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평점 :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누군가 최근에 읽은 소설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고르고 싶다. 그 덕분에 참 많이 웃고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에 공명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여러 층위에서 의미를 갖는다. 토니 웹스터라는 한 청년의 성장기 소설이고, 우리가 사는 시간에 대한 이야기이며, 인생의 의미를 찾아가는 진중한 철학서이기도 하다. 서사의 전개는 토니의 기억을 좇는 방식을 취하고 있어 화자의 이야기를 바로 곁에서 듣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그의 은밀한 사생활이나, 불행한 연애사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아득한 시간의 향수마저 느끼게 된다.
반스는 우리의 인생을 관찰하며, '시간과 기억'이라는 렌즈를 사용한다. 토니의 기억으로 시작하는 도입부 역시 이를 보여준다.
1.반들반들한 손목 안쪽.
2.뜨거운 프라이팬이 젖은 싱크대로 비웃듯이 던져지면서 솟아오르는 증기.
3.방울방울 떨어져 수챗구멍 속을 빙글빙글 돌다가, 층고 높은 집의 기다란 홈통 전체를 타고 흘러내려가는 정액.
4.터무니없게도 상류로 치닫는 강물, 그 물상과 너울을 좇는 여섯 개의 회중전등.
5.또 다른 강, 거센 바람이 수면에 물살을 일으켜 물길을 읽을 수 없는 드넓은 잿빛 강.
6.잠긴 문 뒤의, 오래전에 차갑게 식은 목욕물.
무작위로 떠오른 토니의 기억은 그의 삶을 구성하는 파편이다. 이처럼 토니의 삶은 수많은 기억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리는 그 기억들의 총합을 '토니의 삶'으로 규정한다. 이를 시간에 대입하면, 토니의 기억이 점유하는 시간의 총합은 그가 살아온 시간과 같으므로, 이 역시 '토니의 삶'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기억은 시간을 인식하는 하나의 방식이며, 인간은 그 기억의 축적을 통해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소설은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과연 우리는 토니의 기억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그리고 '과연 기억의 총합을 한 인간의 삶으로 환원할 수 있을까?'
반스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우리의 사유를 유도한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다."(33쪽)
이 말인즉슨, 기억이란 그 진실을 완전히 증명할 수 없는 상태에서 형성되는 일종의 확신에 가깝다는 뜻이다. 즉, 기억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는 저장소라기보다, 불완전한 정보 위에서 구성되는 해석의 산물일 가능성이 크다. 반스는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우리가 시간을 인식하는 방식'을 지적한다.
'기억에서의 시간'은 소위 주관적인 시간으로, 가령 도입부에서 언급된 여섯 가지의 경우처럼 토니가 사적으로 맺은 관계 속에서만 측정된다. 이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객관적인 시간(규칙적으로 흘러가는 시간)과 구분되며, '감정'이라는 요소가 첨가되어 있다. 이때의 시간은 토니의 감정 상태에 따라 긴 시간이 하나의 장면으로 압축되기도 하고, 찰나의 순간이 길게 늘어지기도 하는 형태를 띤다. 게다가 때로는 그 시간이 기억에서 통째로 사라지기도 한다.
요컨대, 인간이 살아온 삶은 실제로 흘러간 물리적 시간의 총량이 아니라, 기억 속에서 재구성된 주관적 시간에 가깝다는 말이다. 같은 의미에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확신'은 실제 사건들이 품은 '진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들이 남긴 '인상(기억)'에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시간의 경험 방식은 젊음과 늙음의 차이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경험과 지식이 부족한 젊은이는 시간이 끝없이 열려 있다고 느낀다. 아직 경험하지 못한 가능성이 많고 미래가 충분히 길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인간은 자신이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삶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에 대해 비교적 강한 확신을 품는 경향이 있다.
반면, 중년 이후가 되면 경험과 지식은 늘어나지만 오히려 확신은 줄어든다. 삶이 단순한 인과관계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진리를 점차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삶이 늘 목적한대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 자신의 선택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그래서 늙음은 확신이 강해지는 시기가 아니라 오히려 다양한 가능성을 인정하게 되는 시기이며, 필연적으로 소심함에 가까운 신중함을 발휘하는 경향성을 드러낸다.
사실 이것은 인생이 지닌 본질적인 아이러니이자 '시간의 역설'이라고 할 수 있다. 지식과 경험이 부족한 청춘이 자기확신에 들어차 있는데 반해, 중년 이후의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수많은 경험과 지식을 겸비하고도 오히려 신중한 태도를 갖는다는 사실은 두 경우 모두 비효율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반스는 이러한 역설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시간이란...... 처음에는 멍석을 깔아줬다가 다음 순간 우리의 무릎을 꺾는다. 자신이 성숙했다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그저 무탈했을 뿐이었다. 자신이 책임감 있다고 느꼈을 때 우리는 다만 비겁했을 뿐이었다. 우리가 현실주의라 칭한 것은 결국 삶에 맞서기보다는 회피하는 법에 지나지 않았다. 시간이란......우리에게 넉넉한 시간이 주어지면, 결국 최대한의 든든한 지원을 받았던 우리의 결정은 갈피를 못 잡게 되고, 확실했던 것들은 종잡을 수 없어지고 만다."(158쪽)
결국 시간의 변덕 속에서 인간은 모두 예외없이 '젊지 않음'의 상태로 수렴하면서 일종의 평균값을 찾아가게 된다. 이것을 '성숙'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테고, 혹은 '체념'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좀 더 주체적인 표현으로 '세상의 이치를 터득했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이것은 또 다른 측면에서 삶의 우연성과 임의성을 인정하는 일이며, 수많은 가능성을 수용하는 것이고, 현재의 후회와 깨달음이 결코 과거를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토니 웹스터가 살아온 시간의 기록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낱낱히 증명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기억을 통해 과거를 정확히 기억하며, 이해한다고 믿어 왔다. 하지만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우리는 점차 그의 기억이 얼마나 불완전한지를 확인하게 된다. 특히 에이드리언의 죽음 이후 남겨진 편지와 기록들은 토니의 기억을 완전히 해체하고, 그가 오랫동안 확신해 왔던 삶의 이야기가 뒤집히는 순간을 드러낸다. 그것은 단순한 인식의 변화라기보다 삶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가 바뀌는 것에 가깝다. 이로써 우리는 기억이 과거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감정과 해석이 덧붙여진 하나의 이야기일 뿐이라는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토니의 삶은 하나의 허구적 이야기이며, 우리 역시 그러한 본능적 오류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존재인지도 모른다.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한 개인의 삶이 시간과의 관계 속에서 기억을 축적해 나가는 과정을 조명한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인간이 삶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이자 존재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그렇다면 회고란 기억이 남긴 시간의 흔적을 돌아보는 일일 텐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회고할 대상이 지나온 세월 만큼 변한다는 사실이다. 더 정확히는 대상 자체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기억이 변화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겪는 수많은 경험은 있는 그대로 보존되지 않기 때문이다. 기억은 늘 시간이 흐르면서 지워지고 변형되며, 가감되거나 전혀 다른 의미로 재구성된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기억의 축적을 우리는 '나의 삶'이라고 부른다. 오늘도 우리의 기억은 마치 진화하는 유기체처럼 끊임없는 변화와 재생의 굴레 속에 존재한다. 따라서 지금 이 순간에도 지나간 시간에 대한 의미와 기억은 새롭게 갱신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고정된 실체가 없는 기억은 인간을 겸손하게 만든다. 누구도 자신의 삶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확신할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토니는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기억을 철썩같이 믿고 의심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반면, 그는 진실을 밝혀줄 증거를 통해 자신의 과거를 명징하게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우리는 인생에 대해 과연 무엇을 확신할 수 있을까.
확신이라 부르는 모든 것들이 결국 기억이 만들어낸 이야기일 뿐이라면 말이다.
#예감은틀리지않는다 #줄리언반스 #다산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