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하지만 만만하지 않습니다 - 공감부터 설득까지, 진심을 전하는 표현의 기술
정문정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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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언어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국립국어원에서 제작한 영상이 있어 함께 봤는데, 극 중 한 아이가 이렇게 말했다. "너는 나중에 말하는 직업은 안 되겠다." 친구의 능력을 낮게 평가하고 미래(직업 진로)를 저주하는 말이었다. 이 세상에 말하지 않는 직업보다 말하는 직업이 훨씬 많을 건데, 이런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고 여러 번 이야기했다. 그리고나서 곰곰이 혼자 생각해봤다. 그러고보니 나도 말하는 직업을 갖고 있었다. 나는 학창시절 말을 잘 하는 학생이었나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았다. 늘 숨어있길 좋아하고 수업시간에 꼭 해야할 대답이 아니고는 묵음으로 대답하기 일쑤였다. 나도 때에 따라 이런 말을 많이 들었을 건데도 지금 이만큼의 말하기(누구 앞에서 말할 때, 가끔 말 잘한다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를 할 줄 알게된 데에는 어떤 계기가 있었을까. 아무래도 대화에서 논리적으로 이기고 싶다는 욕심이었던 듯.
4년 째에 접어들었다. 읽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쓰기 시작한 지. 책 읽기는 꾸준히 했지만 쓰기를 꾸준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어느 순간, 휘발되는 기억과 생각을 붙잡고 싶어졌다. 그래서 시작했다. 또 하나, 내가 갖고 있는 부정적이고 삐딱한 마음을 긍정적이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꾸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다. 한결같이 나만 잘난 것처럼 생각하고 공격하기 좋았했던 나를 바꿔보고 싶었다. 이건 쓰면서 어느 정도 교정된 듯하다.

이 책은 말하기와 쓰기에 대한 이야기였다. 언어가 표현하기 위한 음성과 문자이니 당연할 수도 있다. 물론 이 두 가지를 모두 잘하기가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저자의 능력이 한편으로는 부럽다. 그리고 그런 부러움 이면에는 인정하는 마음이 있다. 말하기 위해 또 쓰기 위해 거쳐왔던 그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이런 말과 글이 가능할 수 있었을 테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그저 쉽게 그 노하우와 팁을 공유받고 싶은 생각으로 이 책을 읽지 않았으면 좋겠다(내가 저자도 아니면서 감히!). 이건 잠깐의 시간으로 축적될 수 있는 기술(부제에서 말한 표현의 기술)이 아니고 깊은 성찰과 노력과 실천이 바탕이 되었을 때 가능한 수준이다. 그러니 책 한 권 읽고 이 모든 것이 내 것이 될 거라는 욕심은 금물. 대신 오랜 시간 공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면 시도해도 좋을 듯.

그런 면에서, 꼭 기억해두고 싶은 내용들이 있었다.

글은 어떤 '척'에서 벗어나야 쓸 수 있는데 말, 특히 강의를 할 때는 '척'의 오라를 뒤집어쓴 뒤에 연기하듯 눈빛과 손짓, 호흡과 발성을 조절해야 하죠.(21쪽)
_'척'은 솔직하지 않아 배척해야한다고 생각했다. 헌데 가만히 보니, 사실 나도 말할 때 '척'을 참 잘 하는 것 같다. 지금껏 '척'이라고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 늘 '척' 하면서 말했던 것 같다.

글이란 게 원래 결론이 별로 중요하지 않아. 이 이야기를 왜 하느냐, 어떻게 하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지.(58쪽)
_뻔한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돌고 돌아 길게 늘려 써야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생각한다. 그냥 결론만 말하면 더 간단할텐데.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거다. 맞다. 그게 아니다.

일상 상황에서, 특히 친분이 없는 사람과는 대화를 원활하게 이어가는 그 자체가 중요합니다. 조금은 밋밋하고 무난한 대화가 계속되더라도 말입니다.(91쪽)
_내가 참 못하는 것 중 하나다. 침묵이 어색하지만 그렇다고 어떤 이야기를 계속 해야하는 건 더 불편하다. 이 불편을 극복해야 한다는 말이구나. 끊기지 않는 대화가 필요하단 말이구나.

어떤 말을 의식적으로 하다보면 생각이 그에 따라 이동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필요한 마법의 말은 두 가지입니다.
"그럴 수 있어."/"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183-4쪽)
_이 마법의 말들을 잘 보이는 것에 적어두고 잊지 말아야겠다. 나란 사람에게 꼭 필요한 말이다!

각종 연구 결과에 의하면 학대와 빈곤을 경험한 아이들에게는 뇌가 빨리 닳는 후유증이 남기 쉽습니다.(...) 눈치보고 생존하는 데에만 에너지를 몰아 써도 부족한 상태니까 뇌가 금세 과부하에 걸려버리고 마는 거예요.(203쪽)
_눈치보고 생존하기 위해 뇌가 과부하가 걸릴 정도라는 걸, 읽어서야 뒤늦게 깨달았다. 그만큼 고통을 이기기 위해 우리 몸이 닳아버릴 정도로 애쓰고 있다는 것에 순간 울컥했다. 그리고 이런 경험을 겪는 아이들이 없었으면 좋겠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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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가 되어
김아직 지음 / 사계절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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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고백하면, 이 소설을 다 읽고 책을 덮으며 피식, 웃었다. B급 SF. 이런 맛이었구나 싶어 웃음이 났다. 어떤 말로 정리하면 좋을까 고민했는데, 이 한 마디면 모든 것을 다 아우를 수 있겠다 생각했다. 역시, B급 SF!

설정이 독특하다고 생각했다. 먼지가 되어 자유로워진다. 근데 왜 하필 먼지였을까. 연기나 구름, 혹은 가루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굳이 먼지였어야했던 이유가 있었을까 싶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봤다. 먼지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먼지가 나면 누구나 인상을 쓰고 코와 입을 막고, 눈을 감는다. 옷을 털고 그 곳을 피하게 된다. 진짜 사람들이 먼지가 되는 것이 좋았던 걸까. 이런 여러 부정적인 이미지의 먼지가 되는 것이 마음에 들었던 걸까.

산 너머도 산이고, 고생 끝에는 다른 고생이 온다는 걸 알아버린 이상 기를 쓰고 지금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인간의 죽음을 앞날에 기대와 설렘이 멈춘 날로 정의한다면, 오하석은 서른 살 무렵에 이미 죽었다. 오하석에겐 타르디그가 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115쪽)

삶의 희망이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을 떠날 수 있게 해주는 방법, 먼지가 되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준다는 유혹. 오히려 세상을 떠날 수 있지만 또 세상에 있을 수도 있는 방법. 더 극단적으로 말해 자살 방지 혹은 조력으로도 보이지만 또 완전히 죽는다고 볼 수도 없으니 단정지을 수도 없다. 특히 원하는 이들에게 전파한다는 이유를 갖고 사람들에게 접근하니, 사람들의 마음을 이용한다. 무슨 목적으로? 이때 떠오르는 단어는 사이비종교. 무척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먼지 생각을 해보면, 타르디그가 되고자 했던 사람들은 기존 삶이 어쩌면 먼지같은 삶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자신의 존재가 먼지같이, 누군가의 눈에 티끌처럼 유해하기만할 뿐 존재감은 없고 그저 이리저리 치이며 살 수밖에 없는 그런 인생. 그러니 같은 먼지라면 더 자유로운 먼지가 되기를 선택하는 것이 조금은 이해가 되기도 했다.

재원은 자신이 선택한 삶으로 떠났다. 마지막 통화에서 재원은 유어에게 네 멋대로 살라고 했다. 그때 언니는 앞으로 우리의 삶이 '먼지가 될 것인가, 먼지만큼이나 불안한 인간으로 남을 것인가'라는 선택을 필연적으로 거쳐야 한다는 걸 내다본 게 아닐까. 그래서 내 선택을 존중한다는 의미로 네 멋대로 하라고 했을 것이다.(159쪽)

결국 이 모든 것은 이 질문으로 시작해서 이 질문에 답을 찾아야 끝날 것 같다. '나는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재원도 유어도 답을 찾았다. 그 답이 모든 사람들에게 같은 결과를 만들지는 않는다는 차이만 있을 뿐. 그리고 그 선택에 스스로 분명한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까지.

이 이후 어떻게 됐을까. 세상이 타르디그의 세상으로 바뀌었을까. 아니면 타르디그가 이 사회에서 사라지고 다시 기존의 세상이 되었을까. 어느 쪽으로든 이 세상에 먼지(먼지인간이든 혹은 먼지같은 인간이든)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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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아이들
한요나 지음 / &(앤드)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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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로 등급이 나뉘는 사회. 겉모습으로 어느 구역 출신 사람인지를 구분하고 그에 따른 차별을 당연시 여기는 사회. 나와 같지 않거나 낮다고 생각하면 얼마든지 무시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사회. 숫자와 알파벳으로 경계를 구분하는 사회. 필요에 따라서는 아이든 어른이든 이용하려드는 사회. 그런 사회 속에 하루와 주하가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런 사회를 너무 잘 알아서 오히려 사회와 어울리지 않는 빌리와 레오니가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 신물이 나는 킹이 있었다.

우리 사회의 미래가 진정 이런 모습이라면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미래를 꿈꾸라고 이야기해야 할까, 깊은 숨을 들이쉬게 만들었다.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 모습에 대한 상상의 그림이 이렇다면, 벌써부터 숨이 막혀오는 느낌이었다. 돈이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과 그것이 먹혀들어가는 모습은, 이 사회를 더 강력한 계급사회로 만들고 철저히 사람을 줄세워 권력과 이익만으로 사회와 사람들을 움직이도록 학습시키틑 결과를 낳았다. 사회가 숫자로 구분되어 있듯 학교의 학급도 알파벳으로 구분하여 출신과 태생에 따라 이미 서열화된 사회 안에서 이를 당연히 여기도록 교육시키고 있는 꼴이었다. 어디에서도 평등이나 공평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니 하루나 주하가 감당해야 할 주변 아이들과 사회의 눈초리는 매서울 수밖에 없었다. 허락되지 않은 곳에 발을 디딘 다른 종족에 대한 경계와 무시, 오히려 이용하려드는 불법적인 거래는 너무도 명확한 폭력이었다. 그리고 이런 폭력을 부추기는 것은 오히려 학교와 사회였다. 가진 자들의 논리와 판단이 사회를 지배하는 무시무시한 사회였다. 아무리 SF소설이지만, 이런 SF는 읽으면서 마음이 무거워진다.
하지만 주하의 빨간 머리와 하루의 긍적적 마인드, 주변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거리낌없이 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빌리와 레오니는 그 존재만으로도 빛났다. 가만히 보면, 이 아이들 중 어느 누구도 까만 머리카락으로 살고 있는 아이는 없었다.

머리칼이 콩처럼 까만 아이들은 모두 A반이었다. 콩보다 더 검은 머리칼들. 일명 대지의 아이들과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축복받은 학생이었다.(9쪽)

이 사회는 까만 머리여야 온전한 사람 대접을 받으며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A반임에도 불구하고 까만 머리를 염색으로 가리고 다니는 아이들과 빨간 머리여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 공간을 채우고 있는 아이, 그리고 이런 모든 아이들에게 관심을 받고 있는 흙갈색의 아이까지. 이 아이들은 모두 다르지 않았다. 이게 이 소설을 다 읽고 난 후 든 가장 첫 번째 생각이었다. 염색이 가능하다면 누구나 까만, 콩보다 더 까만 머리카락으로 염색하려들 것 같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다. 여기서 한 가지 희망을 읽었다. 어쩌면, 소설 속 사회에서 더 나아간 미래를 꿈꾸는 아이들은 어른과 반대 방향을 향해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결국 어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거야?"
"응?"
"어른들이 다 결정하잖아."
"우리가 아닌 누군가가 결정하는 거지. 우리를 대신한다고 하지만 전혀 대신하지 못할 사람들이 대표로 정하는 거야."(244쪽)

아이들은 무서울 정도로 정확하고 잘 알고 있다. 아이들의 눈에 비춰진 세상이 사실 가장 정확한 모습일 거라는 생각을 할 때가 종종 있다. 이 경우도 그런 경우. '전혀 대신하지 못할 사람들'의 잘못된 판단이 이 사회를 이렇게 만들어 놓았을 거라는 것. 그런 어른들에게 이 사회를 맡길 수 없다는 것. 그러니 미래는 직접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것. 하루와 주하가 마음을 먹고 결심하게 되는 이 과정이 멋지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이 소설을 읽고 든 두 번째 생각. 소설 속에서 아이들은 대화 속에서 아직 어리다는 말을 자주 한다. 이건 어리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른다가 아니라, 어리기 때문에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읽혔다. 그만큼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주하가 COS라서, 능력이 있으니까 그렇다는 뜻이 아니라, 주하든 하루든, 어느 아이가 되었든간에 이 아이들이 알아챈 자신의 마음의 크기가 이 정도로 크다면 충분히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라는 거다. 이 대목에서 어른들은 반성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주하가 왜 빨간 머리일까. 그리고 5구역에서 발견된 빨간 머리, 노란 머리의 다양한 머리카락 색의 아이들은 또 어떤 의미일까를 생각해 보았고, 그래서 내린 답은 '무지개'. 우리는 무지개를 일곱 색깔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색깔과 색깔 사이의 경계는 불분명하다. 이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저 사람이 편의상 언어적으로 구분해놓은 표현일 뿐. 어찌보면 이 소설 속 경계는 무지개의 경계와 비슷하지 않을까. 사실은 명확히 구획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경계는 모호하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명확히 말할 수 없다. 그건, 색깔이 어느 한쪽 끝에서 반대쪽 다른 끝까지 이어져있다는 뜻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아이들이 만들어나갈 사회는 무지개와 같은 사회일 수 있지 않을까. 다양한 색이 공존하고 하나의 색에서 다른 색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가 섞일 수 있는 사회. 어디까지라는 부분의 차별 없이 누구나 어디에서라도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사회. 그런 사회에 대한 가능성을 이 아이들이 찾은 것은 아닐지.

빠져들어 있었다. 청소년 SF소설만은 아닌 듯싶다. 오히려 어른인 내가 느끼고 깨달은 바가 컸다. 상상 속의 이야기이지만 지금을 살고있는 나에게도 뜨끔하게 만드는 지점이 있었다. 공들여 읽으면 좋을 이야기였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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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여자, 작희 - 교유서가 소설
고은규 지음 / 교유서가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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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행복했습니다. 내 문장이 있어 좋았습니다. 그러니 나를 가엾게 여기지 말아요. 당신이 더 슬퍼질 거 같아 내 마음이 안 좋습니다. 나도......궁금합니다. 당신은 지금, 당신의 문장이 있나요? 그리고 행복한가요?"(294쪽)

행복. 우리가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인생의 주요한 화두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대답의 질문을 '왜 쓰는가'로 보지 않고 '왜 사는가'로 보아도 좋을 대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자신의 것을 빼앗긴 것에 대한 억울함만이라면 굳이 이런 대답이 나올 수가 없을 것이다. 소설이라는 결과물로만 받아들인다면 이 소설을 절반만 이해한 것일 거다. 이 소설은 '미쿠니 주택'이 '미쿠니 아파트'로 바뀐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쓰는 행위를 부정하는 사회와 외부에 대한 처절한 항거일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으며 결연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소설을 읽고 머물게 되는 단어가 있다. 바로 '쓴다'와 '여자'. 분명 여자의 이야기가 맞다. 우리가 익히 짐작할 수 있는 여자가 살아가는 이야기가 맞다. 여자여서 여자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이야기를 포함해서, 꼭 여자여서 여자인 데에서 이유를 찾아야할 필요는 없는 이야기까지 담겨 있었다. 그러다보니 읽으면서 화도 나고 속도 상하고 아프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다행이었고 속시원했고 또 애틋하기도 했다. 여전히 '여자'라는 단어를 통해 들여다봐야했던 과거와 현재가 있었으며, 그 안에서 극복해야 할 숙제들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단지 과거에 묶여있던 이야기가 잠시 현재에 흘러나온 것이 아닌, 여전히 과거에서 현재까지 이어져오는 흐름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야기의 실체가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실체에는 '쓴다'가 있었다. 여전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섬 앞에 작희가 모습을 나타냈던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해봤다. 그저 자신의 억울함을 하소연하고 한을 풀기 위한 목적은 결코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미 중숙과 작희 곁에 And가 있었고, 이 And와 중숙, 작희, 그리고 은섬은 이미 어떤 연결고리 안에서 함께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결국 모두 '쓰는' 존재들이며 이미 그 안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나가기 위해 부단히 외부와 현실에 맞선 싸움을 해나가는 존재들일 것이다. 목표한 바를 이루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한 싸움. 목적 의식에서 비롯된 삶이 아닌 온전히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을 위한 싸움. 그렇기에 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고, 그래서 머리보다 마음으로 그 존재를 먼저 알아챌 수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퇴마 시작일로부터 99일째이며, '작희가'를 제대로 쓰는 첫날이다.(297쪽)

물론, 이 소설 한 권에서 모든 것이 말끔히 해소되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어찌보면 이 모든 것을 인식하고 시작하는 '첫날'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이만큼의 세월이 지났어도 '쓰는 여자'에게 주어진 숙제는 여전하고, 혹은 더 큰 싸움을 준비해야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숙제하기 싫어서, 싸움에 질까봐 여기서 멈출 수는 없는 법이니까. 그래서 '첫날'이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미 '첫날'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오히려 반가워하면서.

이 소설에는 여자가 있고 쓰는 여자가 있고 작희가 있고 글,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은섬이 있고, 은섬이 쓰는 중숙과 작희와 그들의 이야기가 있다.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쓰는 여자, 작희>가 되었다. 이 이야기는 온전히 작희의 이야기이면서 작희의 어머니와 글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은섬으로 이어지는 여자, 쓰는 여자의 이야기이다.

*출판사로부터 가제본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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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루프 창비교육 성장소설 11
박서련 지음 / 창비교육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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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다른 소설도 챙겨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이 소설가는 청소년들과 결이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청소년이 쓴 소설을 읽어서 그런 생각이 들었을 수도. 전체적으로 소설들에서 아이들의 마음이 느껴졌다. 가끔은 맞아! 우리 애들도 그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건 아이들이 읽었을 때 공감이 더 커질 수 있다는 뜻일 거다. 공감이 되지 않으면 쉽게 이야기에 빠져들지 못하는 우리 아이들에게 슬그머니 이 책을 추천해봐도 좋을 것 같다.
3부로 이루어져있는 각 부분마다 작가의 말이 각각 들어가있는 구조가 낯설었다. 마치 각 부의 이야기를 친절하게 추가 설명해주고 있는 선생님의 마음과 닮았다고나 할까. 좋았다. 2-3편씩 묶어놓은 이유를 말해주고 각 작품에 담긴 의미와 소설을 쓰면서의 생각이 담겨 있으니, 소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훨씬 수월했다. 아이들에게는 이런 게 좋다. 긴 호흡으로 책 한 권을 읽기엔 아직 좀이 쑤시는 우리 아이들에게는 중간에 한번 씩 정리해주면서 가는 게 좋다. 그런 면에서 딱, 아이들에게 최적화된 소설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가가 다루는 세계의 범위가 넓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만큼 좋아해>나 <고-백-루-프>는 좋아하는 마음,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관계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누군가의 마음을 통해 어떤 관계가 가능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순간들이 반복되고 또 반복되면서 그 안에서 신중한 선택과 행동이 필요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가시>나 <발톱>도 죽음에 대한 상실과 슬픔에서 다시 세상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관계를 소중하게 다루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보름지구>에 대한 말이 낯설면서도 씁쓸했다. 지구에서 보름달을 보듯 달에서 보름지구를 본다는 것이 어떤 느낌일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보름지구라는 말이 익숙해지는 세상이 오면 어쩌지, 달은 하늘의 달로 올려다보았을 때에야 소원을 빌 수 있는 법인데, 그런 달을 하늘에서 볼 수 없게 된다니. 하늘을 올려다보면 달이 아니라 지구가 보인다면 그 보름지구에 소원을 빌어야 할까. 어떤 소원을 빌면 이루어질 수 있을지, 난감한 마음이 들었다.
<안녕, 장수극장>은 따뜻했고, <솔직한 마음>은 차가웠다. 마을 사람들의 추억과 감정이 작품 전체에 흐르면서 살며시 미소가 지어지는 소설이 <안녕, 장수극장>이었다면, <솔직한 마음>은 내내 인상을 쓰며 읽게 되는 소설이었다. 아이는 온 마을이 함께 키운다는 말처럼, 마을에서 잘 크고 다 큰 것 같은 윤송과 다르게 걸 그룹의 막내는 아직 제대로 크려면 한참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아이를 어떻게 해야 잘 키울 수 있을까, 괜히 내가 고민하게 되기도 했다.

가볍게 읽혔으나 결코 가볍지는 않은 이야기들이었다. 작품들 내면에 우리가 더 생각하고 이야기해봐야하는 주제들이 숨어있었다. 결국 사람 사는 세상의 이야기는 그 안에 문제 의식을 품고 있을 수밖에 없고, 그 문제 의식을 어떤 관점으로 볼 것인가는 전적으로 독자의 몫이겠지. 그 독자의 몫을 우리 아이들에게 한번 돌려봐야겠다. 아이들은 어떤 생각으로 또 다른 이야기를 풀어내 보여줄 것인지, 궁금해졌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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