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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크맨
애나 번스 지음, 홍한별 옮김 / 창비 / 2019년 10월
평점 :
품절
애나 번스의 <밀크맨>과 관련된 비평에서 등장하는 말들, 즉 '성폭력과 부족주의에 관한 기민한 관찰' '여자들에게 가해져온 소리 없는 폭력에 관한 소설' '블랙 유머를 곁들인 성장소설인 한편 강간문화와 이런 사회에서 여성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를 결정적으로 그린 책' 등등
이런 평가는 1970년대 북아일랜드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소설이 사실은 지금, 현재를 다루고 있다는 점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밀크맨>은 육식동물처럼 슬금슬금 다가오며, 다양한 암시, 은유, 재현, 상징 등을 동원해서 가해지는 보이지 않는 공포를 그야말로 전방위적으로 다루고 있는 소설이다. 작가의 의식의 흐름과 유사한 서술을 따라가다보면, 우리는 끝없이 이어지는 자세한 설명이 사실 이 공포를 다양한 각도에서 다루기 위해서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과정은 객과적 묘사, 소문의 전달, 주관적 판단, 긍정과 부정, 부정의 부정 등의 수많은 언어 표현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는데, 일견 중복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사실은 주인공의 감정과 정신 상태의 변화를 생생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부족주의'라는 말이 적절한, 폐쇄적 정치 공동체 속에서 자신을 지키려고 자신의 생각을 숨기고 왜곡된 방식으로 드러내던 주인공이 어느날 스스로가 사라져버렸음을 깨닫게 된다. 그 후 가족, 친구, 애인, 이웃 등 숱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지키고 현실을 직면하면서 결국 희미하게나마 '거의' 웃을 수 있게 되는 것으로 끝나는 소설..
장장 500페이지에 이르는 두터운 책을 덮으면서 그녀와 함께 긴 숨을 내쉬게 만드는 소설,
다시 첫장을 넘겨보니, 이 이야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단단한 구조로 짜여진 소설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최소한 형식적으로 신선한 소설이었다. 언젠가는 꼭 다시 읽어볼 소설이다.
여기 사람들은 대부분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진심을 말하지 않는 한편 누가 자기 생각을 읽으려 하면 그 사람에게 가장 위쪽 마음 상태만 드러내고 진짜 생각이 무엇인지는 의식의 수풀 안에 감춘다. - P61
그런데 문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내가 알아차라지 못하는 사이에, 삶에 대한 나의 무감한 접근이 겉으로만그렇게 꾸민 가면이 아니라 점점 실제가 되어갔다는 것이다..... 감정이 표출되기를 멈춘 것이다. 그러더니 아예 사라져버렸다. 무감함이 어찌나 발달했는지 지역 사람들만 내 속을 알 수 없는게 아니라 이제는 나도 내 속을 알 수가 없었다. 내면세계가 통째로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불신, 밀고 당기기, 저격, 응사, 우회, 왜곡 등이 신체적으로도 에너지를 고갈시켰다. 사람들과 내가 최종 맞대결을 향해 멈추지 못하고 굴러가는 기분이었다. - P252
그런 식으로 일이 이루어졌다. 밀크맨이 아주 조금씩 조금씩 접근하고 잠식하고 육식동물처럼 슬금슬금 다가왔기 때문에 뚜렷하게 집어 말하기가 힘들었다. 여기에서 조금, 저기에서 조금, 어쩌면, 어쩌면 아닌지도, 아마도, 모르겠다. 계속적인 암시, 상징, 재현, 은유가 있었다. 내가 받아들인 의미가 그가 의도한 것일 수도 있지만 아니었을 수도 있었다. - P257
우리는 작은 대문을 열고 닫고 할 것도 없이 작은 산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었고 나는 초저녁의 빛을 들이마시며 빛이 부드러워지고 있다는 것, 사람들이 부드러워진다고 부를 만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저수지 공원 방향으로 가는 보도 위로 뛰어내리면서 나는 빛을 다시 내쉬었고 그 순간, 나는 거의 웃었다. - P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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