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을 읽는 기술 - 문학의 줄기를 잡다
박경서 지음 / 열린책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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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을 읽는 기술. 박경서 저. 열린책들. 2021. 7.15.





미술관에 가면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어디 그림에만 해당되는 말일까? 클래식 음악이나 대문호들의 작품들도 마찬가지이다. 마치 조선시대의 풍습이나 신분제도, 언어적 특성을 잘 모르는 외국인이 춘향전을 온전히 이해하기 힘든 것과 같다. 많은 사람들이 읽기에 도전하다가 중도에 포기하는 기독교의 성서(경)도 그러하다. 고대 근동의 문화와 언어, 인종과 종교, 음식 등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온전히 텍스트를 이해하는데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거기에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오늘날의 관점이나 과학 기술, 분석의 도구를 가지고 과거의 텍스트를 해석하고 적용하려는 시도는 위험할 수 있다. 이는 문학 작품을 읽어낼 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오늘날 고전이라 불리는 문학 작품들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공감을 주는 힘이 있다. 작가는 자신이 숨을 쉬며 살아가는 시대의 모순과 갈등을 문학이나 미술, 음악이란 그릇에 담아내는 사람이다.

오늘날 우리는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일을 거의 실시간으로 보고 들을 수 있다. 그러나 그곳에 사는 사람의 사정을 알지 못하면 공감의 정도는 약하다. 최근 탈레반이 집권한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소식이 강건너 불구경 같이 느껴지는 것과 같이 . 이런 한계를 갖고 있는 내가 무더위와 싸우며 동시에 씨름을 한 책이 있다. 박경서 교수의 신간 ‘명작을 읽는 기술’은 독자가 문학의 ‘줄기’를 잡도록 길라잡이 역할을 한다. 복잡한 문학 사조가 어렵다면 건너뛰고 저자가 간결하게 소개한 16편의 명작 브리핑을 먼저 읽어보자. 그런 다음 이성과 감성,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설명한 제1부 ‘문학은 시대를 반영한다’를 읽어 보라.

저자는 마치 미술관의 도슨트 같이 명작을 읽어내는 통찰을 들려준다. 고등학교 때 겨우 읽어낸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토마스 하디의 ‘테스’가 담고 있는 함의를 맛보는 느낌이란. 아. 그래서 수백년의 세월을 이겨내고 여전히 읽히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탐욕은 모든 악의 뿌리라고 한다. 그것이 권력이든 재물과 육욕이든 지나치면 사람의 정신과 몸까지 지배를 한다. 작가들은 동시대의 인간 군상의 양태-3차원 또는 4차원의-를 2차원의 공간에 텍스트로 저장해 둔다. 때로는 암호같은 작가의 의도를 읽어내려면 대단한 뒷공부가 필요하다.

대표적인 작품이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들이다. 율리시즈, 젊은 예술가의 초상, 더블린사람들. 조이스는 사건의 서사가 아닌 인간 의식의 흐름을 활자로 붙잡아 두기 때문에 읽어내는 것이 쉽지 않다. 멋모르고 율리시즈에 도전했다가 중단한지 249일째다. 그 이유를 박경서 교수의 설명을 듣고서야 알았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다.세상의 모든 지식을 섭렵할 수도 없을 뿐더러 그럴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다만 자기 자신에 대한 자각과 단 한번 뿐인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할지 고민하고 어제보다 오늘을 충실하게 살아내면 되는 일이다. 이런 생각과 다짐을 하기에 짐승이 아닌 사람인 것이다. 한 번 읽고 덮을 책이 아니라서, 책장 눈에 잘 띄는 곳에 모셔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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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발자크는 부모와 지식 간의 관계를 통해 가족의 도덕적 타락상을 제시한 것이 아니다. 고리오의 지나친 부성애와 두 딸의 불효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그들이 이렇게 사는 이유를 당대 사회의 구조 속에서 바라봐야 한다.
산업 혁명 이후 근대 시민 사회의 성립으로 부르주아 계급, 소위 중산층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귀족의 전유뮬이었던 교육의 기회가 그들에게도 주어졌다. 부르주아 계급 사람들은 상업이나 제조업으로 큰돈을 벌었지만, 그들의 진정한 열망은 귀족사회에 편입되는 것이었다. (121p)

계몽주의는 오랫동안 신학에 지배되어 온 인간에게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깨달음을 전파해 민중의 무지를 타파하고 현실을 개혁하고자 하는 사상으로 프랑스, 영국, 독일을 중심으로 서유럽에서 17세기에 주창되어 18세기에 확산된 이성 중심의 철학 사상이다. 계몽주의의 키워드는 <이성>과 <합리성>이다. 계몽주의자들은 기독교적 관점에서 벗어나 인간세계와 인간의 삶을 이성과 합리성에 의해 판단하게 되었다. 이들은 형이상학보다는 상식과 과학을, 권위주의보다는 개인의 자유를, 특권보다는 평등한 권리와 교육을 지향했다. (153p)

발자크가 프랑스 상류 사회의 타락한 풍경을 세밀하게 묘사했듯 이 괴테 역시 베르테르의 입을 빌려 요지경 속과 같은 궁정 귀족사회의 모습을 들추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괴테는 베르테르의 감성과 이성을 적절히 이용해 당대의 삶에 나타난 인간 소외를 비판적으로 드러내면서 사회에 대한 비판 정신을 이끌고 있다.(169p)

하루하루를 쳇바퀴 돌듯 살아가다 어느 순간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자 인간성이 상실된 섬뜩한 벌레로 변해 버려 가정에서 버림받는 모습은 바로 기계의 부속품으로 살아가다가 도태되어 버리는 현대인의 서글픈 자화상이 아니던가. 더는 돈벌이를 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 그 존재는 더러운 벌레 취급을 당하며 가차 없이 버려지고 마는 것이 현대 자본주의의 속성이다. (195p)

이분법적 사유의 해체를 그렇게도 주장해 왔던 니체와 마찬가지로 카잔차키스 역시 인간의 삶에 있어 영원히 모순되는 반대 개념에서 하나의 조화를 창출하려고 노력했다. 이분법적 사유는 세상은 선과 악, 영혼과 물질, 영과 육이 서로 대립하고 투쟁해 궁극적으로 둘 중 하나가 승리하는데 대체로 전자가 승리한다는 논리이다. 서구 사회를 지배해 온 이러한 이분법적 사유의 해체를 주장한 이가 니체였다. 니체의 사상에 경도된 카잔차키스는 서로 대립되는 둘의 조화에 매달렸다. 이런 정신이 조르바라는 인물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조르바에게 육체와 영혼은 하나로 인식된다. (40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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