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궤란 무엇일까?
조선왕조는 나라와 왕실에 다양한 행사가 있을 때마다 그로가 그림으로 기록을 남겼다고 한다
유교전통에 따라 예를 다했던 조선에서 의식의 절차와 내용을 기록하는 일은 매우 중요
의궤는 의식과 궤범을 하나로 더한 말
의례행사에 본 보기가 되는 규범이라는 뜻처럼 의궤라는 말에는 후손들이 같은 행사를 치를 때
앞서 만들어 놓은 의궤를 살펴 실수가 없도록 참고 하라는 의미
먼 훗날까지 예법에 맞는 올바른 왕실 문화를 생생하게 전하겠다는 마음도 담겨 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조선이 건국된 초기부터 의궤가 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종실록에도 1422년 태종의 국장을 앞두고 세종이 신하들과 논의 하면서
태조와 정종의 <상장의궤>를 살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의궤제작은 국가적인 일이었다
조선초기부터 제작된 조선 왕조의 의궤는 행사에 따라 내용과 종류도 무척 다채롭고 무엇보다
왕실과 관련된 의궤가 많았는데 조선을 다스린 국왕의 일생이 의궤속에 모두 담겨 있다
왕실에서 왕자가 태어나면 <태실의궤>
왕실 자손의 태를 소중하게 보관하는 과정을 기록한 책
왕자가 왕위를 이을 세자가 되면 <세자책례도감의궤>를 제작했고
왕비간택과 왕실의 혼례를 치르는 과정는 <가례도감의궤>에 빠짐없이 담았고
국왕이 세상을 떠나면 장례 절차에 따라 <국장도감의궤> 와 무덤을 조선하는 <산릉도감의궤등>을
만들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다는 조선의 철저한 기록 정신이 돋보이는 두 기록물처럼
조선 왕조 의궤 역시 왕실의 모습을 더하거나 빼는 일 없이 자세하기 담아내고 있다
의궤 속 도설과 반차도는 오늘날의 사진과 같은 아주 제밀하고 입체적인 그림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2007년 6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선정된 조선 왕조의 의궤는
조선 왕실의 문화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기록 문화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의궤를 만날수가 없다
임진왜란으로 초기에 제작된 의궤들이 대부분 불타 버렸다는 것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의궤는 모두 임진왜란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도감에서는 그날그날의 업무를 빼놓지 않고 정리해서 기록해 나갔다
이렇게 모인 기록은 의궤를 작성하는 기초적인 자료로 쓰였다고 한다
의궤제작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은 행사가 모두 끝난 이후에 행사가 마무리되면 도감이 없어지고
의궤청이 설치되었는데 의궤청에서는 무사히 행사를 마친 도감에서 그동안 기록하고 모아 두었던
각종자료를 정리해 의궤를 편찬하였다
임금이 보는 의궤와 보관용 의궤를 따로 만들라
행사의 모든 과정을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의궤는 대략 5~9부가 제작되었다
그중에서 특별히 1부가 임금을 위해 만들어졌는데
이것을 "어람용"의궤라고 한다
나머지는 여러곳에 나누어 보관하기 위해 만든 "분상용" 의궤이다
의궤속 그림은 도화서라는 곳에서 채색과 관련된 업무를 맡아보았는데
조선이 건국된 이후에도 도화원이 한동안 계속 이어졌지만 성종 임금 무렵에 "도화서"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도화서는 그 당시 조선에서 가장 뛰어난 화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나라와 왕실을 위해 중요한 그림을 그려야했던 만큼 도와서 화원이 되는 길은 쉽지 않았다
도화서에 들어가려면 나라에서 주관하는 시험을 통과하거나 때로는 사대부의 추천을 받아야 했다
재주와 실력이 뛰어나지 못하면 아무나 화원이 될 수 없었다고 한다
아이가 삼강행실도에 대해 사회시간에 배웠다고 하면서 관심을 가진 시기와
배운 시기와 이책을 읽게 되어 아이가 이렇게 많은 의궤가 있다는 것에 놀래고 다양한
의궤에 대해 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