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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소설을 읽으면서 처음 독특한 문체가 인상적이었다.
만연체의 문장, 라임처럼 야구의 변화구처럼 같은 듯 다른 듯 계속 이어지는 문장, 유머와 반전, ~다로 끝나고도 다시 역전되어 이어지는 문장 연결 방식 등이 이 소설의 주제처럼 모든 무거움을 몽땅 빼버리겠다는 각오처럼 보이기도 하고 동시에 헐렁헐렁 가벼워 보이는 문장들 속에 뜻밖의 철학과 무게가 담겨있어 있어 결코 가벼운 소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한다. 마지막까지 소설 자체의 힘에 이끌려 끝까지 단숨에 읽게 되는 소설, 결국 재미있었다는 말이다.
먼저 삼미 슈퍼스타즈는 ‘최하위’의 문신과 같은 존재다.
몸에 새겨져 흐르는 피처럼, 태어날 때부터 정해지는 ‘본적(本籍)’처럼 그냥 나에게 주어진 운명 같은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문신은 언젠가 ‘슈퍼맨’이 되겠다는 욕망(판타지)을 추동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어린이 팬클럽 회원으로서의 경험으로 인해 ‘나’는 ‘소속’의 중요성을 자각하고, ‘일류대’ 진학을 위해 고군분투하게 된다. 현실 세계에서 ‘일류대’라는 소속은 ‘<평범하다>는 말을 쓰는 것 자체가 낭비일 만큼 평범한’ 내가 슈퍼맨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카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류대와 슈퍼맨은 결국 판타지에 불과한 것이었고, 1998년 IMF로 상징되는 본격적인 신자유주의 시대에 낙오자가 되어버린 ‘나’는 실업자, 무직, 비정규직 등 소위 사회의 루저들과 함께 다시 삼미 슈퍼스타즈 팬클럽을 만들게 된다. 그리고 삼미 슈퍼스타즈 식의 야구를, 삼미 슈퍼스타즈 식의 삶을 살고자 한다. “필요 이상으로 바쁘고, 필요 이상으로 일하고, 필요 이상으로 크고, 필요 이상으로 빠르고, 필요 이상으로 모으고, 필요 이상으로 몰려 있는” 방식의 삶이 아니라 텅 비어서 누구나 언제나 무엇으로도 채울 수 있는 그런 낙천적인 삶을 살고자 한다. 왜냐하면 “진짜 인생은 삼천포에” 있기 때문이다. 탄탄대로가 아니라 좁고 구불구불한 ‘샛길’에 있기 때문이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호스피스 병동에서 벌어지는 삶과 죽음의 시간을 다루는 힐링 드라마 <초콜릿>의 ‘완도’라는 공간처럼 이 ‘삼천포’도 어쩐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 판타지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삼천포라는 지명이 ‘사천’으로 바뀌면서 공간은 그래도 남았지만 지명은 사라지게 된 사실과 별도로 사실 삼천포든 사천이든 이 곳 역시 신자유주의의 강력한 영향력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 더 큰 이유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겨운 세상을 살아내는 우리에게 이런 공간의 존재 자체가 위로가 될 수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문학이 주는 위안이 아닐까?
인생은 참으로 이상한 것이다. 힘들다고 생각하면 힘들고, 쉽다고 생각하면 쉽다. 이혼을 하고 실직을 당한 그 시점에서부터, 나는 서서히 인생을 쉽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자 하나씩, 하나씩 할 일들이 생겨났다. 우선 그날 이후 나는 하릴없이 하늘을 쳐다보는 새로운 습관이 생겨났고, 어느새 산보를 하며 하늘을 즐기는 것이 하나의 중요한 일과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하늘을 즐겨가면서 나는 점점 낙천적(樂天的)인 인간으로 변해갔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나는 매일매일 변해갔고,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변해갔으며, 변화를 거듭할 때마다 방주를 찾아오는 재구성된 지구의 새로운 종들을 만났다. 다섯 번째 종은 개구리밥이었다. - P241
올 여름은 왜 이렇게 긴 것일까 라는 생각을 하다가 나는 비로소, 시간은 원래 넘쳐흐르는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말이지 그 무렵의 시간은 말 그대로 철철 흘러넘치는 것이어서, 나는 언제나 새 치약의 퉁퉁한 몸통을 힘주어 누르는 기분으로 나의 시간을 향유했다. 신은 사실 인간이 감당키 어려울 만큼이나 긴 시간을 누구에게나 주고 있었다. 즉 누구에게라도, 새로 사온 치약만큼이나 완벽하고 풍부한 시간이 주어져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없다는 것은, 시간에 쫓긴다는 것은 - 돈을 대가로 누군가에게 자신의 시간을 팔고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니 지난 5년간 내가 팔았던 것은 나의 능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시간, 나의 삶이었던 것이다.
알고 보면, 인생의 모든 날은 휴일이다.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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