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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이 이야기는 따로 주제를 두고 심층분석란에 올리려고 했었다. 했었는데, 어쩐지 좀 더 지식을 쌓은 다음에 쓰는 편이 좋을 것 같아 뒤로 미루기로 했다. 그 전까지 잊지 않기 위해 대강 생각난 부분들만 끄적여보도록 하자. (요즘 건망증이 생겨서...;;)

신과 인간, 인간이 받드는 신.

철학에 관련된 교양 수업을 들어서 유일하게 좋았던 점은 좀 더 다른 식으로 신화에 대한 사상을 살펴보게 되었다는 점이다. 아니, 다른 시각을 가졌다기 보다 다소 정리가 된다고 할까-_-;;;;; 무의식적으로 이럴 거라고 두리뭉실하게 느꼈던 점을 좀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신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추상적인 존재이다. 직접적으로 인간과 신이 접촉하는 것은 자연적인 재앙과 재해, 즉, 인간이 눈으로 보되 제어할 수 없는 대상이 바로 신이라는 존재이다. 그리고 인간은 제어할 수 없는 거대한 자연의 흐름 뒤에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있음을 믿고, 그 존재를 통해 재해에 대한 두려움을 잊고자 했다. 다르게 보면 신이란 두려움을 이루는 존재라고도 볼 수 있다.

인간의 공포에 대한 정의 중에서 그런 것이 있다. 인간이 눈으로 볼 수 없으며, 이해할 수 없으며, 해독할 수 없기 때문에 제어할 수 없는 것이 공포라고. 그런 의미에서 신 역시 공포의 대상이자 주체가 된다.

하지만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인간이 선택한 것을 스스로 '신'이라 불리는 자연과의 접점을 만들어 협상을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공포가 제어할 수 없음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라면, 조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 공포를 제어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 신앙이고 숭배의 역사이다.

고대 인간들이 제물을 바치는 행위는 신에 대한 교섭의 대가물로, 이를 통해 기원을 이루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시대에 가장 성스럽게 여기는 것을 주로 제물로 바치는데, 피는 생명력의 상징으로, 곡식은 풍요의 상징으로 바쳐졌던 것이다.

즉, 거대한 자연의 흐름에서 '신'이라는 고정된 형체를 만들어 낸 것이 신앙이라고 볼 수 있다. 무한한 가능성을 한정된 '존재'로 만들어 내어 인간의 시각에 가깝도록 한 것이다.

이에 대해 음양사에서는 '이름'에 대한 명제를 두고 얘기를 하고 있다. 이름이란 '천명', 물체가 세상에 태어나 가지게 되는 '소명'이라고 한다. 하늘이 지어준 자신의 근원이자, 운명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이름'이란 타인이 자신에 대한 속박인 대신에, 타인을 구속할 수 있는 명제가 될 수 있다. '언령'이라는 단어처럼 말이 힘을 갖는다는 의미도 이런 사상에서 출발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떤 대상'을 구체적인 '이름'으로 속박하여 그 근원적인 운명을 제어하고 다스릴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자연이라는 거대한 존재 역시, '이름'이나 '대상'으로 규정하여 제어하고 다스릴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나무나 자연의 신체에 대한 신앙이 이런 사상의 한 형태라고 보면 된다. 산이나 나무, 깃대, 돌무지, 새 등 공통적인 특질을 가진 대상이나, 강이나 수맥과 같은 자연의 한 현상을 두고 신으로 정의내리기도 한다. 전자의 경우 '위를 향하여 솟아오른' 형상을 가지고 있기에 하늘을 상징하며, 인간의 뜻을 하늘에 전하는 존재이자 하늘을 대변하는 신체로 보고 있다. 후자의 경우 인간이 자연과 공유하고 있는 대상에 대한 숭배로 볼 수 있다.

이는 공통적으로 자연물에 대한 숭배이며 가장 오래된 민간 신앙의 한 뿌리이다. 그리고 이것이 좀 더 발전된 형태가 반인반수와 같은 신과 인간의 혼성체이며, 신화적 세계에서 인간 중심의 사회로 발전하는 과도기적인 단계에서 흔히 나타나게 된다. 대표적으로 중국 신화에 나오는 창세신인 여와와 복희의 경우를 보면 인간의 상체에 뱀의 하체를 가진 신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 후에 인간 중심의 문명을 기반으로 나타난 것이 인간의 형상을 한 신의 형태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가 그러하였고, 화신으로 인간 세상에 내려오는 구세주와 부처가 그런 경우이다. 그러니까 근원적으로 따지면 같은 맥을 따오고 있지만, 세계를 보는 시각의 중심이 이동하면서 우리는 인간의 형태를 한 신의 모습을 숭배하게 된 것이다.

이렇듯 시대와 문화에 따라 신앙이나 숭배의 대상도 변해가게 된다.

어쨋든 이런 얘기는 제외하고-_-; 신화나 신앙의 형태도 나라와 민족마다 각각의 차이를 보이게 된다.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그런 민족이 가진 신앙이 어떤 형태로 만화에서 다루어지느냐 하는 점이다. 민간 신앙은 무시하거나 원시적인 세계관의 한 형태가 아닌, 가장 근원적인 믿음의 한 현상으로 봐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이런 신앙의 형태는 인간의 행동과 사물에 대한 사상을 통해 민족 특유의 가치관을 드러내준다. 일제 치하에서 일본인들이 굳이 미신이라하여 민간 신앙을 배척하도록 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는 그만큼 민간 신앙의 형식을 통해 민족이 가진 고유의 특성이 전승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대중적이면서 보편적인 형태를 하였기 때문에 우리 민족의 정서를 드러낸 문화로서 보존해야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우습게도 신라 시대만 해도, 불교는 민간 신앙과 혼용되어서야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그만큼 우리 민족이 중요하게 여겼던 가치관이자 생활의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신앙점이었다. 고대인들이 소중하게 여겼던 것을 우리는 어째서 이토록 홀대하는 것인가-_-; 일본도 재미있는 점이 자신들은 민간 신앙을 그토록 중히 여겼으면서 우리 나라에서는 미신-미완성된 신-미혹할 존재로 매도하였는가. 답은 이미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민간 신앙을 한의 문화라 한다면, 일본의 문화는 기의 문화이다. 그러니까 한국은 귀신을 보고 대하는 것의 기반이 원한과 업, 전생의 죄, 운명의 풀이와 기원이라고 하면, 일본은 엄격히 구분된 세계 위에서 서로가 공존하며 기원을 바라는 문화라고 생각한다. 물론 두 나라가 다른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둘 다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기원을 하는 점이라든지, 자연 속에 존재하는 영혼들을 신으로 보거나, 그 선악에 따라 귀와 신으로 구분하는 점 등 유사한 부분도 분명 있다.

어쨋든 우리나라의 만화를 중심으로 해서 먼저 얘기를 꺼내어 보자.

대표적으로 꼽는 것(이라기보다 가장 먼저 떠오른 작품;;)은 강경옥님의 '두사람이다'라는 작품이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전생의 업으로 인해 집안 대대로 내려온 저주를 여주인공이 풀어나가는 이야기이다. 이를 보면 현재가 아닌 '전생의 한과 업'으로 인해 가문 대대로 저주를 받고 있다. 여기서 나온 한과 업은 불교에서 다루어지는 윤회 사상을 기반으로 한 것이나, 굿이나 무당과 같은 요소라든지 이무기와 같은 자연신과 같은 것은 민간 신앙의 한 형태이다. 때문에 우리나라의 민간 신앙의 요소들을 보면 불교와의 동화가 상당히 깊이 이루어져 있다.

잠시 딴 얘기를 하자면; 뱀이 악의 신이자 죄악의 상징이 된 것은 여성 중심의 사회에서 남성 중심의 사회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나타나게 된 특징이다. 뱀은 끝없는 순환의 고리로 자연의 생명력과 주기를 상징하며, 대지의 여신을 상징하는 것으로 풍요의 신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여성이 아닌 부계의 혈통을 중요시하게 되면서 땅은 하늘에 종속된 형태로 뱀은 신에 의해 굴복되어야 할 악으로 규정되어졌다.

그리고 한과 업을 들어서 알 수 있듯이 우리에게 귀신이란 어둠의 것으로 음울하고 저주 받은 것으로 인식되기 쉽다. 영혼이 나타나는 것은 '한'을 풀거나 어떤 '집착'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며, 이를 풀어주기 위한 굿을 한다. 즉, 인간의 죄를 신의 힘을 빌어 풀어내는 동시에 기원을 한다. 또한 전생에 어떤 업을 가지고 있더라도 현세에서 덕을 쌓아 업을 풀어나간다는 사상 역시 가지고 있는데 이는 불교에서 나오는 카르마와 다르마에 기반한다.

신은 어떠한가. 우리네 어머니들은 장독간에도 신이 있으며, 대들보와 뒷간에도 신이 있고, 마루에도 신이 있는, 생활 구석구석에 신이 있어 인간이 사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기록을 하늘에 올려 선에 대해서는 복을, 악행에 대해서는 업을 내린다고 한다. (이는 중국의 민간 신앙과도 유사한 점을 보인다) 신이 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지만, 이는 인간보다 위에 서서 인간을 판단하는 척도가 된다. 숭배해야할 대상이면서 가벼이 여길 수 없는 말 그대로의 신이다.

강과 바다에도 용왕이 산다고 믿으며, 조상들의 영혼마저 신으로 받드는 우리의 민간신앙은 다양하나 폐쇄적인 형태를 하고 있다.

말리님의 도깨비 신부를 보자. 여기서 여주인공이 무녀의 피를 가진 것은 숨겨야할 사실이다. 귀신의 딸이라 하여 배척되어야 할 대상이며, 결코 일상 생활을 같이 할 수 없는 아이로 취급된다. 우리들은 신을 집안으로 들이면서도 그 경계를 넘지 않는다. 신을 받는 것은 신성한 능력이 아닌 하나의 '업'이고 불행을 대가로 한 행위인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민간 신앙은 신을 믿으면서도 배척하는 마음 역시 가지고 있다. 이는 일제의 정책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인간 중심의 사회로 가는 동안에 당연히 나타나는 현상일지도 모르겠다.

일본은 신사 라든지 신앙 자체가 생활에 무척이나 가까이 연계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든 설날 대참배 행렬이라든지, 액땜 의식이라든지. 그런 행사들을 공개적으로 온국민이 즐긴다는 것 자체가상당히 개방적으로 보인다. 일본의 기의 문화라고들 한다. 기는 기원하다. 언제 어디서나 쉽게 기원하고, 믿음을 가지며, 참배를 한다. 세대에 관계없이 신사에 가서 부적을 걸고 소망을 바라는 기원 의식. 이 점이 우리와 그들의 가장 큰 차이가 아닐까. 덮어두지 않고 오히려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하나의 문화로 만든 것이다.

그들에게 신이나 귀는 결코 멀리 있는 존재들이 아니다. 백귀야행이라든지, 세상이 가르쳐 준 비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일본에서 귀나 영혼은 말 그대로의 영혼일 뿐이다. 인간과 같이 대화를 할 수도 있고, 농담을 즐기며 우리의 도깨비들 처럼 인간에게 장난을 치기도 한다. 두려워하지 않으면 극복할 수 있는, 넘어서기 힘든 대상이 아닌 공존자의 위치에 가깝다. 그러나 두 세계는 판이하게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이들은 서로 간의 세계만은 침범하지 않는다.

최근에 나온 샤먼 시스터즈 역시 이런 류의 작품 중 하나이다.

어쩐지 우리나라에서는 민간 신앙을 전설이나 민담으로만 받아들이는 반면, 일본에서는 좀 더 현실적인 눈으로 보려는 성향이 있다고 할까. 기생수의 작가가 그린 칠석의 나라라는 작품을 보면 한 마을에서 전해내려오는 전설을 또 다른 문명의 자취로 하여 색다른 눈으로 그려내었다. 어쩌면 그렇게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 너머에 있는 또 다른 관점으로 해석을 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지옥 선생 누베라든지 하는 퇴마물 쪽은 논외로 하자;;

 

*2004년도에 작성한 글입니다. 개인 홈과 블로그에 있던 글을 옮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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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뇌]란 무엇인가.
과연 뇌는 인간에게 있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사람의 모든 것은 [뇌]로부터 지배 당하고, [뇌]에 의해 자신의 존재를 확립시킨다. 기억과 지식, 차갑고 뜨거운 일상적 감각조차도, 우리는 이 [뇌]라는 비밀스런 기관에 의해 판단을 내려야한다.

생명은 무엇으로부터 탄생하느냐고 묻는다면, 인간의 근원이 어디서부터 생성되었느냐-까지 언급되어야 할 것이다. 만약 뇌가 인간의 근원이 아니라면, 우리는 하나의 작은 단위인 세포에서 DNA, 그것을 탄생시킨 어떤 신비스런 창조력에 대해 고민해야만 한다. 무엇이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일 수 있게 만들고,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가.

모든 것은 [뇌]가 알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뇌]야말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궁극의 영역이라 말한다. 인간의 모든 능력은 [뇌]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달린, 신이 있다면 그 신으로부터 인간이 부여받은 힘이 여기에 숨어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 [뇌]로부터 인간이 [지배]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는 하나의 의문을 추가시키게 된다. 그렇다면, 신이 아닌 인간이, 인간의 뇌를 움직일 수 있다면? 그를 지배하게 된다면? 이제 인간의 가상 세계라는 초공간적인 형태로만이 아닌, 뇌라는 실질적이며 현실적인 두려움을 인식해야만 한다. 나의 [뇌]는 믿을 수 있는가? 여기서부터 인간의 존재론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소료 후유미의 [영원의 안식처]는 [뇌]라는 소재를 사용하여 이런 원초적인 두려움을 끄집어내고 있다. 유전자 조작에 의해 탄생된 인간. 그리고 그 능력으로 타인의 기억을 조작할 수 있기에 자신의 존재조차도 마음대로 만들어 낼 수 있다. 타인의 기억에 의존하여 자신을 확립시킬 수 있는 인간에게 있어 그것은 타인을 무너트림과 동시에 자신마저도 [존재하지 않는 존재]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기에 세상은 무의미하다. [나]는 누구인가-라고 물었을 때, 아무도 진실한 [나]에 대해 말해주지 않는다. 어쩌면 지금 이것조차도 조작된 기억일 수도 있기에, 기억에 의존하지 못하는 자아는 방황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원초적인 무의식의 공포가 작품 속에서 [나]를 억누른다.

이 기억을 다루는 [뇌]의 영역에 대한 만화로 시미즈 레이코의 [비밀]이 있다. 공교롭게도 영원의 안식처와 비밀은 뇌의 기억에 대하여, 뇌와 천사의 속삭임은 뇌의 쾌락에 대한 부분을 다루고 있다. 만화와 소설이라는 장르상의 구분만이 아닌 다루는 소재면에서 공통적인 분류가 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시미즈 레이코라는 작가의 특징을 말하라면, 너무나 담담하게 섬뜩한 공포감을 일깨워준다는데 있다. 달의 아이, 월광천녀, 그 외의 수 많은 단편들 속에서, 시미즈 레이코는 우리가 흘려버릴 수 있는 공포를 위로 끌어올려 무미건조한 그림체로 부각시킨다.

[비밀]은 인간의 뇌를 이용해 그 기억을 범죄 수사에 이용한다. 아무리 죽어버린 사람이라 할 지라도, 그의 뇌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의식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본 모든 은밀한 것들조차도 뇌는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비밀]이라는 것은 드러나지 않았을 때 [비밀]로서 있을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이 드러내고 싶지 않기에 비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섬뜩하지만, 그 한편으로 슬픈 기분이 들 때도 있다. 범인이 잡힌다 하더라도 이 사람은 행복할 것인가. [죽음]으로서 지키려했던 [비밀]을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철저하게 드러내진다는 것이, 그것이 정의라는 이름으로 허용될 수 있는 것인가. 인간의 존엄성과의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서 작가는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이미 오래 전 [개미]라는 소설로 익히 알려진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또 다른 소설 중 하나인 [뇌]. 이 소설 역시 제목 그대로 인간의 뇌에 대한 것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기억과는 상관없는, 인간을 궁극적인 [쾌락]으로 이끌어줄 수 있는 감각에 대한 것이다. 인간의 욕망은 그 대가가 유혹적이며 가치있을수록 성취하고자 하는 욕구가 극대화된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인간이 이전까지 사용하지 않았던 뇌의 모든 능력을 이끌어내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알고자 하는 욕망, 인체에 대한 지나친 욕망은 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오만으로 규정되고, 이는 곧 죽음으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인간에 의해 인간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은, 신이 가진 고유한 능력에 대한 침범이자, 인간이 인간으로 있을 수 있는 존엄성으로의 상호침해이기 때문이다.

기시 유스케라는 작가의 천사의 속삭임도 이런 뇌에 있어 쾌락적인 감각에 대해 다루고 있다. 국내에는 [푸른 불꽃]이라는 소설로 알려진 것 같지만, 개인적으로 신파극은 싫어하기 때문에 본인이 읽은 것은 천사의 속삭임이다. 천사의 속삭임은 공포 소설이다. 그러니까 [뇌]란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부분이자 원초적 공포와 두려움의 근원, 은밀하고 신비스런 부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천사의 속삭임은 아마존에서 들어온 미지의 바이러스가 영장류의 뇌에 기생하면서 기생한 대상의 감각을 조종하여 죽게 만든다. 이 때 기생된 숙주는 평소 두려워하던 대상에 대한 공포가 사라지고, 그에 도전함으로써 궁극적인 쾌락을 맛보게 된다. 지나칠 정도의 식욕과 성욕, 조증을 보이는 숙주들은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솔직히 이런 식의 이야기는 이전에도 접했었기 때문에 신선한 느낌이라든가, 두려움이라든가 하는 걸 느끼지 못했다. 뒤에 엄청난 반전이 있다기에 적어도 서술자가 배후의 조장자였다든지 하는 식일 줄 알았는데 싱거운 결말이었달까. 좀 허무한 공포물이었다;

어쨋든, 최근 들어 [뇌]에 대한 소재가 많이 나오길래 한 번 다루어볼 생각에 몇 가지 작품을 골라 적어보았다. 몇 년전만 해도 가상 세계나 외계의 미지 공간 등을 소재로 하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제 인간의 본연적인 공포를 파고 들어 인간이 인간이기에 만들어 낼 수 있는 실질적인 공포로 변해가는 것 같다. 과연 이 [뇌]라는 소재가 지나가고 나면 다음으로 우리가 맞닥트려야 할 공포는 어떤 것일까. 

 

*2003년도에 작성했던 글입니당. 개인홈과 블로그에 있던 글을 옮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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