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브 창비교육 성장소설 13
보린 지음 / 창비교육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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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를 큐브 안에 넣었던 선택은 정당했던 것일까. 안전했던 게 맞을까. 큐브가 연우에게 아프지도 다치지도 않게 해주는 보호막은 확실했던 걸까. 그런 보호막이 생겨 고마워했어야 했던 걸까. 젤리곰과의 동거가 과연, 옳은 것이었을까.

어떻게 보면 큐브는 연우에게 있어서 가장 안전하고 편안한 장치일 수 있다. 무엇으로부터든 연우를 보호할 완벽한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까. 외롭고 슬프게 혼자 두지도 않을 거지만, 외부의 어떤 위협으로부터도 모두 지켜줄 수 있는 든든한 장치였던 거니까. 하지만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런 보호막이, 이런 보호막 안의 삶이, 진짜 옳은가?
다르게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큐브의 보호 안에서 사는 삶, 한편으로는 재미가 없기도 하다. 왜냐하면, 삶이란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심사숙고하면서 무언가를 결정하고 그 결과가 또 다시 문제를 만들기도 하는 법이니까. 그 결정에 후회도 하고 또 갈등도 하면서 새로운 그 다음을 꿈꿀 수 있는 가능성도 만들 수 있는 거니까. 어쩌면,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안전하기만 해서는 삶다운 삶을 살기 어려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우는 큐브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미지근한 온실 밖, 심장이 말이 안 되게 뛰고, 땀이 삐질삐질 솟고, 더운 숨결이 귓가에 감기던 그 순간, 불안하고도 외롭지만, 서로 닿으려고 몸부림치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216쪽)

위험 요소로부터 무조건 안전하다는 것이 완벽한 삶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어쩌면 조금은 위험하고 두려운 상황이 펼쳐질 것에 대한 두근거림이, 때론 그 다음을 살아내는 떨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떨림을 서로 보듬어줄 수 있는 손길이 있을 것이고, 그런 손길을 통해 하나씩 스스로 해결해나갈 수 있는 힘도 생기게 될 것이다. 그런 힘이 쌓이고 쌓이면 점점 두려움은 안정되어 갈 것이고, 그런 안정을 통해 삶의 두께는 더 두툼해질 것이다. 그렇게 두툼한 삶으로 나아가겠다는 다짐을 연우는 기꺼이 해 나갔던 것이다.

이 소설을 다 읽고 곰곰이 생각해 봤다. 과연 이 큐브는 지금 아이들에게 어떤 의미의 공간일까. 어쩌면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는 불안함에 만들어 낸 가상의 공간일 수도 있다. 혹은 사회로 나가기 전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보호막일 수 있다. 때론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구속하는 꽉 막힌 공간을 수도 있고, 그런 공간에서 하루가 또 하루가 되는 반복적인 시간 속에 살아가야하는 우리 아이들이 처한 현실일 수도 있다. 누군가는 다 잘 되라고, 안전하게 만들어 주는 거라며 큐브를 만들고 손을 보며 그 밖으로 나가기 못하도록 가로막을 수도 있다. 큐브 밖 세상은 너무 험난하고 무섭기만 한 곳이니까. 나가지 않고도 완벽한 삶의 환경이 갖춰질 수 있다면 굳이 나갈 이유가 없다고, 그러니 큐브 안의 삶을 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세상일수록 더욱 나가야 하는 법. 그런 세상을 직접 부딪히며 세상 속에서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가는, 본인 스스로가 선택해야 할 몫이니까.

목소리가 젤리 곰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다음에는 젤리 곰을 구석구석 뜯어보았다. 실제로 뜯어보려고도 했지만, 젤리 곰이 울고불고 난리 치는 바람에 디지털 현미경을 사서 확대해 보았다.(69쪽)

웃겼다. 울고불고 난리 치는 젤리 곰의 모습, 그런 젤리 곰을 더 공포로 몰아가지 않으면서 속속들이 확인할 수 있는 방법으로 디지털 현미경을 선택하다니! 현미경 아래 젤리 곰을 놓고 관찰하는 연우의 모습이 상상이 되어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와중에 이런 유머라니.

분명 불안하고 불투명한 삶 안에 놓여 있는 것이 지금 우리 아이들의 현실이다. 그리고 그런 현실을 살아내느라 힘겨워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래서 불안함과 공포가 공황과 같은 증상으로 나타나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아이들은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누군가가 만들어 준 보호막 밖 세상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우리 아이들에게, 이 소설이 용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출판사로부터 가제본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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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생만사 답사기 - 유홍준 잡문집
유홍준 지음 / 창비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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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인생만사답사기 #유홍준 #유홍준잡문집 #창비 #서평단 #서평 #책추천

'잡문'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봤다. 섞일 잡, 글월 문의 잡문. "일정한 체계나 문장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되는대로 쓴 글. 대체로 지은이의 감정이나 사상이 꾸밈없이 드러난다." 말 그대로 유홍준 교수님의 감정과 사상이 꾸밈없이 드러나 있구나, 싶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책들을 몇 권(전권을 다 읽지는 못했지만,) 읽으며 느낀 교수님의 생각과는 또 다른 교수님의 시선과 생각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어쩌면 조금 더 내밀하고도 친근한, 우리가 흔히 요즘 읽는 에세이에서도 느낄 수 있는, 교수님의 개인적인 일화나 감정까지 느낄 수 있어서 이 책을 읽는 시간들이 무척 소중했다.

나는 순간 나라도 참석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일어났다. 문화재청장이 아니라 미술평론가 개인 자격으로라도 백남준 장례식에 참가하기 위하여 4일간의 휴가를 내고 장례식에 맞추어 뉴욕으로 떠났다.(167쪽)

유홍준 교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이 부분을 읽으며 교수님께 감동했고, 한편으로는 예술가에 대한 나라의 처우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가에 실망하기도 했다. 어떤 가치를 소중히 해야할 것인가, 또한 그것이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개인적인 생각과 행동은 아무런 유익함을 남길 수 없을 때가 많다. 하지만 사회 예술적인 안목으로 더 넓은 사고를 통한 행동은 분명 더 깊고도 소중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교수님의 행보가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읽으며 글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결국, 미술평론가로서 우리의 예술이 어떻게 앞으로도 나아가야 할 것인가를 꾸준히 고민하고 계시는구나, 싶었다. 단순히 직업으로서의 책임이라고 하기에는 나가감의 보폭이 달랐다.

그런데 지금 우리 시대에 훗날 명승으로 지정될 정원, 원림, 별서, 정사가 지어졌는가. 이 또한 '별장'이라는 것에 대한 국민정서의 거부감과 세제상 중과세를 부여하는 규제 때문이다. 국토를 아름답게 가꾸며 삶을 건강하게 하고 후손에게 문화재를 물려줄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다.(104쪽)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던 지점이었다. 가끔 교외로 나가보면 드문드문 산 중턱이나 언덕 위에 나무숲을 배경으로 지어진 별장들을 보며 부러움과 안타까움(좋겠다, 하지만 저렇게 자연을 훼손하면서 개인의 안락함만을 추구하는 건 별로다)을 동시에 느끼기만 했었는데, 이렇게 접근해볼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지만 그래도 될까, 지금까지도 안타깝다고 생각했던 지점의 무분별한 개발과 훼손의 책임은 누가 지어야 할까, 이걸 계속 개발하는 것이 과연 장기적으로 옳은 선택이 맞을까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웃하게 됐다.

그런데 나중에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이 '혼인서약'을 펼쳐보니 주례 리영희 선생은 혼인서약 문장 중 '나라'라는 단어를 두 줄로 긋고 '사회'라고 교정보아놓았다.(...) "그게 그거일 수 있으나, '나라'라는 말에는 파쇼 냄새가 나지만 '사회'라는 말에는 인간의 윤리가 살아 있는 차이 아니겠어." 아! 나는 이런 분의 주례로 결혼했다.(238쪽)

아! 나도 감탄했다. 파쇼는 안 되지, 당연히 인간의 윤리가 살아있는 '사회'여야 하는 게 맞지, 싶었다. 인간의 윤리. 어떤 것이 이 사회를 지탱할 수 있는 것인가를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무엇을 향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것인가를 별 거 아닌 것 같은 혼인서약의 단어로서도 충분히 밝힐 수 있는 힘, 그리고 그런 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이런 주변의 인연들이 교수님을 내내 이끌어왔던 원동력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책에는 교수님과의 인연의 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 인연들이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관계가 쌓이는 면면들이 무척 값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을 향해 나아갈 것이며 어떤 사상과 목소리가 우리 삶에 존재해야 하는 것인가. 또한 그런 존재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남아야 하고 또 그 남겨진 유산을 우리는 어떻게 아껴 소중히 다루어야 할 것인가도 숙제처럼 남았다.

<모내기> 작품이 법정에 나오는 날, 나는 일찍이 가서 신 화백의 가족, 민미협 회원들과 방청석 앞자리에 자리 잡고 기다렸다. 얼마 뒤 법원 직원이 작품을 들고 들어와 법정 맨바닥에 놓는데 놀랍게도 천막 개듯이 여러 겹으로 접혀 있는 것이었다./ 순간, 민미협 화가들이 일어나 "작품을 이런 식으로 보관하면 어떡하냐"라고 항의했다. 그러자 담당자는 압수물 보관소에 있는 그대로 가져왔을 뿐이라고 했다.(177쪽)

작품을 보고 너무 화가 났다. 접힌 자국대로 훼손된 흔적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아, 얼마나 예술에 대한 무지를 보여주는 것인가. 작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물건으로만 바라보는 태도가 너무도 안타까워지는 부분이었다. 어쩌면 이런 태도의 시각을 조금이나마 바꿔주는 역할을 교수님이 하신 것이 아닐까도 생각했다. 우리가 만약 교수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아니었다면 이만큼이나마 우리의 문화유산에 대해 관심이라도 가질 수 있었겠나. 단순히 작품뿐만이 아니라 그런 작품이나 예술가를 대하는 태도와 그 가치를 어떻게 두어야 하는지에 대한 모범을 본인의 삶을 통해 있는 그대로 가르쳐주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분은 분명, 행동하는 지성인이 맞다. 그런 분의 이야기를 책을 통해서나 만나뵐 수 있어 영광이었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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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일 수 있다면 - 제1회 현대문학*미래엔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임고을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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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일수있다면 #임고을 #현대문학 #현대문학미래엔 #청소년문학상수상작 #서평단 #서평 #책추천

나라면 누구를 녹이고 싶어질까. 세상이 온통 얼어버렸고, 사람들이 모두 얼음 인간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런 얼음 인간을 녹일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그럼, 나라면 누구를 선택할까. 답은 쉽지 않다.
서진과 서리가 녹이는 문제에 쉽게 합의하지 못했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서진의 걱정에도 고개가 끄덕여지고 서리의 주장도 맞다는 생각이 드니까. 함부로 녹였다가 더 큰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렇다면 아무도 녹이지 않고 조용히 사는 방법이 나을 수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데 살리지 않는 것은 또한 죄를 짓는 거란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렇다면 최대한 사람들을 많이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는 것이 맞다. 물론 그렇게 살리고 난 후 발생하는 또 다른 문제는 더 해결하기 힘들어질 수도 있다. 그러니 신중할 수밖에.

사람들이 스스로를 죽이거나 망가뜨리는 일은 절대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지구가 망가진 것은 어떻게 설명되는데? 땅과 바다는 오염되고, 기온은 계속 올랐다. 끊임없이 불이 나고, 지진이 나고, 도시는 물에 잠겼다. 사람들은 잘못된 줄 알아도 행동을 고치지 않았다.(49쪽)
사실, 다들 인류가 망할 줄 알고 있었다. 세계 곳곳에서 전조 현상이 끊이지 않았으니까. 철에 안 맞는 꽃이 피었고, 벌은 멸종됐고, 수해, 화재, 폭염, 지진, 가뭄이 전 지구적으로 해가 갈수록 빈도와 강도를 더해 갔다. 그러나 재난이 폭죽처럼 터져도 다들 묵묵히 손을 놓고 있었다. 정말 큰일이네, 심각하네 같은 소리만 거듭하며. 외계 생명체가 굳이 손쓰지 않았어도, 결국에는 이런 결말을 맞지 않았을까.(173-4쪽)

애초에 왜 이 세상이 모두 얼어버렸는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당연히 사람들에 의해서, 사람들이 함부로 우리 지구를 쓰니까, 위기의식을 가진 외계 생명체가 얼린 것이다. 자원을 보존하기 위해, 더 이상 망가지는 것을 막기 위해. 동감이다. 외계 생명체가 손을 쓰지 않았어도 우리 지구는 이런 결말을 맞았을 것이다. 어느 것도 하나도 온전히 제 생명을 지킬 수 없는 지경의 지구의 결말 말이다. 이걸 늘 예상하고 있으면서도 말로만 위기라고 떠들 뿐이다. 날씨가 왜 이러냐고 한탄만 하고 짜증만 낼 줄 알지, 그렇게 만든 원인이 자신들에게 있다는 걸 인간들은 모른다. 이걸 모르니 우리 지구는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은 채 여전히 아직도 점점 나빠지고만 있다. 이 문제를 제대로 들여다봐야한다는 생각이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괴짜 과학자 할머니께서 경고했었고, 이에 대한 대비책과 방법도 조금은 마련해 두셨고, 지금도 여전히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연구를 진행 중이시다. 남들이 다 손가락질 해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지켜나갔던 분이니, 서진과 서리를 위해서라도 방법을 찾아 다시 돌아오실 것이다. 그때까지 이 아이들이 사람들을 조금씩 구하면서 잘 버텨주면 된다. 다만 어떻게 하는 것이 잘 버티고 또 지켜내는 방법일지는 조금 더 고민을 해봐야할 것 같다.
그저 얼어있는 사람들을 많이 녹이는 것이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일까 의문이 들기도 한다. 어쩌면 누군가는 이 세상을 그나마라도 지키기 위해 얼린 것인데, 이를 또 애써 녹이려하는 것이 과연 옳은 선택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의 지구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기 위한 쉼의 시간을 주는 것은 아닐지, 결국 모든 것들을 잠시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으로 두고 지구를 지키려는 마음은 아닐지. 그렇다면 이 시간을 조금은 더 유지해도 괜찮지 않을까, 어쩌면 위험한 생각도 든다.

하지만 결국 아이들은 녹이는 것을 선택하고, 또 그 안에서 다시 서로의 관계와 상황을 정리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스스로 깨닫는다. 문제를 해결하고 극복해보려 노력도 하고. 그러면서 답을 찾아 나간다. 이것이 이 소설의 가장 긍정적인 부분인 것 같다. 아이들이 스스로 답을 찾기 위해 나아간다는 것. 집 안에 숨어 누군가가 해결해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나가려 한다는 것만으로도, 이 세상이 계속 얼어있기만 하진 않을 것 같은 작은 희망을 품게 되는 것 같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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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시대의 페미니즘 - 딥페이크 성범죄부터 온라인 담론 투쟁까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새로운 언어들
한국여성학회 기획, 허윤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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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페미니즘'이란 단어를 쉽게 사용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페미니즘의 '페'만 이야기를 해도 공격성 반응을 연달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점점 이야기를 하다보면 힘들고 지친다는 느낌이 강했다. 어디부터 어떻게 설명하고 이해시켜야 할까, 막막할 때도 있었다. 말 그대로 혐오였기 때문에. 이런 감정을 되돌리기에 나 혼자의 힘은 미약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말을 아꼈다. 관련 책을 읽자고 말도 못 했다. 최대한 사회 현상들 중 페미니즘은 배제한 채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나의 부족함이 사회적 반감과 만나면서 나타난 모양새라고 생각했다. 이 책을 읽으며, 얼마나 많은 부분에서 이유 없는 백러시가 만연해 있는지를 여실히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들은 이유가 분명하다고 할 것이다. 자본의 논리로, 그리고 폭력의 이름으로.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두고 상품화하고 있음은 오래된 사실이지만, 디지털 시대에 이르러 얼마나 광범위하고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지, 무서울 정도였다. 반복적으로 보이는 일베라는 단어와 이를 중심으로 사라지지 않는 남성성, 혹은 가부장이란 말은, 우리 사회가 아직도 새로운 말을 만들어내지 못한 채 계속 과거로의 회귀만을 갈망하는 사회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왜 우리는 여전히 이 단어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자본주의가 기반이 되고 정치가 끼어들면서 공정이나 평등이란 단어 마저도 폭력과 혐오를 전제로 한 힘의 논리를 보여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능력주의라는 말로 차별을 포장하고 당연시 여기도록 종용하는 사회의 기득권 세력은 여전히 네티즌들의 호응와 인기만을 위한 거침없는 발언들을 서슴치 않는 모습들이있고, 여기까지라는 선과 구분에 대한 판단도 없이 그저 한 순간 이목을 집중시키기만 해도 충분하다는 마음으로 무차별 공격하는 것이었다.
특히 온라인을 기반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파급력은 훨씬 더 강력했다. 단순히 누군가의 입을 통해 나온 발언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발언은 또 다른 발언을 낳고 이 발언들은 급속도로 퍼지면서 마치 당연시하도록 만들어놓기 충분했다. 물론 대놓고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다양한 방식과 예상치 못한 형태를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하려들지 않으면 알 수 없도록 포장되어 보여졌다. 그 중에서도 MZ 세대라 불리는 요즘 젊은 세대들의 변화는 기존의 반응을 넘어선 새로운 장르라 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이럴 때 우리는 무얼 어떻게 해야 할까.

스마트폰의 보급 이후 디지털 미디어는 일상생활에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었다. 이는 페미니즘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여성 혐오 발언에 대한 대항 발언도 온라인을 통해서 전파되었으며, 대항 행동 역시 온라인을 통해 조직되었다. 특히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아도 되며 빠른 속도로 전파가 가능하다는 디지털 미디어의 특징으로 인해 성폭력이나 불평든 등 불합리한 일을 고발할 수 있었다.(6쪽)

다시 처음 이야기로 가 보면, 나 혼자의 힘은 미약했다. 혼자 하는 대항 발언도 대항 행동도 힘들었다. 그래서 하지 못했던 말과 행동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러지 않아도 되겠다. 이제 나 혼자의 말과 행동이 아닌 온라인을 통한 디지털 미디어의 전파와 움직임은 기존에 다하지 못했던 것들을 가능하게 만들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앞서 느꼈던 것처럼 이런 변화는 곧 디지털 시대여서 더 감수해야 할 부분들이 많아졌음을 뜻하기도 한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책을 읽으며 인상을 쓰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읽어 나가며 괴롭고 또 화가 나기도 했다. 심각해졌고 또 진지해졌다. 다양한 술수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고민하기도 했다. 또한 여성 차별과 혐오, 불평등과 폭력 등이 얼마나 많은 미디어를 통해 감춰지고 둔갑되어 대중에게 전달되고 있는가에 두려움을 넘어 공포심이 느껴졌다. 특히 이런 미디어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어린 아이들에게 어떤 가치와 메시지가 전달되고 있는 것일지, 섬뜩했다. 헌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는 이 이야기들을 감정으로만 받아들이고 있었다. 마치 무슨 일이 벌어졌을 때, 어떡해, 하는 말만 반복하고 있는 수준에 불과했던 것이다.
냉철해질 필요가 있다. 이 연구 결과들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들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단순한 감정만으로 대응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만의 논리가 반드시 필요하다. 무엇이 우리 사회를 움직이고 있는 힘인지, 그런 힘에 쉽게 휘둘리지 않기 위한 단단한 바탕은 이런 연구 결과에서 나올 것이다. 우리가 이런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알고 넘기면 안 된다. 정확한 판단력으로 우리 사회가 나아가는 방향을 올바로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며 학구열이 생겼다. 진심으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여성이란 이유로 당하지 않기 위해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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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러 문항 킬러 킬러
이기호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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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호 #장강명 #이서수 #정아은 #박서련 #서윤빈 #정진영 #최영 #주원규 #지영 #염기원 #문경민 #서유미 #김현

살짝 방어기제가 작동했다. 책의 표지부터가 너무 낯이 익으니 더 그랬다. 이 책을 어떻게 읽으면 좋을까 고민도 됐다. 자칫, 내가 20년 이상 몸담고 있는 영역에 대해 뭐라고 건들기라도 하면 당장이라도 공격해 주겠다는, 조금은 날 선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 이내 그런 마음이 금방 사라지기는 했지만. 학교라는 공간. 그 공간의 주인공들인 학생, 교사, 학부모의 이야기였다. 너무도 잘 알고 또 익숙한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접할 때는 어쩔 수 없이 긴장을 하게 된다. 너무 잘 알고 있어 더욱 적나라하게 그 내막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변명할 마음의 준비도 되어 있다. 왜 이런 식일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하지만 무엇이 문제인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다. 다만 너무 어둡고 아프게만 다루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갖게 된다. 우리 사회라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문제만으로 채워져있는 것은 아니니까. 행복하고 즐겁고 재미있는 일들도 얼마든지 많이 있으니까. 그런 여러 복잡한 마음들을 안고 이 책을 읽었다.

학교가, 학교가, 왜 이렇게 쉽게 학생을, 밖으로 내쫓는단 말인가. 학생을 소중히 여겨야지.......(26쪽_'학교를 사랑합니다:자퇴 전날' 중)

다시 생각이 많아졌다. 할 말도 많아졌다. 학교가 학생을 밖으로 내보내는 순간, 학교의 의미는 없어진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학생을 학교의 울타리 안에 두고 있어야 한다는, 어쩌면 옛날 방식의 생각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생각이 변했다. 학교라는 공간이 지금의 아이들에게 모든 것을 다 해줄 수 있는 공간인가에 대한 약간의 회의감이 생길 때도 있기 때문이다. 과연 이 아이들이 학교라는 공간 밖에 있을 때 더 자유롭고 더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학교가 학생을 억지로 제도 안에 묶어놓을 이유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의 상우와 같은 목적으로 학교 밖을 선택하는 경우라면, 고민이 된다. 이런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학교가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던 아이. 더 효율적인 진학을 위해 과감히 자퇴를 선택했던 아이. 말려봤지만 말리는 나를 오히려 앞길을 막는 사람으로 만들었던 경험이 떠올랐다. 이 문제에 대해 좋은 답이 무엇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작년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는 '대학 학과별 수능 점수 커트라인'이 교실마다 붙어 있었다. 친구가 걸음을 멈춘 곳은 1학년 5반 아니었다. 우리를 알아본 몇몇 96퍼센트가 인사를 했고, 누굴 찾아왔느냐며 교실 뒷문을 열어주었다. 열린 미닫이문 사이로 책상에 앉아 있는 윤이의 모습이 보였다. 윤이의 가슴팍에는 1학년들이 달고 있는 것과 같은 색의 명찰이 붙어 있었다.(95쪽_'소나기' 중)

예전 공포영화가 떠올랐다. 졸업하지 않고 계속 학교를 다니는 한 아이. 그 학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무엇이 두려워 졸업하지 못하고, 진급을 거부하는 것일까. 4퍼센트 안에 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무서운 것이길래, 이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반복만 하고 있는 것일까. 슬퍼졌다. 1학년 교실에서부터 벌써 대학 수능 커트라인 숫자가 걸리고, 숫자 안에 갇혀 나오지 못하고 있는 윤이의 처지가 안타까웠다. 이래야만 하는 것일까, 이게 맞나 싶었다. 성공하지 못하면 아무도 못 나가는 답 없는 미로에 갖힌 듯 같은 자리만 맴돌고 있는 모습으로 보였다. 미로의 벽을 허물어주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얼마나 더 반복해야 윤이는 이 미로의 출구를 찾을 수 있을까.

"만약에 실패하면 어쩌죠?"
"......다시 하면 되죠."
수가 숨을 들이켜더니 하얗게 변한 손을 굳게 쥐었다. 작고 작은 주먹이었다.(158쪽_'민수의 손을 잡아요' 중)

윤이에 비해 수는 미로의 출구를 찾았다. 그것도 제 스스로의 힘으로. 얼마나 다행인지. 물론 무제의 도움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순전히 선택은 수의 몫이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를 제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힘이 있었고, 다시 해보겠다고 각오를 다질 수 있는 용기가 있었다. 이 말이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다시 하면 되죠'라는 말. 실패는 어느 누구나 한다. 실패 없는 나아감은 없다. 다만 그 실패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의 문제가 있을 뿐이다. 실패했다고 주저앉는 것보다 이 실패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에 대한 그 다음을 생각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걸 알아채는 것도 쉽지 않다. 수는 이걸 알아챈 것이다. 굳게 쥔 작은 주먹에 함께 주먹을 불끈 쥐어 보여주고 싶다. 응원의 의미로, 잘 할 수 있을 거라는 힘을 보태주고 싶은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학교가 아이들을 힘들게 하는 공간으로만 기억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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