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자나무
아야세 마루 지음, 최고은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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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보다 조금 큰 양장 소설책이라 골라 잡았다. 우선 표지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섬찟하다. 예쁜 치자나무 꽃망울 아래 커다란 눈 두 개가 나를 대등하게(?) 지켜본다. 7편의 사랑 이야기라는 간략한 소갯말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사랑과 관계에 대한 7가지의 은유라고 부연을 해도 알쏭달쏭하다. 이것은 소설을 한 편씩 읽어도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은유이기 때문 아닌가 한다.


소설가 아야세 마루는 1986년 생이다. 그는 초기에 리얼리티가 강한 작품을 썼으나, 독특한 상상력과 은유가 돋보이는 시도한 결과가 2017년작 ‘치자나무’이다. 작고 얇은 책이라 만만하게 생각했는데, 미로에 빠진 느낌이다. 아무래도 이런 류의 소설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일본과 일본인, 그리고 인간 내면의 본능과 자기 희생이란 사랑을 기괴한 상상력으로 담담하게 그려낸다.


분명 활자로 인쇄된 소설이지만 내가 본 ‘치자나무’는 장면 하나 하나를 이미지로 형상화하며 읽어내야 제맛이 나는 그림과 같아 보였다. 사람 팔을 떼어주기도 하고, 뱀으로 변한 여인이 남자를 잡아 먹는다. 또 몸 안에 기생하는 날벌레가 사람의 몸과 생각까지 조정한다는 작가의 상상력은 독자의 그것을 뛰어넘는다. 번역자 최고은은 ‘옮긴이의 말’에서 이렇게 작가 아야세 마루의 의도를 전한다.


“계속 믿고 싶은 것”을 하나씩 부수려는 시도였어요. 믿고 있으면 마음이 편한 일들을 하나씩 부숴감으로써, 거기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죠. 자유로우지면 더 다양한 것들이 보이고, 이해도 확장될 것 같아서요.”

(266p)


남과 여가 서로 만나 연인이 되었다가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낳아 기르는 과정을 반복하며 문명을 일궈왔다. 그 과정에서 규칙과 제도, 윤리와 규범, 종교 등이 인간을 규율했다. 우리 주변의 세계관은 ‘보편’과 ‘상식’을 강조 또는 강요한다. 그러나 작가는 본능 뿐만 아니라 보편을 뛰어 넘어서 자기 내면을 재구성하고 확장하려는 7명의 주인공들을 통해서 지금 나는 어떠한지 묻는다. 그냥 현실 순응 또는 안주하며 살고 있는지, 아니면 나를 찾는 노정을 포기하지 않고 더디지만 한걸음씩 나가고 있는지 점검해 볼 일이다.


7명의 주인공들은 그 과정이 결코 쉽지 않음을 알려 준다. 사람은 누구나 완벽한 사랑과 행복을 꿈꾸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일본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내면을 세밀화처럼 들여다 볼 수 있는 작고 단단한 소설집. 그럼에도 이 작은 책은 엄청난 에너지를 품고 있다. 마치 임계점 도달을 앞둔 그 어떤 것처럼...


강바닥은 어두컴컴했지만, 그렇기에 나는 여자의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강바닥에는 남녀의 희멀건 육신이 쌓여 있었다. 강을 건너지 못한 이들,싸움에 패한 이들, 여자에게 삼켜진 남자들, 남자에게 난도질당한 여자들의 몸이다. 고통의 시간을 마치고 보드라워진 몸들은 조금씩 삭아 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지. 남의 일 따윈 상관없었다. 더 세게, 더 빨리. 건너편에 있는 그 사람을 만날 수 있도록 물을 박찼다.

(148-149p)


들이마신 숨을 천천히 뱉었다. 두근, 두근, 관자놀이의 혈관이 올랐다. 이제 무얼 살까. 다음에는 무엇을 착취할까. 어딘가가 마비된 감각으로 가죽 지갑을 열었다. (18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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