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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사장은 처음이라 - 멘토 없는 젊은 리더를 위한 생존의 기술
박태훈 지음 / 다산북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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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훈 사장의 [나도 사장은 처음이라]

"이 책은 성공의 기록이 아니다. 실패의 기록이자 생존의 기록이며, 비싸게 배운 나의 부끄러운 경험이다. 당신은 나처럼 비싼 수업료를 치르지 않고도 반드시 살아남았으면 좋겠다." (9쪽)

박태훈의 [나도 사장은 처음이라]는 저자가 2007년, 스물셋의 나이로 처음 사장이 된 이래 약 20여 년 동안 사업체 대표로서 겪어온 다양한 경험과 통찰을 전하며, 독자들에게 하나의 ‘비즈니스 생존 가이드’를 제시한다.

특히 2022년, 창업 이래 최대 매출과 순익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금리 인상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 거시경제의 파도 속에서 처절한 실패를 맛봐야 했던 그의 경험담은 사업의 성패가 단순한 의지와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다양한 환경과 인물, 그리고 시류 속에서 빚어지는 우연적 산물임을 말해준다.

그는 당시 현금 유동성이 떨어지면서 80명이 넘는 직원들의 월급을 마련하기 위해 전전긍긍했던 긴박하고 황망한 시간을 회고한다. 그 속에는 매달 2억 원의 현금을 확보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형사처벌만큼은 피하려 했던 절박한 기억도 함께 각인되어 있다.

박태훈 사장은 이것을 ‘나만 재수 없음’으로 인식하는 대신, 사업의 본질적 속성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그 압박과 스트레스를 견뎌내기 위해 사장은 어떤 정신과 태도, 그리고 원칙에 집중해야 하는지를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래서인지 그의 ‘사업 이야기’는 화려한 성공담보다 업계의 냉혹한 현실과 좌충우돌의 실패담이 주를 이룬다. 그 안에는 사업을 하는 누군가가 자신이 겪었던 실패만큼은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다. 그는 성공의 순간을 과시하기보다 어둡고 뼈아픈 실패의 과정을 통해, 물어볼 곳이 없어 막막하고, 막힌 문제를 뚫어줄 멘토가 없어 답답한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자 한다.

물론 그가 해온 마케팅 대행업이나 개발 사업의 이야기가 모든 사업자에게 그대로 적용되지는 않을 것이다. 사업의 분야와 규모는 천차만별이고, 각자가 처한 상황 또한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특정 분야의 노하우나 기술을 전수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 오히려 어떤 사업 분야를 막론하고 사장이라면 마땅히 지켜야 할 원칙과 피해야 할 함정을 공유하는 데 중점을 둔다. 그로써 수많은 예비 사장과 현직 사장들에게 가상의 문제를 미리 상상하고 대비할 수 있도록 한다.

이 책은 총 6개의 노트로 구성되어 있다.

Note1 자본주의의 맛을 보다
: 사업은 낭만이 아니다

Note2 사업이 흔들릴 때
: 어떤 사장은 스스로 위기를 만든다

Note3 잘 만든 제품보다 잘 파는 능력
: 실패해도 괜찮아, 마케팅이 있으니까

Note4 착한 사장은 반드시 망한다
: 믿음은 쉽게 독이 되어 돌아온다

Note5 호황에 대처하는 사장의 자세
: 호황 뒤에는 반드시 불황이 온다

Note6 사장이 다시 시작할 때
: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각 노트에는 저자의 실제 경험담과 그로부터 얻은 통찰이 한 쌍을 이루어 실려 있다. 이러한 형식은 독자가 내용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공감하는 데 도움을 준다. 또한 나 같은 ‘사장’이라면 이야기 속으로 퐁당 빠질 만큼의 몰입감을 느끼게 한다.


나는 사업자다. 더 정확히는 여섯 평, 아홉 석의 아주 작은 초밥집 사장이다. 장사 경력은 총 12년이고, 지금의 초밥집은 5년 7개월째 운영 중이다.

놀랍게도 이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나는 무려 세 번의 거시경제적 파도를 경험했다.

첫째는 코로나19다.
지금의 초밥집은 2019년 말 코로나19 첫 감염자가 확인된 이후, 사회 전체가 큰 변화를 맞이하던 시기에 시작한 점포다. 당시 확산세가 지속되면서 정부는 집단 모임을 제한했고, 전국 곳곳에서 격리자와 사망자가 속출했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상황이 심화될수록 우리 가게의 매출은 늘어났고, 큰 호황기를 누렸다. 반면 술집, 국수집, 고깃집처럼 홀 식사를 중심으로 하는 일부 점포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버티거나 결국 경영 악화로 폐업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감염병은 전 세계의 경제구조를 타격했고, 초밥의 주재료인 가공 해산물, 이를테면 새우, 가리비, 소라, 한치 등의 가격이 급격히 치솟았다. 우리 가게는 매출이 올랐음에도 순이익은 감소하는 웃지 못할 상황을 마주해야 했다. 박태훈 사장이 강조했듯, 매출보다 중요한 것은 순이익인데 말이다.

두 번째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다.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며 양국은 본격적인 전쟁 상태에 들어갔다. 이 때문에 당시 러시아 영해를 통해 항공 운반되던 연어 가격이 크게 상승했다. kg당 9,800원 하던 연어 가격이 순식간에 2만 원대를 돌파했고, 현재는 더 올라 2만 원 중반대에 시장가가 형성되어 있다.

첫 번째 타격에 이어 두 번째 사건이 누적되자 순이익은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가격 인상을 단행했지만, 전쟁으로 얼어붙은 소비심리와 물가 상승에 따른 고정비 증가는 결국 외식비 감소로 이어졌다. 상황은 연쇄적이고 지속적으로 그 범위를 넓혀 갔고, 우리 가게의 매출과 순이익은 점차 악화되었다.

세 번째는 최근의 중동 정세 불안이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 이후 호르무즈해협을 둘러싼 긴장이 고조되면서 원유 가격은 다시 치솟았다. 오늘날 석유가 세계 경제의 기반을 이루는 핵심 에너지 자원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러한 충격이 전 세계적 물가 상승으로 이어지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결과인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특정 품목만이 아니라 전반적인 비용 구조가 흔들리고 있다. 가계와 기업의 고정비는 증가하고, 소비심리는 위축되며, 외식비 감소 역시 불가피해질 가능성이 크다.

물론 지역경제 진작과 영세 자영업자를 위한 정부 차원의 지원책이 논의되고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지난 가을에 지급된 지원금과 마찬가지로 미봉책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근본적인 대책이 되기는 어렵다.

이처럼 사업의 규모와 분야에 관계없이 사업자는 거대한 경제 구조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그 속에서 생존을 위해 매일같이 경쟁한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적 한계 속에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찾기는 쉽지 않다.

[나도 사장은 처음이라]는 이렇게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자영업자가 심리적 안정감과 차가운 판단력을 되찾는 데 도움을 준다. 저자는 사장들에게 단순한 위로를 건네기보다, 사업의 본질적 속성을 이해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한다.

그는 “사업에 들어선 이상 남들은 한 번 겪을까 말까 한 풍파를 수시로 경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198쪽)라고 말한다. 심지어 사업가가 이러한 풍파를 '겪는다'가 아니라 '당한다'고 표현해야 맞을 것이라고 덧붙인다.

즉, 사업자가 맞닥뜨리는 상황이란 단순히 '실력 없음'이나 '주변 탓'으로 설명될 수 없다. 그것은 시시각각 변하는 사업의 조류에 의해 발생하는 하나의 거대한 흐름에 가깝다.

박태훈 사장은 그 안에서 취할 수 있는 최선책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연구하는 것이야말로 사장이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한다. 특히 <Note5 호황에 대처하는 사장의 자세>에서는 '호황 뒤에는 반드시 불황이 온다'는 비즈니스 사이클을 설명하며, 사장에게 필요한 겸손한 태도와 곧 찾아올 불황에 대비하는 철저한 준비 자세를 강조한다.

반대로 이는 지금과 같은 경제 불황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많은 자영업자들에게 '불황 뒤에는 반드시 호황이 온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로도 읽힌다. 그러므로 자영업자는 자신이 처한 상황만 탓할 것이 아니라, 고정비를 최대한 줄이고, 때를 기다리며, 에너지를 비축하고, 나만의 생존 방식을 연구해야 한다. 호황과 불황은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유동적인 순환 구조 안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한편 장사가 안 될 때 자영업자들이 흔히 하는 고민은 대개 "내가 과연 천직을 떠나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일 것이다. 그 질문에는 조직의 대표로서, 그리고 한 가족의 가장으로서 짊어져야 하는 무게가 고스란히 실려 있다. 그래서 때로는 사업성이 떨어지고 순익이 발생하지 않는 사업임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유지하다가 결국 폐업의 수순을 밟는 경우도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박태훈 사장은 '잘 망하는 기술'도 기술이라고 말한다.
만약 영업이익률이 30% 이하인 사업이라면, 폐업을 심각하게 고민해볼 것을 권유한다. 그리고 폐업이 결정되었다면 빠르게 행동할 것을 추천한다. 그것이야말로 더 큰 피해를 줄이고 다음을 도모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는 폐업절차에 대한 플랜을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첫째, D-day를 설정해 폐업일을 확정하고, 둘째, 자동이체를 막아 지출을 동결하며, 셋째, 최우선 변제 기준을 세워 임금과 퇴직금부터 지급할 것을 권고한다. 임금 체불의 경우 형사처벌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핵심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최소한의 상태를 만들어두고 끝내는 것."(155쪽)에 있다.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사업에 불필요한 에너지와 자금을 쏟는 대신 빠르게 조치하고 마무리함으로써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조건을 확보하라는 의미다. 이는 실제 내가 몇 번의 사업을 하면서 철칙으로 삼았던 대원칙과도 정확히 맞닿아 있다. 특히 요식업 점포의 생명주기가 길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지속보다 갱신과 전환의 순발력이 요구되는 업계가 바로 요식업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부분은 <Note3 잘 만든 제품보다 잘 파는 능력>이다.

"마케팅은 무엇을 만드느냐가 아니라 어떤 스토리를 들려주느냐의 문제다." (76쪽_세스 고딘)

세스 고딘의 통찰은 12년 오너 셰프 경력인 나에게도 큰 가르침을 준다. 나는 줄곧 '음식을 하는 사람'이라는 틀에 갇혀 있었다. 최우선 과제는 언제나 음식의 맛과 청결, 그리고 그 둘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이 책을 읽은 지금, 그것이 곧 나의 한계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만드는 데 너무 집중한 나머지 상품을 홍보하고 브랜드 스토리를 쌓는 일에는 충분한 관심을 두지 못했다. '맛집은 산꼭대기에 있어도 찾아간다'는 문구만을 믿고 변해가는 외식업계의 질서를 등한시한 것이다. 그 결과 경쟁업체에 시장 점유율을 내어주는 신세가 되었다.

상품은 나만의 예술작품이 아니다. 자기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판매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마케팅은 상품만큼이나 중요하다. 아니, 프랜차이즈가 골목상권을 점령한 요즘의 풍토를 고려하면 오히려 상품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케팅일지도 모른다. 최근 프랜차이즈가 호기심을 자극하는 브랜드 스토리와 대규모 물류 시스템을 앞세워 부족한 정성과 맛을 극복해내는 모습을 보면, 음식을 판매하는 일에도 비즈니스적 요소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된다.

그러나 나와 같은 영세 자영업자들은 공격적인 마케팅과 효율적인 물류 시스템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나의 사업이 더 발전하고 지속되기를 원한다면, 그런 구조만 탓할 게 아니라 지금 당장 마케팅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공부해야 한다.

또한 박태훈은 사업 매출이나 규모에 현혹되지 말라고 충고한다. 사업의 핵심은 순이익에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매출액이 커도 이익이 적으면 나쁜 사업이고, 반대로 매출액이 적어도 순이익이 크면 좋은 사업이다.

그는 본인이 광고마케팅 회사를 운영함에도 불구하고, 고객사들에게 여력이 된다면 조직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마케팅 팀을 운영할 것을 추천한다. 플랫폼 의존도가 높아지면 고정비가 늘어날 뿐 아니라, 언젠가는 사업의 독립적 생존에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비즈니스 관계가 철저히 이해관계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언제든 수시로 이합집산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 판단이다.

요식업 역시 날이 갈수록 플랫폼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는 추세다. 요기요, 쿠팡이츠, 배달의민족 등 소비자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플랫폼 기업들은 소상공인들과의 불평등한 계약 구조 속에서 서비스를 공급한다.

가령 2만 원짜리 상품을 판매할 때 12% 중개수수료, 3,600원/건 배달료, 카드수수료 등을 합치면 7천원 정도의 금액이 빠져나간다. 나의 경우 순이익률이 20%이므로 2만 원짜리 상품을 팔아 4천 원을 버는 구조인데, 플랫폼을 이용하는 순간 이익은 고사하고 오히려 손실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물론 우리 가게에 한정된 경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플랫폼의 시장점유가 확산되고 고착화될수록 이처럼 불합리하고 불평등한 계약관계는 점점 개선되기 어려워질 것이다. 바로 이 점이 플랫폼 기업들이 제공하는 편의성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무분별한 성장과 시장 장악이 달갑지 않은 이유다. 박태훈 사장 역시 플랫폼 종속성이 심화될수록 "우리는 그저 플랫폼이라는 지주에게 소작료를 내는 소작농"(91쪽)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어쩌면 현실이 그렇기 때문에 사장들에게는 나만의 팬덤, 나만의 제품, 나만의 브랜드를 수립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일이 더욱 중요해진다. 비용과 매출 사이에 틈을 벌릴수록 자영업자는 운신의 폭을 확보할 수 있고, 다음 스텝을 위한 투자도 가능해진다. '사장님'이라는 허울 좋은 감투의 진정한 생명력은 결국 순이익에서 나오는 것일 테니까 말이다.

결국 박태훈의 [나도 사장은 처음이라]가 말하려는 핵심은 분명하다. 사업의 본질적 속성을 이해할 것, 매출 규모보다 순이익에 집중할 것, 인간의 욕구(고객의 니즈)를 읽을 것, 그리고 사업을 하면서 맞닥뜨리는 문제는 나만의 불운이 아니라, 사업을 하는 모두가 언젠가 마주하게 될 구조적 문제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것, 그럼에도 살아남는 사람은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장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은 단순히 더 열심히 일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도태되는 사람과 생존하는 사람의 차이를 연구해야 한다. 같은 위기를 맞더라도 누군가는 무너지고, 누군가는 버틴다. 그 차이는 운이나 의지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결국 차이는 구조를 이해하고, 비용을 통제하며, 고객의 니즈를 포착하고, 팔리는 방식을 고민하는 끈질긴 노력에서 발생한다.

나는 여전히 작은 초밥집을 운영하는 사장이다. 앞으로도 수많은 변수 속에서 흔들릴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난 뒤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나는 더 이상 '잘 만드는 사람'으로만 남아 있을 수 없다.

이제는 어떻게 팔 것인지, 어떻게 버틸 것인지, 그리고 필요하다면 언제 멈출 것인지까지 판단하는 사람으로서 나의 역할을 다시 정의해야 한다.

사업은 성공을 향해 곧장 나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끊임없이 흔들리는 구조 속에서 끝까지 남기 위한 선택의 연속이다. 어쩌면 그것이 ‘사장’이라는 이름이 감당해야 할 가장 현실적인 무게일지도 모른다.

"세상에 영원한 사업은 없다. 실패는 사업이 마주해야할 불가피한 운명이다.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기준은 오직 그 사업의 지속기간 뿐이다." (나의 생각)

닫는 글에서 박태환은 사업의 불가피한 운명, 즉 실패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장들의 어깨를 토닥인다.

"실패는 단지 시행착오 혹은 통과의례에 불과하다.
만약 사업에서 실패한다면, 당신은 실패를 경험한 사업가이지 실패한 사람은 아니다. 그 고통 속에서 적은 오답 노트가 인생의 다음 장을 써 내려가는 당신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 그러니 사업과 당신의 존재 가치를 동일시하며 스스로를 학대하지 마라. 당신은 여전히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당당한 사업가다." (237쪽)


#박태훈 #나도사장은처음이라 #다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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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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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누군가 최근에 읽은 소설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고르고 싶다. 그 덕분에 참 많이 웃고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에 공명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여러 층위에서 의미를 갖는다. 토니 웹스터라는 한 청년의 성장기 소설이고, 우리가 사는 시간에 대한 이야기이며, 인생의 의미를 찾아가는 진중한 철학서이기도 하다. 서사의 전개는 토니의 기억을 좇는 방식을 취하고 있어 화자의 이야기를 바로 곁에서 듣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그의 은밀한 사생활이나, 불행한 연애사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아득한 시간의 향수마저 느끼게 된다.

반스는 우리의 인생을 관찰하며, '시간과 기억'이라는 렌즈를 사용한다. 토니의 기억으로 시작하는 도입부 역시 이를 보여준다.

1.반들반들한 손목 안쪽.

2.뜨거운 프라이팬이 젖은 싱크대로 비웃듯이 던져지면서 솟아오르는 증기.

3.방울방울 떨어져 수챗구멍 속을 빙글빙글 돌다가, 층고 높은 집의 기다란 홈통 전체를 타고 흘러내려가는 정액.

4.터무니없게도 상류로 치닫는 강물, 그 물상과 너울을 좇는 여섯 개의 회중전등.

5.또 다른 강, 거센 바람이 수면에 물살을 일으켜 물길을 읽을 수 없는 드넓은 잿빛 강.

6.잠긴 문 뒤의, 오래전에 차갑게 식은 목욕물.


무작위로 떠오른 토니의 기억은 그의 삶을 구성하는 파편이다. 이처럼 토니의 삶은 수많은 기억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리는 그 기억들의 총합을 '토니의 삶'으로 규정한다. 이를 시간에 대입하면, 토니의 기억이 점유하는 시간의 총합은 그가 살아온 시간과 같으므로, 이 역시 '토니의 삶'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기억은 시간을 인식하는 하나의 방식이며, 인간은 그 기억의 축적을 통해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소설은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과연 우리는 토니의 기억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그리고 '과연 기억의 총합을 한 인간의 삶으로 환원할 수 있을까?'


반스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우리의 사유를 유도한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다."(33쪽)


이 말인즉슨, 기억이란 그 진실을 완전히 증명할 수 없는 상태에서 형성되는 일종의 확신에 가깝다는 뜻이다. 즉, 기억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는 저장소라기보다, 불완전한 정보 위에서 구성되는 해석의 산물일 가능성이 크다. 반스는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우리가 시간을 인식하는 방식'을 지적한다.

'기억에서의 시간'은 소위 주관적인 시간으로, 가령 도입부에서 언급된 여섯 가지의 경우처럼 토니가 사적으로 맺은 관계 속에서만 측정된다. 이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객관적인 시간(규칙적으로 흘러가는 시간)과 구분되며, '감정'이라는 요소가 첨가되어 있다. 이때의 시간은 토니의 감정 상태에 따라 긴 시간이 하나의 장면으로 압축되기도 하고, 찰나의 순간이 길게 늘어지기도 하는 형태를 띤다. 게다가 때로는 그 시간이 기억에서 통째로 사라지기도 한다.

요컨대, 인간이 살아온 삶은 실제로 흘러간 물리적 시간의 총량이 아니라, 기억 속에서 재구성된 주관적 시간에 가깝다는 말이다. 같은 의미에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확신'은 실제 사건들이 품은 '진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들이 남긴 '인상(기억)'에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시간의 경험 방식은 젊음과 늙음의 차이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경험과 지식이 부족한 젊은이는 시간이 끝없이 열려 있다고 느낀다. 아직 경험하지 못한 가능성이 많고 미래가 충분히 길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인간은 자신이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삶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에 대해 비교적 강한 확신을 품는 경향이 있다.

반면, 중년 이후가 되면 경험과 지식은 늘어나지만 오히려 확신은 줄어든다. 삶이 단순한 인과관계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진리를 점차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삶이 늘 목적한대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 자신의 선택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그래서 늙음은 확신이 강해지는 시기가 아니라 오히려 다양한 가능성을 인정하게 되는 시기이며, 필연적으로 소심함에 가까운 신중함을 발휘하는 경향성을 드러낸다.

사실 이것은 인생이 지닌 본질적인 아이러니이자 '시간의 역설'이라고 할 수 있다. 지식과 경험이 부족한 청춘이 자기확신에 들어차 있는데 반해, 중년 이후의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수많은 경험과 지식을 겸비하고도 오히려 신중한 태도를 갖는다는 사실은 두 경우 모두 비효율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반스는 이러한 역설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시간이란...... 처음에는 멍석을 깔아줬다가 다음 순간 우리의 무릎을 꺾는다. 자신이 성숙했다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그저 무탈했을 뿐이었다. 자신이 책임감 있다고 느꼈을 때 우리는 다만 비겁했을 뿐이었다. 우리가 현실주의라 칭한 것은 결국 삶에 맞서기보다는 회피하는 법에 지나지 않았다. 시간이란......우리에게 넉넉한 시간이 주어지면, 결국 최대한의 든든한 지원을 받았던 우리의 결정은 갈피를 못 잡게 되고, 확실했던 것들은 종잡을 수 없어지고 만다."(158쪽)


결국 시간의 변덕 속에서 인간은 모두 예외없이 '젊지 않음'의 상태로 수렴하면서 일종의 평균값을 찾아가게 된다. 이것을 '성숙'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테고, 혹은 '체념'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좀 더 주체적인 표현으로 '세상의 이치를 터득했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이것은 또 다른 측면에서 삶의 우연성과 임의성을 인정하는 일이며, 수많은 가능성을 수용하는 것이고, 현재의 후회와 깨달음이 결코 과거를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토니 웹스터가 살아온 시간의 기록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낱낱히 증명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기억을 통해 과거를 정확히 기억하며, 이해한다고 믿어 왔다. 하지만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우리는 점차 그의 기억이 얼마나 불완전한지를 확인하게 된다. 특히 에이드리언의 죽음 이후 남겨진 편지와 기록들은 토니의 기억을 완전히 해체하고, 그가 오랫동안 확신해 왔던 삶의 이야기가 뒤집히는 순간을 드러낸다. 그것은 단순한 인식의 변화라기보다 삶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가 바뀌는 것에 가깝다. 이로써 우리는 기억이 과거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감정과 해석이 덧붙여진 하나의 이야기일 뿐이라는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토니의 삶은 하나의 허구적 이야기이며, 우리 역시 그러한 본능적 오류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존재인지도 모른다.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한 개인의 삶이 시간과의 관계 속에서 기억을 축적해 나가는 과정을 조명한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인간이 삶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이자 존재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그렇다면 회고란 기억이 남긴 시간의 흔적을 돌아보는 일일 텐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회고할 대상이 지나온 세월 만큼 변한다는 사실이다. 더 정확히는 대상 자체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기억이 변화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겪는 수많은 경험은 있는 그대로 보존되지 않기 때문이다. 기억은 늘 시간이 흐르면서 지워지고 변형되며, 가감되거나 전혀 다른 의미로 재구성된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기억의 축적을 우리는 '나의 삶'이라고 부른다. 오늘도 우리의 기억은 마치 진화하는 유기체처럼 끊임없는 변화와 재생의 굴레 속에 존재한다. 따라서 지금 이 순간에도 지나간 시간에 대한 의미와 기억은 새롭게 갱신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고정된 실체가 없는 기억은 인간을 겸손하게 만든다. 누구도 자신의 삶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확신할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토니는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기억을 철썩같이 믿고 의심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반면, 그는 진실을 밝혀줄 증거를 통해 자신의 과거를 명징하게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우리는 인생에 대해 과연 무엇을 확신할 수 있을까.
확신이라 부르는 모든 것들이 결국 기억이 만들어낸 이야기일 뿐이라면 말이다.



#예감은틀리지않는다 #줄리언반스 #다산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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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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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언 반스의 [우연은 비켜가지 않는다]

Q : 사디스트의 정의는?
A : 마조히스트에게 상냥한 사람.

(142쪽)

우리는 세계를 이해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 믿음을 조금 더 냉정하게 들여다보면, 그것은 이해라기보다 오히려 하나의 해석에 가깝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줄리언 반스의 [우연은 비켜가지 않는다]는 바로 그 지점, 즉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탐구한다. 특히 기독교 역사와 엘리자베스 핀치라는 인물 사이에 형성된 평행 구도를 통해 인간이 어떻게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믿으며, 또 재구성하는지를 섬세하게 그려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독자에게 흥미로운 서사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 인간 정신의 깊은 층위를 시간과 기억, 그리고 해석이라는 다층적인 렌즈로 들여다보는 일련의 탐구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탐색의 끝에서 우리는 결국 '끝내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 즉 '인간'을 마주하게 된다.

우리는 너무 쉽게 타인을 이해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이해는 언제나 개인의 특정한 조건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누군가는 한 사람을 부모로, 누군가는 친구로, 누군가는 연인으로, 또 다른 누군가는 적으로 기억한다. 각자의 위치와 감정, 경험에 따라 동일한 인물을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재구성한다. 심지어 이 해석은 당사자가 알고 있는 자신의 모습과도 어긋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해석의 파편들을 하나로 묶어 일관된 인물을 형상화하고자 한다. 그것이 우리가 믿는 '이해'의 방식이다. 이는 매우 본능적인 것으로 복잡하고 불확정적인 대상을 단순화하여 매끄럽게 정리하려는 욕구에서 기인하며, 인간에게 있어 그러한 '이해'는 좀 더 안정적이고 통제 가능한 세계처럼 인식되곤 한다.

그러나 기실 그 '안정(安定)'은 하나의 편의적인 수단일 뿐, 애초에 인간은 하나의 서사로 정리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타인을 이해한다고 믿는 것은 결국 드러난 것의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끝내 드러나지 않는 내면의 은밀한 영역까지 고려한다면, 인간은 결코 타인의 이해로 완전히 환원될 수 없는 존재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따라서 섣부른 해석은 위험하다. 물론 해석이 이해의 출발점이라는 측면에서 불가피하지만, 필연적으로 단순화를 동반한다는 데서 그 위험성을 지닌다. 우리는 복잡한 존재를 몇 개의 특징으로 요약하고 그것을 전체라고 믿으려는 경향이 있다. 엘리자베스 핀치가 “어떤 인물이 형용사 세 개로 줄어들어 깔끔하게 정리되는 게 보이면 그런 묘사는 늘 불신하세요."(23쪽)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해하려는 욕망은 결국 대상의 복잡성을 정리 가능한 형태로 축소시킨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이해하려는 과도한 욕구가 오히려 대상을 심각하게 왜곡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구조는 개인을 넘어 역사 속에서도 반복된다.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것은 객관적 사실의 집합이 아니라, 특정한 해석이 선택되고 확산되며 고착된 하나의 의견에 불과하다. 즉, 역사라는 집단기억 역시 누군가의 시선과 의도가 개입된 산물에 가깝다는 말이다.

문제는 이 해석이 널리 공유되는 순간 하나의 진실처럼 작동한다는 데 있다. 이때 하나의 해석은 절대적 기준이 되며, 다른 가능성들은 철저히 배제되고, 결국 이 배제는 폭력으로 이어진다. 실제 역사 속에서 반복되어 온 비극의 대부분이 바로 이 지점에서 비롯되었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해석은 단순한 인식의 도구를 넘어, 현실을 구성하고 규정하는 힘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다시 인간의 이해로 돌아가보자.
인간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쓰디쓴 실패로 귀결되어 왔다. 인간은 외부로 드러나는 영역에서 살아가는 동시에 영원히 드러나지 않는 내면의 은밀함에도 포함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밖으로 향하는 인위적인 모습과 내면에 감춰진 은밀한 모습이 공존한다는 점에서 인간은 언제나 표현되지 않은 감정과 생각들을 품은 채 살아간다. 외부에서 볼 때, 이 은밀함은 결핍처럼 간주되기도 하지만 바로 이 결핍이야말로 인간을 좀 더 풍요롭고 인간답게 만드는 조건이 된다.

모든 것이 드러나고 완전히 이해되는 순간, 인간은 더 이상 변화할 수 없는 존재로 고정되는 반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남아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은 계속해서 해석되고 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전자는 생동하지 않는 상태, 곧 죽음에 가깝고, 후자는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상태, 즉 삶에 가깝다고 해석할 수 있겠다.

우리가 그토록 어려워 하는 '관계' 역시 이 은밀함 위에서 성립한다. 우리는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고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관계는 바로 그 불가능성 위에서 지속된다는 역설을 지닌다. 그것은 관계의 지속이 타인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아니라, 타인과의 일정한 거리, 서로의 은밀함을 침범하지 않는 경계, 그리고 완전히 해석되지 않은 상태를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비롯됨을 의미한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가 모든 것을 이해했다고 믿는 순간 오히려 관계는 무너져내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반스는 진실한 사랑이야말로 이러한 구조를 드러내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이며, 그렇기 때문에 가장 인위적인 감정이라고 역설한다.

"사랑은 늘 본능적인 것과 이론적인 것의 혼합이에요. 물론 우리는 이론적인 건 본능적인 것만큼 인식하지 못하죠. 그게 역사와 친족관계에 너무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하지만 그것 때문에 사랑은 본질적으로 인위적인 거예요.(....) 그리고 우리가 로맨틱한 사랑이라고 부르는 건 가장 인위적인 거예요. 그래서 가장 높은 형태고, 또 가장 파괴적인 형태죠." (270쪽)

이것은 사랑을 낮추기 위한 표현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얼마나 높은 형태의 인간적 행위인지를 드러낸다. 사랑은 본능에서 시작되지만, 지속되는 순간부터 선택과 조율의 영역으로 이동한다. 우리는 상대를 이해하려 하고, 설득하려 하며, 때로는 물러서고, 다시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 노력한다. 이 모든 과정은 자연스럽다기보다 다분히 의도된 행위이며, 바로 그 인위성이 사랑을 지속하는 원동력이 된다. 반대로 만약 인간에게 이러한 인위적 조율 능력이 없다면, 본능은 관계를 유지하기보다 그것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더 크다.

문득 벼랑 끝에 섰던 과거의 개인적인 경험이 떠오른다. 무너져내릴 듯 흔들렸던 순간, 타인에게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를 스스로에게 되물었던 먹먹했던 시간. 그만큼 나는 내 사랑에 떳떳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 질문에 끝까지 매달릴 용기조차 없었다. 어떤 지점에서는 멈추고 싶었고, 더 이상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감정이 앞섰다.
......
그러나 그토록 끓어 넘쳤던 시간을 되돌아보니, 내가 가졌던 두려움이야말로 그 소중한 관계의 무게를 실감케 하는 필연적인 감정임을 깨닫게 되었다. 어쩌면 진실한 사랑의 지속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끝까지 해석하고 조목조목 짜맞추는 대신, 오히려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 상태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태도가 더 절실했던 것이다. 결국 관계의 핵심은 이해의 완성이 아니라, 해석을 멈추는 용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같은 맥락에서 반스가 작품 속에서 자주 제시했던 '대안의 역사'를 생각해 보는 것도 좋겠다. 우리는 지나간 선택을 돌아보며 ‘만약~했더라면’의 가정을 자주 떠올린다. 그것의 정체는 흔히 잘못된 선택에 대한 감정으로 오인되곤 하는 '후회'다. 하지만 그것은 과거에 선택되지 않은 가능성을 인식하는 하나의 방식이며, 우리가 실제로 살아온 삶에 다른 무게를 부여하는 감춰진 부분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선택 이면에 존재했던 수많은 가능성을 이 후회의 감정을 통해 비로소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후회는 실패를 증명하는 부정적 감정이 아니라 더 나은 삶을 위해 경로를 수정하고 조정할 때 필요한 핵심적인 지표에 가깝다. 엘리자베스 핀치 역시 "성공에 대한 자족과 마찬가지로 실패에 대한 자족도 있을 수 있다."(94쪽)고 말하지 않았던가.

결국 삶의 의미는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와 맺는 태도 속에서 형성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요컨대 삶은 단순히 의지대로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조건에서 제한된 선택을 통해 사후적 의미를 축적해 나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줄리언 반스가 제시한 시간과 기억, 그리고 해석에 대한 이 모든 사유가 결국 하나의 질문, 즉 "과연 인간의 자유와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로 수렴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연은 비켜가지 않는다]가 근간하고 있는 스토아철학의 핵심으로 우리가 인생에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일과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일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하며,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일은 정녕 어쩔 도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따라서 인간으로서 추구하는 주체성과 자율성 역시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것에서 해방되는 것으로부터 비로소 유효하며, 이것이 곧 나의 자유와 행복을 얻는 유일한 방법임을 깨우쳐 준다. 다시 말해,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판단과 해석뿐이라는 통찰, 결국 인간의 자유와 행복은 외부를 바꾸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가르침을 주려는 것이다.

종합하면 삶은 어떤 의미를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해석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삶의 형식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형성된다. 하나의 절대적 기준에 따라 단일한 의미로 수렴되는 삶도, 다양한 가능성이 공존하는 열린 구조의 삶도 모두 스스로가 만든 해석의 결과다. 우리는 세계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그 세계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의미를 부여할 것인지는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란 끊임없이 해석하는 존재이며, 그 불완전한 해석의 토대 위에서 조금씩 더 자유로워지고, 조금씩 더 인간다워지고 있다고 생각해 본다.



#줄리언반스 #우연은비켜가지않는다 #다산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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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어증 환자
계영수 지음 / 미다스북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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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영수 작가의 [실어증 환자]

계영수 작가는 서문에서 [실어증 환자]가 1980년대 민주화 혁명이 남긴 미완의 과제를 이민 가족의 서사로 풀어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나는 소설 속 인물들의 모습을 비단 특정 시대의 산물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지 의문을 품게 되었다. 시대와 국경을 넘어 욕망을 좇는 인간의 민낯은 역사 속에서 이미 익숙하게 반복되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가가 20세기 말에서 21세기 초라는 특정 기간을 소설의 배경으로 삼은 이유는, 그 시대가 보여준 극단적인 사회적 쏠림 현상이 인간의 욕망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급격한 정치적 변화와 경제적 성장, 그리고 그 과정에서 벌어진 권력과 부의 격차는 사람들 사이에서 삶의 방식과 가치의 차이를 크게 벌려 놓았다. 이러한 차이는 결국 서로의 세계를 이해하려는 최소한의 언어마저 붕괴시키며 인간 사이의 소통을 무너뜨렸다.

여기서 작품의 제목인 ‘실어증’은 단순한 의학적 해석을 넘어선다. 의학에서의 실어증이 표현 능력의 상실을 의미한다면, 소설에서의 실어증은 상대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지 못하는 하나의 사회적 상태를 가리킨다. 계영수 작가는 이렇게 허공을 떠도는 목소리들에 주목한다. 그리고 무엇이, 왜 그들의 목소리를 지워버렸는지를 탐구한다.

인간은 각자 고유한 삶의 자리에서 '나'라는 세계를 살아간다. 즉,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은 언제나 특정한 환경과 관계 속에서 형성되며, 그 경험은 개인의 사고와 행동, 그리고 언어의 영역에서 일정한 패턴을 갖는다. 그리고 이러한 패턴은 관계 속에서 한 사람의 입장이 되고, 입장은 개인의 일상으로 굳어진다. 저자는 이처럼 개인이 안정된 삶 속에서 마땅히 누려야 한다고 느끼는 이것을 '일상성'이라고 규정했는데, 문제는 이 일상성이 언제나 균형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많은 경우 그것은 오히려 특정한 쏠림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상태에 가깝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온 방식과 가치를 보편적인 것이라고 믿고, 그것을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기본적인 조건으로 인식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그 질서가 침범받는 순간 그것은 단순한 의견 차이가 아니라 생존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된다. 이때, 타인의 생각은 더 이상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경계 대상으로 바뀌며, 소통은 단지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한 도구로 전락한다.

강장군(제너럴 캉)의 삶은 바로 이러한 일상성의 단면을 보여준다. 그에게 자신의 방식은 장시간 축적해 온 안정된 질서이지만, 그것은 가족 구성원의 삶을 끊임없이 침범하고 통제하며, 관계를 무너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에게는 합리적인 선택이 역설적으로 다른 이들에게 소통을 가로막는 장벽이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작품의 제목인 실어증은 하나의 은유로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사람들은 여전히 말을 하고 있지만 서로의 말을 듣지 않는다. 혹은 듣고는 있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말하지만 듣지 않는 상태, 듣지만 이해하려 하지 않는 상태.'

소설 속에 등장하는 회사와 노조, 독재 정권과 민중, 가족 간에 이어지는 침묵의 관계는 모두 이러한 '실어증'의 상태에 놓여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근원적 명제와 정확히 배치된다. 즉, 우리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타인의 반응과 시선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이해한다. 그러나 소통이 끊어진 세계에서 타인은 더 이상 나를 비추는 존재가 되지 못하고, 개인은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상실한다. 같은 의미에서 강장군이 마지막까지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은 이 단절의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이 소설이 단지 단절의 세계만을 보여주려는 것은 아니다. 작품 속에는 여전히 끊어진 관계를 회복하려는 움직임이 남아 있다. 그 중심에는 바로 강진희가 있다. 강장군이 자신의 생각을 절대적 기준으로 여기며 타인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인물이라면, 강진희는 관계를 잇는 존재로 등장한다. 그녀는 서로 다른 입장 사이를 오가며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단절된 관계를 다시 연결하려 노력한다. 이러한 모습은 강진희가 단순히 캐릭터를 넘어 소통의 가능성과 필요성을 부각시키는 상징적 인물임을 드러낸다. 다시 말해, 저자는 인간에게 소통이란 삶의 방식이자 행복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강진희의 삶을 통해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김상만이 평택 트리오를 만나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되는 순간이나, 서진애가 고립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누군가에게 연락을 시도하는 장면 역시 인간이 타인을 통해 비로서 자신을 발견하는 역설적 존재임을 드러낸다.

인간은 홀로 세계를 완성할 수 없다. 우리는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고 각자의 입장을 마주하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이러한 상호작용은 단순한 관계의 생성을 넘어 하나의 집단적 사고를 형성한다. 즉,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집단을 만들고, 그 집단은 자신들만의 가치와 세계관을 공유한다. 우리가 흔히 집단지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러한 과정 속에서 생겨난다. 개인과 개인 사이의 소통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것은 단순한 의견 교환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사고 흐름을 만들어가는 출발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서로 다른 입장은 언제나 충돌한다. 다양한 가치와 이해관계가 얽힌 사회는 본질적으로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충돌은 때로 예측할 수 없는 갈등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동시에 그 충돌은 새로운 사고가 탄생하는 토양이 되기도 한다. 서로 다른 생각들이 부딪히고 조정되는 과정 속에서 사회는 또 다른 균형점을 찾아가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역시 이러한 끊임없는 상호작용 속에서 유지되고 발전해 왔다. 다시 말해, 안정된 사회는 구성원의 입장이 충돌하는 순간 하나의 복잡한 흐름 속으로 빨려 들어가지만 종국에는 그 속에서 새로운 시대를 이끄는 또 하나의 집단지성이 탄생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갈등은 단순한 개인적 비극이 아니라 서로 다른 세계가 충돌하는 과정처럼 보인다. 강장군의 삶이 하나의 완결된 질서처럼 보였던 이유는 그가 오랫동안 자신의 입장 안에서 세계를 이해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질서는 다른 인물들에게 전혀 다른 의미로 경험된다. 결국 가족과 사회 속에서 이어지는 갈등은 서로 다른 질서가 충돌하는 순간 발생하는 균열이며, 그 균열 속에서 인물들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틈을 발견한다. 강진희가 보여주는 소통의 태도 역시 바로 그 지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그녀는 결핍을 소통으로 채워나가려 하며, 오히려 단절된 관계 속에서 행복의 열쇠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즉, 관계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언제든 소통을 통해 회복 가능한 것임을 그녀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계영수 작가의 [실어증 환자]는 두 이민자 가족의 서사를 통해 소통이 부재하는 사회가 드러내는 비극적 단면을 조명한다. 저자는 사람들이 각자의 일상성에 갇혀 서로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 상태를 ‘실어증'으로 은유한다. 이는 말은 존재하지만 그것이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언어는 오가지만 의미는 서로에게 닿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소통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타인의 말을 끝까지 경청하려는 자세, 서로 다른 입장을 이해하려는 노력, 그리고 그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려는 태도를 요구한다. 이해와 배려, 존중과 경청의 자세가 부재할 때 언어는 쉽게 단절의 도구로 전락한다. 하지만 남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려는 성숙한 태도가 마음 속에 자리 잡는 순간 언어는 서로 다른 세계를 이어 주는 다리가 된다. 즉, 소통은 인간이 더 나은 삶을 모색하고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태도가 된다.

인류의 역사 또한 이러한 소통의 과정 속에서 조금씩 확장되어 왔다. 서로 다른 생각과 경험을 지닌 사람들이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 가며 새로운 질서와 가치를 만들어 왔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통은 단지 개인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기술이 아니라, 인간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힘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실어증 환자]는 우리에게 묻는다.

"귀담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실어증환자 #계영수 #미다스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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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식자들의 시간
줄리아노 다 엠폴리 지음, 이세진 옮김 / 을유문화사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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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아노 다 엠폴리의 [포식자들의 시간]


"현재의 기술혁명은 정치 과정보다 빠르게 움직이면서 의원들과 유권자들의 통제를 벗어나고 있다."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 2017출간作, 512쪽)


2017년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가 한국에 출간되었을 당시, 이 문장은 단지 미래에 대한 경고에 불과했다. 하지만 2026년 현재 그것은 하나의 '사실에 대한 진술'이며, 하나의 '시대 선언'이 되었다.

근대 이후 인간은 정치가 권력을 통제한다고 믿어왔다. 선거를 통해 대표를 선출하고 법을 통해 권력을 제한하며, 제도를 통해 사회를 운영한다는 믿음. 그것이 민주주의의 근본 전제였다. 그러나 하라리의 이 문장은 그 전제가 더 이상 자명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권력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것이 발생하고 작동하는 중심이 정치에서 기술로 이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줄리아노 다 엠폴리의 [포식자들의 시간]은 바로 이 이동의 순간을 포착한다. 그는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등장하고 있는 새로운 권력자들, 즉 ‘포식자’라 불리는 인간 유형을 통해 우리가 이미 하나의 새로운 권력 질서 속으로 진입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질서는 기존의 법과 정치가 충분히 이해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영역, 말하자면 하나의 ‘무법지대’ 위에서 형성되고 있다.

이 무법지대는 법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 아니라, 법이 아직 도달하지 못한 공간으로 포식자들의 주 활동무대가 된다. 그곳에서 알고리즘은 이념과 인종을 초월하며, 데이터는 국경을 넘어 흐르고, 의사결정은 인간 이해의 범주 밖에서 이루어진다. 자유민주주의 정치가 여전히 토론과 절차, 합의와 타협을 통해 움직이는 동안 알고리즘은 침묵 속에서 빠르게 작동한다. 이때 기계와 인간 사이에 발생하는 시간의 간극, 즉 기술과 정치 사이의 비대칭이 바로 새로운 권력이 탄생하는 토양이 된다.

엠폴리는 이 새로운 권력을 행사하는 자들을 ‘포식자’라고 지칭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기술을 발명한 주체가 아니라 기술이 창출한 '권력의 작동방식'을 누구보다 빠르게 이해한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일론 머스크, 마크 저커버그를 비롯한 기술 창시자들은 단순한 기업가가 아니라 새로운 권력 구조의 설계자들이다. 그들의 권력은 전통적인 의미의 군대나 영토에 기반하지 않는다. 그것은 데이터, 알고리즘, 그리고 예측 능력에 기반한다. 그들은 인간의 행동을 강제하는 대신 행동을 예측하고, 그 예측을 통해 행동 이전에 존재하는 선택의 구조를 구축한다.

한편 이러한 변화는 포식자들로 하여금 기존의 정치 질서에 도전하도록 만든다. 그들에게 정치의 느린 속도는 신중함이 아닌 무력함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작동구조는 본질적으로 느릴 수밖에 없다. 그것은 합의를 형성하고 권력을 견제하며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과정 위에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포식자들이 활동하는 세계에서 권력은 더 이상 속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알고리즘은 토론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으며, 기다리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계산하고 그 결과를 즉각 실행에 옮긴다. 다시 말해, 정치가 여전히 권력을 행사한다고 믿는 동안 권력은 이미 다른 장소에서 다른 차원의 방식과 속도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간극 속에서 또 다른 유형의 권력자가 등장한다. 도널드 트럼프, 나이브 부켈레, 자이르 보우소나르, 하비에르 밀레이와 같은 인물들이다. 엠폴리는 그들을 르네상스 시대의 권력자들에 빗대어 ‘보르자형 인간’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질서를 유지하는 데 관심이 없고, 오히려 질서를 파괴하며 그 과정 속에서 새로운 권력을 창출하는 데 집요한 관심을 보인다. 게다가 그들은 혼돈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혼돈은 언제나 구질서와 신질서가 만나는 교차점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 '보르자형 인간'들은 AI 포식자들과 깊이 닮아 있다. 그들은 속도를 신뢰하고, 효과를 중시하며, 기존의 규범과 절차를 장애물로 간주한다. 그들은 진실이 아니라 영향력을 추구하고, 윤리적 정당성이 아니라 결과를 통해 자신을 정당화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기술 권력과 결합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이로써 기술은 그들에게 전례 없는 정밀성과 수단을 제공하고, 그들은 기술에게 정치적 방향성과 목적을 제공한다. 이 결합 속에서 그들은 혼돈을 조장하는 한편 그 혼돈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사로 인정받기를 희망한다.

이 지점에서 권력의 본질은 근본적으로 변화한다. 과거 권력은 힘에 기반했다. 군대와 경찰, 법과 제도는 권력을 물리적으로 행사하는 수단이었다. 그러나 알고리즘 권력은 물리적 강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것은 인간의 행동을 직접 통제하는 방식이 아니라 행동 이전에 선행되는 선택에 관여한다. 따라서 인간은 여전히 스스로 선택한다고 믿고 있지만, 그 선택은 이미 구조화된 가능성 중 하나일 뿐이라는 명백한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 이 순간 권력은 가시권에서 벗어나 자취를 감춘다. 알고리즘은 철저히 블랙박스 속에서만 작동하므로 극소수의 전문가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작동방식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이처럼 이해할 수 없는 권력은 비판할 수 없고, 비판할 수 없는 권력은 점점 더 신뢰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다. 즉, 권력은 더 이상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믿어야 할 대상으로 승화한다. 이때 우리의 지식은 더이상 판단의 근거가 아니라 신념의 근거로 대체되며, 오로지 절대적 믿음만이 판단의 근거로 작용한다.

엠폴리는 이러한 변화가 궁극적으로 인간의 의사결정 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암시한다. 어느 시점이 되면 인간이 AI의 판단과 다른 결정을 내릴 경우, 오히려 AI에게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해야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고 경고한다. 즉, 인간의 직관과 경험이 더 이상 최종 판단의 기준이 되지 않는 세계가 도래할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그리고 어쩌면 그 세계는 인간의 지식을 권위가 아니라 오류 가능성으로 치부할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한 세계는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 [꿈을 빌려 드립니다]를 떠올리게 한다. 이 소설의 여주인공 프라우 프라다는 타인의 꿈을 대신 꾸어주고 해석하는 능력을 통해 점점 더 큰 권력을 갖게 된다. 처음에는 조언자로서 하루의 운세를 점치는 역할을 맡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해석은 단순한 조언이 아니라 선택의 절대적 기준이 된다. 그에 따라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의 생각을 신뢰하지 않고 그녀가 대신 꾸어준 꿈을 통해 자신의 삶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순간 그들의 삶은 조용히 프라우 프라다에게 종속되고 만다는 줄거리다.

이 소설에서 ‘꿈을 대신 꾸어 달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호기심 충족의 문제가 아니라 주권의 이전을 의미한다. 즉,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타인의 해석에 의존하는 순간, 인간의 삶은 주인 없는 빈집과 같아지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상실되는 것이 단순한 정보의 부재가 아니라, 자신의 가능성을 스스로 규정할 권리 그 자체라는 점이다. 이처럼 자신의 미래에 대한 해석 권한을 외부에 위임하는 행위는 오늘날 알고리즘이 인간의 결정을 대신하는 세계와 정확히 맞닿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전히 선택하는 존재일까?"

아니면,

"이미 제시된 선택지를 승인하는 존재에 불과한가?"

엠폴리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대신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리콘밸리의 엔지니어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하는 게 아니라 인간 행동을 프로그래밍하고 있다. 그러한 플랫폼을 우리가 현실과 맺는 관계를 의탁하는 전반적인 인터페이스로 삼는 순간부터 우리는 그들의 손아귀에 들어간다. 사회적인 온도를 높일수록 이득을 보게 마련인 스핀 닥터들, 여론 조작 요원들의 손아귀에 우리를 내맡기는 것이다." (118쪽)


만약 알고리즘이 인간 생활 전반을 장악하고 그 압도적인 우위가 인간의 선택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게 될 경우, 이것은 비단 '인간의 주권이 어디에 있는가' 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인간 존재 자체를 위협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다. 따라서 이것은 단순히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이며, 우리가 이 새로운 권력 구조 안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근본적인 이유가 된다.

따라서 "개인과 사회는 삶의 어떤 영역을 인간 지능의 몫으로 한정하고 어떤 측면들을 AI에, 혹은 인간과 AI의 협업에 넘길 것인지 결정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인간 지능을 우선하기로 선택할 때마다, 그 영역이 인공 지능이 더 효율적인 결과를 낼 수 있는 분야라면 반드시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168쪽) 라는 점도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이다.

결국 포식자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기술이라는 성(城)을 건설했지만, 인간을 완벽히 예측가능한 존재로 전락시킴으로써 권력을 대다수의 인간에게서 분리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같은 의미에서 AI는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그 이해는 곧 인간 종 자체를 필요없는 변수로 만드는 과정이 되고 말았다. 요컨데, 예측이 완벽해질수록 선택은 불필요해지고 선택이 불필요해질수록 선택하는 존재 역시 불필요해질 수 밖에 없다는 의미다.

권력이 인간에서 기계로 이관됨에 따라 바야흐로 알고리즘은 '권력의 구조' 자체가 되어가고 있다. 결국 주권은 불가피하게 인간에게서 분리될 것이며, 인간은 주권을 빼앗긴 채 포스트 휴먼의 관리 대상으로 전락하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 때가 되면 암브로시아를 맛볼 인류가 남아있긴 한 걸까?

*암브로시아 :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이 먹는 불멸의 음식

<덧붙이는 말>

줄리아노 다 엠폴리의 [포식자들의 시간]은 AI변혁기에 출현하는 포퓰리스트와 AI기술자들이 新권력을 형성하는 과정을 조명하면서 정치구조와 AI시스템이 지닌 명백한 한계를 드러낸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인간의 본성과 무모한 권력이 결합하는 최악의 현상을 포착함으로써 다가올 포식자들의 시간을 예고한다.

특이한 것은 [포식자들의 시간]이 기존의 AI 서적들과는 다르게 기술발전을 하나의 선형적 진보로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엠폴리는 기술의 발전이 인간을 더 현명하게 만들 것이라는 가정을 거부한다. 그의 관점에서 기술은 인간의 지혜를 증폭시키는 동시에 인간의 어리석음 역시 함께 증폭시키는 앰프일 뿐이다. 즉, 기술은 인간 본성의 평형추를 건드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단지 인간이 자신의 의지를 더 큰 규모로 실행할 수 있도록 만드는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통찰은 기술이 단순히 더 나은 세계를 만들 것이라는 환상을 깨는 동시에, 실로 더 강력한 세계를 만든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강력한 세계는 언제나 더 큰 창조와 더 큰 파괴를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유발 하라리가 자신의 저서 [호모 데우스]에서 밝힌 '미래에 대한 경고장'을 소개하며 이 글을 마치려 한다.

"20세기 거대한 정치적 비전들이 우리를 아우슈비츠, 히로시마, 대약진 운동으로 이끌었음을 생각하면,(...) 신 같은 기술과 과대망상증적 정치의 결합은 재앙의 레시피나 다름없다."



**본 리뷰는 출판사 을유문화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되었습니다.

#포식자들의시간 #줄리아노다엠폴리 #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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