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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9월
평점 :
줄리언 반스의 [우연은 비켜가지 않는다]
Q : 사디스트의 정의는?
A : 마조히스트에게 상냥한 사람.
(142쪽)
우리는 세계를 이해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 믿음을 조금 더 냉정하게 들여다보면, 그것은 이해라기보다 오히려 하나의 해석에 가깝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줄리언 반스의 [우연은 비켜가지 않는다]는 바로 그 지점, 즉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탐구한다. 특히 기독교 역사와 엘리자베스 핀치라는 인물 사이에 형성된 평행 구도를 통해 인간이 어떻게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믿으며, 또 재구성하는지를 섬세하게 그려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독자에게 흥미로운 서사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 인간 정신의 깊은 층위를 시간과 기억, 그리고 해석이라는 다층적인 렌즈로 들여다보는 일련의 탐구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탐색의 끝에서 우리는 결국 '끝내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 즉 '인간'을 마주하게 된다.
우리는 너무 쉽게 타인을 이해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이해는 언제나 개인의 특정한 조건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누군가는 한 사람을 부모로, 누군가는 친구로, 누군가는 연인으로, 또 다른 누군가는 적으로 기억한다. 각자의 위치와 감정, 경험에 따라 동일한 인물을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재구성한다. 심지어 이 해석은 당사자가 알고 있는 자신의 모습과도 어긋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해석의 파편들을 하나로 묶어 일관된 인물을 형상화하고자 한다. 그것이 우리가 믿는 '이해'의 방식이다. 이는 매우 본능적인 것으로 복잡하고 불확정적인 대상을 단순화하여 매끄럽게 정리하려는 욕구에서 기인하며, 인간에게 있어 그러한 '이해'는 좀 더 안정적이고 통제 가능한 세계처럼 인식되곤 한다.
그러나 기실 그 '안정(安定)'은 하나의 편의적인 수단일 뿐, 애초에 인간은 하나의 서사로 정리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타인을 이해한다고 믿는 것은 결국 드러난 것의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끝내 드러나지 않는 내면의 은밀한 영역까지 고려한다면, 인간은 결코 타인의 이해로 완전히 환원될 수 없는 존재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따라서 섣부른 해석은 위험하다. 물론 해석이 이해의 출발점이라는 측면에서 불가피하지만, 필연적으로 단순화를 동반한다는 데서 그 위험성을 지닌다. 우리는 복잡한 존재를 몇 개의 특징으로 요약하고 그것을 전체라고 믿으려는 경향이 있다. 엘리자베스 핀치가 “어떤 인물이 형용사 세 개로 줄어들어 깔끔하게 정리되는 게 보이면 그런 묘사는 늘 불신하세요."(23쪽)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해하려는 욕망은 결국 대상의 복잡성을 정리 가능한 형태로 축소시킨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이해하려는 과도한 욕구가 오히려 대상을 심각하게 왜곡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구조는 개인을 넘어 역사 속에서도 반복된다.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것은 객관적 사실의 집합이 아니라, 특정한 해석이 선택되고 확산되며 고착된 하나의 의견에 불과하다. 즉, 역사라는 집단기억 역시 누군가의 시선과 의도가 개입된 산물에 가깝다는 말이다.
문제는 이 해석이 널리 공유되는 순간 하나의 진실처럼 작동한다는 데 있다. 이때 하나의 해석은 절대적 기준이 되며, 다른 가능성들은 철저히 배제되고, 결국 이 배제는 폭력으로 이어진다. 실제 역사 속에서 반복되어 온 비극의 대부분이 바로 이 지점에서 비롯되었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해석은 단순한 인식의 도구를 넘어, 현실을 구성하고 규정하는 힘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다시 인간의 이해로 돌아가보자.
인간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쓰디쓴 실패로 귀결되어 왔다. 인간은 외부로 드러나는 영역에서 살아가는 동시에 영원히 드러나지 않는 내면의 은밀함에도 포함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밖으로 향하는 인위적인 모습과 내면에 감춰진 은밀한 모습이 공존한다는 점에서 인간은 언제나 표현되지 않은 감정과 생각들을 품은 채 살아간다. 외부에서 볼 때, 이 은밀함은 결핍처럼 간주되기도 하지만 바로 이 결핍이야말로 인간을 좀 더 풍요롭고 인간답게 만드는 조건이 된다.
모든 것이 드러나고 완전히 이해되는 순간, 인간은 더 이상 변화할 수 없는 존재로 고정되는 반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남아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은 계속해서 해석되고 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전자는 생동하지 않는 상태, 곧 죽음에 가깝고, 후자는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상태, 즉 삶에 가깝다고 해석할 수 있겠다.
우리가 그토록 어려워 하는 '관계' 역시 이 은밀함 위에서 성립한다. 우리는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고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관계는 바로 그 불가능성 위에서 지속된다는 역설을 지닌다. 그것은 관계의 지속이 타인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아니라, 타인과의 일정한 거리, 서로의 은밀함을 침범하지 않는 경계, 그리고 완전히 해석되지 않은 상태를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비롯됨을 의미한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가 모든 것을 이해했다고 믿는 순간 오히려 관계는 무너져내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반스는 진실한 사랑이야말로 이러한 구조를 드러내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이며, 그렇기 때문에 가장 인위적인 감정이라고 역설한다.
"사랑은 늘 본능적인 것과 이론적인 것의 혼합이에요. 물론 우리는 이론적인 건 본능적인 것만큼 인식하지 못하죠. 그게 역사와 친족관계에 너무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하지만 그것 때문에 사랑은 본질적으로 인위적인 거예요.(....) 그리고 우리가 로맨틱한 사랑이라고 부르는 건 가장 인위적인 거예요. 그래서 가장 높은 형태고, 또 가장 파괴적인 형태죠." (270쪽)
이것은 사랑을 낮추기 위한 표현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얼마나 높은 형태의 인간적 행위인지를 드러낸다. 사랑은 본능에서 시작되지만, 지속되는 순간부터 선택과 조율의 영역으로 이동한다. 우리는 상대를 이해하려 하고, 설득하려 하며, 때로는 물러서고, 다시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 노력한다. 이 모든 과정은 자연스럽다기보다 다분히 의도된 행위이며, 바로 그 인위성이 사랑을 지속하는 원동력이 된다. 반대로 만약 인간에게 이러한 인위적 조율 능력이 없다면, 본능은 관계를 유지하기보다 그것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더 크다.
문득 벼랑 끝에 섰던 과거의 개인적인 경험이 떠오른다. 무너져내릴 듯 흔들렸던 순간, 타인에게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를 스스로에게 되물었던 먹먹했던 시간. 그만큼 나는 내 사랑에 떳떳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 질문에 끝까지 매달릴 용기조차 없었다. 어떤 지점에서는 멈추고 싶었고, 더 이상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감정이 앞섰다.
......
그러나 그토록 끓어 넘쳤던 시간을 되돌아보니, 내가 가졌던 두려움이야말로 그 소중한 관계의 무게를 실감케 하는 필연적인 감정임을 깨닫게 되었다. 어쩌면 진실한 사랑의 지속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끝까지 해석하고 조목조목 짜맞추는 대신, 오히려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 상태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태도가 더 절실했던 것이다. 결국 관계의 핵심은 이해의 완성이 아니라, 해석을 멈추는 용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같은 맥락에서 반스가 작품 속에서 자주 제시했던 '대안의 역사'를 생각해 보는 것도 좋겠다. 우리는 지나간 선택을 돌아보며 ‘만약~했더라면’의 가정을 자주 떠올린다. 그것의 정체는 흔히 잘못된 선택에 대한 감정으로 오인되곤 하는 '후회'다. 하지만 그것은 과거에 선택되지 않은 가능성을 인식하는 하나의 방식이며, 우리가 실제로 살아온 삶에 다른 무게를 부여하는 감춰진 부분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선택 이면에 존재했던 수많은 가능성을 이 후회의 감정을 통해 비로소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후회는 실패를 증명하는 부정적 감정이 아니라 더 나은 삶을 위해 경로를 수정하고 조정할 때 필요한 핵심적인 지표에 가깝다. 엘리자베스 핀치 역시 "성공에 대한 자족과 마찬가지로 실패에 대한 자족도 있을 수 있다."(94쪽)고 말하지 않았던가.
결국 삶의 의미는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와 맺는 태도 속에서 형성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요컨대 삶은 단순히 의지대로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조건에서 제한된 선택을 통해 사후적 의미를 축적해 나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줄리언 반스가 제시한 시간과 기억, 그리고 해석에 대한 이 모든 사유가 결국 하나의 질문, 즉 "과연 인간의 자유와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로 수렴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연은 비켜가지 않는다]가 근간하고 있는 스토아철학의 핵심으로 우리가 인생에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일과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일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하며,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일은 정녕 어쩔 도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따라서 인간으로서 추구하는 주체성과 자율성 역시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것에서 해방되는 것으로부터 비로소 유효하며, 이것이 곧 나의 자유와 행복을 얻는 유일한 방법임을 깨우쳐 준다. 다시 말해,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판단과 해석뿐이라는 통찰, 결국 인간의 자유와 행복은 외부를 바꾸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가르침을 주려는 것이다.
종합하면 삶은 어떤 의미를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해석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삶의 형식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형성된다. 하나의 절대적 기준에 따라 단일한 의미로 수렴되는 삶도, 다양한 가능성이 공존하는 열린 구조의 삶도 모두 스스로가 만든 해석의 결과다. 우리는 세계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그 세계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의미를 부여할 것인지는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란 끊임없이 해석하는 존재이며, 그 불완전한 해석의 토대 위에서 조금씩 더 자유로워지고, 조금씩 더 인간다워지고 있다고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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