘히 엮여 펄럭이는 것이 사랑이란 걸 알게 됩니다. 다만 사랑과 더불어 문학 자체를 사랑하는 독자들에겐 저마다의 사랑이 지닌 고유한 빛깔과 향기를 시대와 사회 속에서 따뜻이 비춰주는 저자의 환대도 함께 느낄 수 있습니다. 예컨대, 요리를 만드는 여주인공의 레시피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지만 ‘끓는 기름 속에 들어간 도넛 반죽처럼 뜨거운’ 사랑의 맛을 에로틱하게 담아낸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시와 사랑의 동질성을 소재로 인생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등은 격정과 비극으로 버무려지지 않더라도 얼마나 다양한 방식의 러브스토리가 존재할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또한 200명의 여자와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사랑을 반복하는 남자 주인공이 등장하는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존재의 가치를 말하기 위해 사랑이라는 은유를 사용하고, 철학에 다가가는 새로운 프리즘을 제시한다고 설명하는 부분은 오래전 청춘의 한 구석을 아프게 파고들었던 소설의 첫 장을 다시 펴게 만들죠. 과거의 사랑이, 돌아보는 순간마다 달리 빛나듯, 사랑에 빠진 소설의 주인공들도 나긋한 목소리를 통해 예전과는 조금 다른 느낌으로 말을 걸어오는 듯 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전문직 신랑감’ ‘1등 신부’ ‘공무원 다수 확보’ 등의 문구를 아무렇지 않게 내걸고 있는 결혼시장이 소시장과 흡사하다고 일갈하는 엄중함도 감추지 않고 있습니다. 집과 땅과 차가 인간의 자연스러운 사랑을 방해하는 물질주의 사회 속에서 위대한 개츠비의 ‘데이지’처럼 뒤틀린 사랑을 사랑이라 착각하는 현대인의 불행을 탄식합니다.
“꽃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꽃에 물 한 방울 주지 않는 사람이 꽃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듯이,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상대방을 무시하고 학대하는 사람의 사랑은 결코 사랑이 아니다.” 저자는 작품 속의 사랑들이 외부의 손이 닿자마자 흩어져 길을 잃을 때마다, 사랑을 ‘학문’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독일의 철학자 에리히 프롬에게 도움을 받았다고 전합니다. 프롬은 그 유명한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을 잘하기 위해선 사랑의 본질을 파악해야 하고 이에 걸맞은 훈련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죠. 사랑은 상대방과 나의 생명을 성장시키는 활동이자 결의이고, 판단이자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저자 역시 34편의 소설 속 사랑을 돌아보는 여정의 말미에 이르러, 누군가를 갈망하는 자체는 아직 사랑이 아니며 그 갈망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자라게 할 때 비로소 ‘사랑’으로 승격한다고 말합니다.
책을 덮고 나면 내가 지금껏 ‘사랑이 주는 밥’을 얼마나 끈덕지게 먹고 살아왔는지, 그리고 어쩌면, 사랑이 밥 먹여주는 세상이야말로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세상이 아닐까 돌아보게 됩니다. ‘사랑이란 그 사람만 보이고 다른 것은 모두 배경으로 물러나는 것’이라는 ‘오만과 편견’의 명대사처럼, 이 책을 읽는 내내 세기의 문학을 가로지른 사랑들이 배경으로 물러나고 ‘나를 지나간 사랑들’이 전면에 떠오르는 황홀한 경험을 할지도 모릅니다. 아직도 ‘사랑이 밥 먹여주냐’고 쿨한 척하는 누군가에게 (그를 사랑하고 있다면 더욱) 선물하고 싶은 책입니다.
"사랑의 본질을 모른 채 하는 백 번의 사랑보다 사랑의 본질을 알고 하는 한 번의 사랑이 더욱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