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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여자, 작희 - 교유서가 소설
고은규 지음 / 교유서가 / 2024년 5월
평점 :
"......나는 행복했습니다. 내 문장이 있어 좋았습니다. 그러니 나를 가엾게 여기지 말아요. 당신이 더 슬퍼질 거 같아 내 마음이 안 좋습니다. 나도......궁금합니다. 당신은 지금, 당신의 문장이 있나요? 그리고 행복한가요?"(294쪽)
행복. 우리가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인생의 주요한 화두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대답의 질문을 '왜 쓰는가'로 보지 않고 '왜 사는가'로 보아도 좋을 대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자신의 것을 빼앗긴 것에 대한 억울함만이라면 굳이 이런 대답이 나올 수가 없을 것이다. 소설이라는 결과물로만 받아들인다면 이 소설을 절반만 이해한 것일 거다. 이 소설은 '미쿠니 주택'이 '미쿠니 아파트'로 바뀐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쓰는 행위를 부정하는 사회와 외부에 대한 처절한 항거일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으며 결연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소설을 읽고 머물게 되는 단어가 있다. 바로 '쓴다'와 '여자'. 분명 여자의 이야기가 맞다. 우리가 익히 짐작할 수 있는 여자가 살아가는 이야기가 맞다. 여자여서 여자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이야기를 포함해서, 꼭 여자여서 여자인 데에서 이유를 찾아야할 필요는 없는 이야기까지 담겨 있었다. 그러다보니 읽으면서 화도 나고 속도 상하고 아프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다행이었고 속시원했고 또 애틋하기도 했다. 여전히 '여자'라는 단어를 통해 들여다봐야했던 과거와 현재가 있었으며, 그 안에서 극복해야 할 숙제들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단지 과거에 묶여있던 이야기가 잠시 현재에 흘러나온 것이 아닌, 여전히 과거에서 현재까지 이어져오는 흐름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야기의 실체가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실체에는 '쓴다'가 있었다. 여전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섬 앞에 작희가 모습을 나타냈던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해봤다. 그저 자신의 억울함을 하소연하고 한을 풀기 위한 목적은 결코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미 중숙과 작희 곁에 And가 있었고, 이 And와 중숙, 작희, 그리고 은섬은 이미 어떤 연결고리 안에서 함께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결국 모두 '쓰는' 존재들이며 이미 그 안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나가기 위해 부단히 외부와 현실에 맞선 싸움을 해나가는 존재들일 것이다. 목표한 바를 이루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한 싸움. 목적 의식에서 비롯된 삶이 아닌 온전히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을 위한 싸움. 그렇기에 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고, 그래서 머리보다 마음으로 그 존재를 먼저 알아챌 수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퇴마 시작일로부터 99일째이며, '작희가'를 제대로 쓰는 첫날이다.(297쪽)
물론, 이 소설 한 권에서 모든 것이 말끔히 해소되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어찌보면 이 모든 것을 인식하고 시작하는 '첫날'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이만큼의 세월이 지났어도 '쓰는 여자'에게 주어진 숙제는 여전하고, 혹은 더 큰 싸움을 준비해야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숙제하기 싫어서, 싸움에 질까봐 여기서 멈출 수는 없는 법이니까. 그래서 '첫날'이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미 '첫날'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오히려 반가워하면서.
이 소설에는 여자가 있고 쓰는 여자가 있고 작희가 있고 글,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은섬이 있고, 은섬이 쓰는 중숙과 작희와 그들의 이야기가 있다.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쓰는 여자, 작희>가 되었다. 이 이야기는 온전히 작희의 이야기이면서 작희의 어머니와 글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은섬으로 이어지는 여자, 쓰는 여자의 이야기이다.
*출판사로부터 가제본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