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동화의 탈을 쓴 철학 이야기라고 확신한다. 특히 동심을 가진 아이도 아니고 성숙한 철학자도 아닌 나 같은 사람에게는 그저 모든 내용이 암호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동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도 힘든 면이 많았고, 일일이 글을 해독하려 들수록 어려워지는 기분이었다. 읽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느낌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개인적인 감성으로는 별다른 유쾌함을 느끼지 못했으며, 좋은 책으로 추천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가 이 책에 있어서 인상 깊었던 부분은 루이스 캐럴, 이 책의 저자와 앨리스 프레장스 리델, 앨리스의 실제 모델에 관련한 이야기였다. 이들의 이야기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공존할 때 더 깊은 감동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은 이내 입을 다물고,

상상 속에서 기이하고 새로운

마법의 땅을 여행하고

새나 짐승과 사이좋게 이야기하는

앨리스! 너의 부드러운 손으로

이 소박한 이야기를 받아다

어린 시절의 꿈들로 엮은

기억의 신비로운 띠 속에 놓아 주렴.

머나먼 나라에서 꺾어 온

순례자의 시든 꽃다발처럼.

 

루이스 캐럴이 앨리스를 처음 만난 건 1855년. 그가 일하던 대학에 학장으로 부임해온 핸리 리들의 어린 딸들과 루이스 캐럴은 그 때부터 우정을 쌓게 되었고,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간 그는 이 어린 아이들에게 해주었던 다양한 모험 이야기들을 하나로 합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세상에 내놓게 된다. 내성적이고 수줍음이 많았던 루이스 캐럴에게 앨리스는 특별한 존재였다고 한다. 소설 속 말괄량이 앨리스가 실존하는 아이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앨리스가 더욱 생동감 있게 느껴졌다.

실제로 소설 속 앨리스는 모험심이 강하고, 엉뚱하며, 남을 배려할 줄 알지만 자기주장 또한 뚜렷한, 아주 매력적인 소녀로 그려지고 있다. 모험의 내용이야 어떠하든 이 소녀와 함께하는 모험은 나로 하여금 무언가를 갈망하게 만든다. 끊임없는 호기심과, 직설적 화법, 계산적이지 않은 배려, 꾸밈없는 웃음 등은 아이들만의 전유물인 것일까.

 

앨리스의 언니는 마지막으로, 이 조그만 어린 동생이 이 다음에 어떻게 성숙한 여자가 될지를, 원숙한 나이가 되어도 어떻게 어린 시절의 순진하고 다정한 마음을 간직할 것인지를, 아이들을 모아 놓고 오래 전에 꿈 속에서 보았던 이상한 나라 이야기 같은 갖가지 이상한 이야기로 어떻게 아이들의 눈을 초롱초롱 빛나게 할지를, 어린 시절과 행복한 여름날을 기억하면서 어떻게 아이들의 순수한 슬픔을 함께 나누고 아이들의 순수한 기쁨 속에서 즐거움을 찾아 낼지를 그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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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들의 열정과 사랑을 극도로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너무나 흥미로웠던 소설. 유명 패션잡지의 8년차 여기자를 주인공으로 한 이 소설은 현대인들의 치부를 가감 없이 보여주기에 가장 적합한 조건들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이렇듯 치열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측은해지기도 했으며, 가끔은 이러한 치열함이 삶의 원동력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렇듯 <스타일>은 나에게 참으로 여러 감정들 불러왔다. 단순히 담배와 커피를 끼고 살며, 새벽 3시에 잠들어 점심이 다 되어서야 일어나는 불규칙적인 수면 패턴, 사글세에 살면서도 BMW와 명품 가방을 포기할 수 없는 우리네 현대인들의 삶을 단편적으로 비난하려는 책이 아니었다. 명품 브랜드명부터, 유명 연예인들의 실명, 유명 프랜차이즈 카페들까지 모든 설정들은 지극히 사실적으로 묘사되어서 우리가 더욱 소설에 깊숙하게 몰입할 수 있게끔 해주는 장치들일 뿐이다. 저자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끝으로 갈수록 나는 저자가 말하고자 했던 것이 어떤 ‘관계’에 대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16층에서 강아지를 던진 건 기자가 아니라, 기자의 아이였어.”

그날, 말없이 영동 대교를 내다보던 편집장은 처음으로 기자 선배의 아이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기자가 소문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던 건,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였어.”

그렇게 오늘도 나는 소문과 진실 사이에서 고민한다. 한 가지 깨달은 게 있다면 갈등을 다루는 건 드라마 작가의 일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조금 더 살벌하고 현실적인 갈등을 다루고 있을 뿐이다. 무엇보다 누군가 깊숙이 접어놓은 페이지를 읽는다는 건, 그걸 보고 가슴 아파한다는 건 진짜 어른이 되어간다는 증거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때론 누군가를 증오하기도 하고, 사랑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들 사이의 관계는 이렇듯 단순하게 이분법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점을 저자는 300페이지가 넘는 소설로써 장황하게 설명해주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수많은 소문과 진실, 이해와 오해들에 둘러 쌓여있다. 소설 속의 이서정은 결국 우리 모두의 모습이다. 누군가를 증오하여 그에 대한 헛소문을 퍼뜨리기도 하고, 그로 인해 자신이 헛소문의 희생자가 되기도 한다. 또, 누군가를 사랑하여 그를 오해하기도 하고, 진실을 숨기기도 한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았던 누군가의 아픔을 두 눈으로 직시했을 때 우리는 그를 연민하기도 하고 사랑하게 되기도 한다. 그를 이제 이해하게 되며,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소설 속 인물들 간의 관계가 모두 그러하듯 우리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지금 증오하고 있는 누군가가 미래에 사랑해 마지않는 누군가가 될 수도 있으며, 이해할 수 없다고 확신했던 누군가를 세상 누구보다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찾아올 수도 있는 것이다. 때문에 ‘관계’란 흥미롭다. <스타일>이 흥미로운 것은 사람들 간의 미묘한 ‘관계’를 사실적으로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명품 가방, 신상 구두, 최고급 레스토랑, 억소리 나는 외제차 등을 소재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 아닌 것이다.

그의 마음속에도 상처 받은 아이가 있어, 그렇게 늘 웅크린 채 혼자 울고 있었던 거다. 작은 벌레처럼 온몸을 말고 어둠 속에 떨고 있었을 그 아이가 가여워 나는 그의 등을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다른 누군가를 위함이 아닌, 스스로를 가여워 할 줄 아는 연민일지 모른다.

나는 그를 꼭 끌어안았다.

그때 내 다리는 분명 지상이 아닌 허공에 매달려 있었지만 나는 처음으로 불안하거나 아프지 않았다.

멀리서 내 안의 열여덟 살짜리 소녀가 뒤돌아 나를 향해 웃고 있는 게 보였다. 그 소녀는 무너지지 않은 다리 위에 그렇게 오래도록 서 있었다.

 

이처럼 우리가 살아가며 만나는 수많은 ‘관계’들은 결국 나와의 ‘화해’로 이어진다. 증오했던 이와의 화해, 사랑했던 이와의 화해, 나 자신과의 화해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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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면서 시작인 이야기’, 에디의 이야기는 그의 죽음과 함께 시작된다. 신선한 이야기의 구조는 우리를 단숨에 책 속으로 몰입할 수 있게 해준다. 중간 중간 삽입되어있는 에디 생의 생일날 에피소드들도 흥미를 더해준다.

그러나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책에서 의미 없이 쓰인 문장이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작가가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말하고자 했던 주제와도 상통하는 것이다. 우리 인생의 인연들은 단 하나도 무의미한 것이 없다. 스쳐지나간 인연도 언젠가는 우리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 감히 우리는 그 접점을 발견하지 못할 뿐이다. 우리는 과거의 인연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미래의 누군가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칠 것임에 분명하다.

 

“우연한 행위란 없다는 것. 우리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것. 바람과 산들바람을 떼어놓을 수 없듯이 한 사람의 인생을 다른 사람의 인생에서 떼어놓을 수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될 겁니다.” …

파란 사내가 에디의 어깨에 팔을 얹자 따스하게 녹아드는 느낌이 전해져왔다. 파란사내가 말했다. “타인이란 아직 미처 만나지 못한 가족일 뿐이에요.” … “낭비된 인생이란 없어요. 우리가 낭비하는 시간이란 외롭다고 생각하며 보내는 시간뿐이지요.”

 

이처럼 모든 인연이 연결되어 있다는 방식의 사유는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며, 허투루 보낼 인연은 없으며 모든 인연을 소중히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이런 생각만으로도 마음 한 구석이 따뜻해지는 듯하다.

 

“희생. 자네는 희생했고 나 역시 희생했어. 우리 모두 희생을 한다네. 하지만 자네는 희생을 하고 나서 분노했지. 잃은 것에 대해서만 계속 생각했어. 자네는 그걸 몰랐어. 희생이 삶의 일부라는 것. 그렇게 되기 마련이라는 것. 희생은 후회할 것이 아니라 열망을 가질 만한 것이라네. … ”

 

사실 대위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어려웠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그저 모든 희생을 감수하고 긍정적으로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인가. 나는 도저히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잘 생각해보니 나 또한 이미 일상 속에서 크고 작은 희생을 실천하고 있었다. 누군가를 위해 나의 몫을 크든 작든 포기하는 행위. 희생은 나누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생일 선물을 주는 것처럼 뿌듯하고 의미 있는 일이었다. 희생은 내 몫을 빼앗기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비극은 시작되는 것이다.

 

“그건 아무도 분노를 안고 태어나지 않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죽으면 영혼은 분노에서 벗어나지요. 하지만 이제 저세상으로 가려면 왜 분노를 느꼈는지, 왜 이제 분노를 느낄 필요가 없는지 이해해야 해요.”

그녀가 에디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말했다.

“아버지를 용서해야 해요.”

 

용서 또한 삶을 이해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분노를 품고 사는 삶은 스스로를 궁지로 밀어 넣는 어리석은 짓이다. 에디 또한 진작 아버지를 이해하고 용서하기 위해 노력했다면 그처럼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내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방식만으로 아버지를 재단했으며 그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식으로 행동했다. 비록 죽은 뒤 진정으로 그를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었지만 이미 너무 오랜 시간을 고통 속에서 아버지를 원망해야만 했다.

저자는 죽은 뒤 에디가 자신의 삶을 다시금 밟아나가며, 자신과의 화해를 마지막으로 자신의 인생을 모두 이해하는 과정을 차례로 들려주고 있다. 이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책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첫째는 현재의 삶에서 혹여나 고통스럽거나 이해할 수 없는 시간이 찾아오더라도 꿋꿋하게 살아나가라는 것이다. 어떤 삶이라도 죽음은 곧 우리들의 인생을 촘촘히 이해할 수 있게끔 만들어줄 수 있으니 말이다. 둘째는 이미 책을 읽은 이상 에디의 삶을 교훈 삼아 지금의 삶 속에서 인연, 희생, 용서, 사랑, 화해를 실천하려 노력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행위들을 죽음 뒤로 미루지 말라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와 비슷할 거야. 아담과 이브 이야기 말일세. 아담이 지상에서 맞은 첫 밤과 비슷할 걸? 그가 자려고 누웠을 때 말이지. 아담은 모든 게 끝이라고 생각했을 거야. 잠이 뭔지 몰랐으니까. 눈을 감고서 이 세상을 떠난다고 생각 했겠지? 한데 그게 아니었지. 다음날 깨보니 새로운 세상이 있었던 거야. 그리고 그에겐 또 다른 게 있었다네. 그는 어제를 갖게 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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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많은 이들이 어렸을 적 <어린왕자>를 읽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또한 많은 이들은<어린왕자>가 ‘아이’와 가장 잘 어울리는 책이라고 생각할 듯하다. 그러나 <어린왕자>는 마냥 동화 같지만은 않은 이야기이다. 그 어떤 책보다도 ‘어른’에 어울리는 책이기도 한 것이다. 이번에 다시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깊이 깨칠 수 있었다. 한 구절 한 구절이 새롭게 와 닿았고, 그만큼 나는 씁쓸해졌다.

 

나는 내가 그릴 수 있는 단 두 가지 그림 중에서 하나를 그려주었어요. 속이 보이지 않는 보아뱀의 그림 말예요. 그런데 그 꼬마가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거였어요.

“아니, 아니에요! 난 보아뱀 뱃속에 있는 코끼리는 싫어요. 보아뱀은 아주 위험한 동물이에요. 또 코끼리는 거추장스럽고요. 내가 사는 곳은 아주 조그맣단 말예요. 내가 필요한 건 양이에요. 양 한 마리만 그려줘요.”

 

언젠가 내가 아주 어렸을 적에는 나 또한 저 그림을 보고, 모자가 아닌 보아뱀 속의 코끼리라는 것을 단 번에 알아맞힐 수 있었을까. 아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순수하고 색다른 접근은 어린왕자가 보아뱀 뱃속의 코끼리를 알아봄으로써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이로써 비행기 조종사인 나또한 어릴 적의 동심을 잠시나마 회복할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마련되기도 하는데, 이는 책 속에서 처음 등장한 어린왕자가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지 단적으로 알려주는 장치이며 <어린왕자>를 상징하는 중요한 에피소드이기도 하다. 나에게 당연한 ‘모자’를 전혀 당연하지 않게 여기며, 나에게 당연하지 않은 ‘보아뱀 속의 코끼리’를 당연하게 여기는 어린왕자의 모습은 바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나에게 커다란 파격으로 다가왔다. 그 동안의 나는 당연하지 않은 세상을 당연하게만 보려고 나 스스로를 틀에 가뒀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처럼 작은 너의 별에서는 의자를 몇 걸음 당겨놓으면 되었지. 그래서 넌 네가 원할 때마다 해 지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을 테고…….

“어느 날 난 마흔세 번이나 해 지는 것을 보았어요!”

그리고 조금 후에 넌 이렇게 덧붙였지.

“아저씨도 알 거예요……. 누구나 슬픔에 잠기면 석양을 좋아하게 된다는 걸…….”

“그럼 마흔세 번 석양을 본 날은 몹시 슬펐겠구나?”

그러나 어린 왕자는 대답하지 않았어요.

 

늘 밝고 낙천적이던 어린왕자가 자신의 슬픔에 대해 처음으로 입을 열던 때이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슬픔은 조금 다른 느낌의 것이었다. 슬픔에 잠긴 그는 의자를 몇 걸음씩 당겨놓으며 하루 종일 마흔세 번의 석양을 봄으로써 슬픔을 씻어낸다. 슬픔을 애써 떨쳐내려 애쓰지 않아도, 빛나는 저녁 하늘을 바라보는 행위만으로도 슬픔을 위로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조금의 슬픔도 벅차하며 어떻게든 슬픔과 자신을 분리시키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우리의 모습이 애잔해지는 순간이다. 그는 누구보다 아름다운 방식으로 슬픔을 맞이했다. 슬픔 또한 내 안에 존재하는 감정의 하나로 받아들이며, 자연스럽게 치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젠 어린왕자처럼 슬플 땐 석양을 보는 것으로 위로를 받아보는 것은 어떨까.

 

“잘 가, 내 비밀은 이거야. 아주 간단해. 마음으로 보아야 잘 볼 수 있다는 거야.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어린 왕자는 그 말을 기억해두려고 따라 말했어요.

 

<어린왕자>는 ‘길들이다’에 대해 아주 독특한 정의를 내리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길들여진다는 것은 서로에게 ‘단 하나’의 존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미정원에 수백 송이의 장미가 피어있더라도 서로에게 길들여지지 않았다면 그들은 아무 의미도 지니지 않게 되는 것이다. 어린왕자와 여우가 그렇듯이, 비행기 조종사가 그렇듯이 그들은 서로에게 길들여진 존재들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린왕자의 별에 피어난 꽃 한 송이가 그러하다. 그 꽃은 어린왕자의 자아와 연관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나 자기 안의 조그마한 별을 띄우고 살아간다. 그 별에는 꽃이 한 송이 피어있을 것이고, 인생은 그 한 송이의 길들여진 꽃을 잘 가꾸는 데에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소비한 시간은 장미를 더 소중하게 만들고, 우리들은 각자의 장미한테 책임이 있다. 이로써 우리 인생은 이미 충분히 가치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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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 지극히 개인적으로, 나에게 도 여행하면 떠오르는 몇 가지 이미지가 있다. 첫째는 바람이 선선하고, 햇볕이 좋은 날 유럽의 외곽 도시들을 걷는 한가로움. 둘째는 일본의 어느 아담한 잡화점에서 아기자기한 물건들을 구경하는 소박함. 셋째는 지중해 해변을 맨발로 걷는 자유로움. 이렇듯 내가 생각하는 여행의 모습은 어쩐지 소박하고 한가로우며, 자유로운 종류의 것들이다. 이 책을 접하기 전에도 어쩌면 나는 혼자 하는 여행의 자유로움에 대해 갈망해왔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는 대단한 집순이다. 집에서 먼 곳으로 놀러 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뿐더러 집 밖으로 나가는 것 자체를 매우 귀찮아하는 편이다. 그런데 ‘혼자 하는’ 여행이란, 나답지 않게 자꾸 집으로부터 멀리 떠나고자 하는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책을 읽는 몇 시간 동안 혼자 여행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몇 번이나 상상했는지 모르겠다. 상투적인 표현일지 모르겠지만 상상만으로도 나는 설레고, 두근거렸다.

 

모든 인생은 혼자 떠난 여행이다. 누군가를 만나 함께 걷기도 하고 목적지가 바뀌기도 하지만 혼자서도 자신의 행복을 좇아 걸어갈 수 있어야 한다. 혼자 행복할 수 있어야 자신의 생각대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갈 수 있다.

 

저자는 혼자 하는 여행이야말로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는 기회라고 말한다. 나 또한 점점 궁금해졌다. ‘진짜 나’는 어떤 사람일까. 정말 여행을 혼자 떠나면 나를 찾을 수 있는 걸까. 나는 대체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수동적인 편이다. 특별히 나의 의견을 고집하지 않으며 모든 사람과 원만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을 지향한다. 이런 면에 있어서 특별히 문제가 있다거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서인지 나는 혼자 있을 시간이 꼭 필요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세상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함께 가는 사람에 의해서 결정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맞도록 우리의 호기심을 다듬기 때문이다. … 동행자에게 면밀하게 관찰을 당하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는 일이 억제될 수도 있다. 또 우리는 동행자의 질문과 언급에 맞추어 우리 자신을 조정하는 일에 바쁠 수도 있고, 너무 정상으로 보이려고 애를 쓰는 바람에 호기심을 억누를 수도 있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나는 나야말로 진정 혼자만의 여행이 필요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여실히 깨닫게 되었다. 이제 나에게는 ‘용기’만이 필요한 듯싶다. 타지에서 한가롭게 거닐며, 거리의 자그마한 잡화점에 들리고, 해변의 모래를 맨발로 맞이할 용기만 있다면 언제라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거창하고 고급스러운 여행이 아니더라도 진정한 ‘나’와 함께 마주보고 여행할 수 있는 날을 한시라도 빨리 만들어야겠다.

 

여행할 목적지가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여행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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