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쓰다가 - 기후환경 기자의 기쁨과 슬픔
최우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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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병의 시대를 지나면서 이전보다 환경에 대한 관심이 많아진 듯 보였다. 아무래도 언론이나 매체에서 관련 기사를 자주 접하게 되고, 관련 책들도 많이 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헌데, 이 책을 읽으며 진짜 관심이 많아진 것이 맞는지, 그 관심이 실제 환경과 지구를 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 맞는지, 현재 우리나라가 환경에 대해 어느만큼의 대책과 방향을 지니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학교에서도 기후, 환경과 관련해서 많은 공문이 오고 있고, 각종 행사 및 대회, 관련 연수와 캠페인, 학생 활동 등이 추진되어 진행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정작 실제로 우리나라 전체를 이끌고 나갈 정책이나 국가의 장기적 계획은 적절하게 수립되어 추진되고 있는 것은 맞는지, 궁금해졌다. 궁금하다는 얘기는 아직까지도,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는 결론이 나오지는 않았다는 뜻이겠지.
저자의 말대로 결국 환경과 경제, 그리고 정치는 강한 연결고리를 지니고 있으며, 그 연결고리 안에서 어떤 저울질을 통한 미래에 대한 전망을 내놓을 지, 그 관계성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예전에 <한국 탈핵>(김익중, 한티재)에 대한 사제동행 프로그램으로 저자 강연을 학교 학생들과 함께 들은 적이 있다. 사실, 그 때만 해도 환경이나 핵(원자력), 에너지 등에 대해 알아야한다는 생각까지 하지 못했던 때였고, 그런 면에서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내용과 저자의 강연 내용은, 그동안 미처 알지 못했던 이야기가 가득했었다. 어쩌면 저때, 혹은 그 이후에도 환경과 관련해서는 정책을 추진하는 특정 분야 관계자, 전문가들이 알아서 추진하고 실행하는 문제이며, 그들의 평가와 판단을 신뢰해야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전문가라면 믿을 만 하겠지, 하는 생각.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그 이후, 여러가지 다양한 사례들과 온몸으로 느껴지는 요즘의 지구 환경을 통해 제대로 실감하는 중이다.
그런 면에서, 환경은 누군가에게 맡기고 나몰라라할 문제가 아니라는 결론. 결국 누군가의 힘에 의해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그렇다면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스스로, 나 먼저, 나로부터 시작되는 환경에 대한 관심과 행동이 필요하다는 것, 기후 변화도 아닌 기후 위기라는 말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당장 할 수 있는 것들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 대안을 충분히 고려하고 방법을 찾을 수 있는 의지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 등, 이런 저런 생각들이 끊임없이 솟아나게 만든 책이었다.

실제로 환경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사회의 공고한 체제와 맞서는 도전이었다. 환경 문제를 깊이 들여다보고 고민할수록 지금 나의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통째로 포기해야 한다는 무거운 결론에 다다르곤 했다.(8-9쪽)

이게 참 아이러니라는 생각을 했다. 환경을 이야기하는 것은 분명 우리의 생명과 삶에 직결되어 있는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가 결국 기존 사회에 대한 도전이며 맞서 싸워야 하는 식의 문제가 되었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했다. 그리고 아직도 우리가 말하는 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사회 체제와 더불어 한목소리로 낼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지금껏 우리가 너무나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아왔고, 이로 인해 환경 문제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구체적으로 논하지 않고 넘겼던 부분들, 무지했거나 혹은 쉽게 눈감으려 했던 부분이 분명 있었다. 이걸 깊이 반성해야 할 것이고, 그래서 이제는 일정 부분 포기해야 한다.

지금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미래의 불안이 큰 위협일 테지만, 당장 불안한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미래의 불안 따위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미 기후변화의 피해를 직 간접적으로 입고 있는 취약 계층이 기후변화라는 거대한 구조의 문제를 인식하기에는 그 일상이 너무 버거운 것이다.(81쪽)

그래서, 이 부분에서 아! 하고 무릎을 쳤다. 지금까지의 우리 사회를 변명해보자면, 우린 사회 전체가 불안한 오늘을 살 수밖에 없는 나라였을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든 지금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 다음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것. 그렇다면, 지금까지 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이제는 할 수 있는 때가 되었다.(물론, 이미 많이 지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늦었다 생각했을 때가 가장 빠르다니, 알고도 움직이지 않는게 더 나쁘다.) 그러니 이제 알고 있는 것을 실천해야 할 때. 알기만 하고 하지 못한다는 핑계는 이제 그만!

환경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자발적인 마음을 갖는 것은 일방적인 강요로 가능하지 않다. 사람의 마음을 억지로 바꾸려 하는 것만큼 촌스럽고 아둔한 짓은 없다. 궁극적으로는 문제를 바로 보고 스스로 판단하고 관점을 갖게 하는 종착점까지 잘 안내하는 것이 진정한 소통이다.(108쪽)
문명의 속도를 따라가기 위해 우리가 사용하는 숱한 인위적인 것들의 시작과 끝을 상상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자연과 인간, 환경과 문명은 모두 이어져 있다는 생각을 늘 되새겨야 한다. 모든 것은 어디론가 가게 되어 있다는 말은 결국 자연을 이용하는 것이 공짜가 아니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145-6쪽)

우리가 살면서 꼭 해야 할 것과 꼭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구분해 본다고, 환경 문제는 당연히 전자쪽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에 대해 모두의 공감을 얻는 것부터 시작일 것이다. 우리가 지금껏 누렸던 모든 것들에 이제 환경이라는 필터를 껴서 바라보자. 그리고 그 필터에 걸린 문제들을 볼 줄 아는 시선과 관점을 갖자. 이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할 처음 시작일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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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6
문진영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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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과 아픔, 그리고 마음에 상처가 난 사람의 심정은 어떤 것일까. 그리고 다시 살아내기 위해 가져야 했던 다짐은 무엇이었을까. 무너지지 않고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 참아야했던 마음이 어떠했으며, 비어버린 이들의 마음을 다시 채우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들은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살아있음을 위해, 혹은 자신의 삶을 잃지 않기 위해 이들이 보냈던 신호들은 무엇이었으며, 그 신호들이 닿을 수 있었던 지점은 어디였을까. 그리고 그 신호들의 끝에서 돌아와 이들에게 닿은 인사는 어떤 의미였을까. 이들이 다시 숨쉴 수 있도록 도와준 것들, 사람들은 또 어디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일까. 그 힘은 무엇이었을까.

이 책을 다 읽고, 책을 덮고, 이 소설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아이들에게 해보라고 하듯, 이 소설에 대한 질문을 떠올려봤다. 계속 해보라고 하면 조금 더 질문을 만들어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만큼 이 소설과 소설 속 이들의 모습이 만들어 내는 생각들이 많다는 뜻이겠지. 그리고 그만큼 이들의 삶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이 많다는 뜻일 것이고. 이런 저런 생각들로 그 생각의 끈을 놓지 못하게 만드는 책이다. 그만큼 인상적이라는 뜻.

지원, 주미, 재인, 영식, 쑤언. 이 다섯 이들이 품고 있는 마음은 혼자의 힘으로 감당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던 듯하다. 누구나 자신의 삶을 떠받치고 있는 무게가 있기 나름이지만, 이들에게 얹혀진 무게는 자신의 무게 그 이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감당이 쉽지 않다는 것. 그래서 혼자 힘으로 그 무게를 품고 한 걸음 걷는 것도 쉽지 않다는 것. 하지만 이들은 모두 그 힘겨운 걸음을 꾸역꾸역-사실 이 단어가 갖고 있는 버거움의 느낌이 딱, 알맞은 표현인 듯 느껴진다- 내딛으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이 그 힘듦을 오롯이 제 스스로의 힘만으로 짊어지고 나아가려고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불가능했지만.
불가능했던 게 맞는 것 같다. 사실, 이들은 처음부터 혼자 떠안기에는 너무도 큰 마음들을 안고 있었음에도, 어디에서 어떻게 그 마음들을 나누어야 할지, 내려놓아야 할지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저 누군가 없이 혼자, 외롭게, 꿋꿋하게, 그러면서도 힘겹게 꾹꾹 눌러담기만 했을 뿐. 그러니, 이럴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런 이들이 결국 만났다. 그리고 연결되어있음으로 이들은, 마음의 무게를 조금씩 나눠가지며 가벼워지는 발걸음을 다시 내딛을 수 있었다.

서핑을 하면 딩 나는 건 당연한 거니까.(85쪽)
그건...... 내가 오늘도 파도에 뛰어들었다는 증거니까.(86쪽)

보드에 난 상처, 딩. 이 소설의 제목이 왜 <딩>일까를 생각해 봤다. 결국 상처라는 거.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는 상처가 날 수밖에 없다는 거. 그리고 그 상처는 내가 무언가 했을 때에만 생긴다는 거. 그러니, 상처는 당연하다는 거.

주미가 영식의 품에 안겼을 때, 영식이 쑤언과 함께 살기로 했을 때, 지원 아버지의 장례식에 주미가 찾아갔을 때, 쑤언이 계단에 귤을 내려놓았을 때, 지원이 주미에게 연락했을 때, 영식이 재인을 깍두기시켜 줬을 때, 그리고 주미가 재인을 보고 손을 흔들어 인사했을 때. 이 순간들이 이어지고 쌓여, 이들이 숨쉴 수 있게 되었다. 별 거 아닌 것 같은 이 작은 순간들이 이 책을 읽는 동안 심장을 뻐근하게 만들어 주었다. 괜히 뿌듯하기도 하고.

딩 나는 건 당연하다는 P의 말을 자꾸 곱씹게 된다.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상처임을, 나 스스로 반복적으로 되뇌는 중.

*해당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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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에서 가장 밝은 지붕
노나카 토모소 지음, 권남희 옮김 / 사계절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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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어릴 적 하늘을 날고 싶다는 생각, 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어린 시절이 모두 기억나는 건 아니니 어느 순간 어떤 때 그런 생각을 잠깐이라도 해보지 않았을까, 막연하게 추측은 해본다. 다만, 기억에 남아있는 생각은 어릴적 살던 집 옥상에 올라 아래 마당을 내려다보며, 저 마당의 무성한 나무 위로 떨어지면 무척 폭신하고 포근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은 분명 있다. 떨어져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아마 어릴 때 보던 외화에서처럼, 빨간색 망토를 어깨에 메고 두 팔을 앞으로 뻗어 그대로 발을 구르면... 나도 별 할머니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혼자 웃었다.
별 할머니가 츠바메 앞에 나타난 건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츠바메가 별 할머니와 만나 시간을 보낸 그 봄에서 여름은, 아마 둘 모두에게 값진 시간이었던 것만은 사실이니까. 그리고 더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둘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누군가를 보고 싶어 한다는 것, 그 만남을 위해 간절한 마음을 끌어안고 산다는 것, 그리고 특히 가족에 대한 기억과 생각을 늘 마음 한구석에 품고 살아간다는 것까지. 어쩌면 츠바메가 별 할머니고 별 할머니가 츠바메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둘은 서로 닮아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러니 첫눈에 서로를 알아본 거겠지.
그리고 그들이 함께 시간을 보내며 별 할머니도, 츠바메도 그동안 마음에 안고 있던 숙제들을 하나씩 풀어낸다. 별 할머니에게는 딸과 마코토였고, 츠바메에게는 친엄마와 도오루였고. 이들이 풀어낼 수 있었던 건 결정적으로 서로가 곁에 있었기 때문. 서로가 돕겠다고 나섰기 때문이고, 그 마음이 진심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이들이 함께 보낸 그 시간은 결국 이들이 그들과의 관계를 다시 재정립할 수 있도록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마치 같은 사람은 서로를 알아보는 것처럼, 서로를 한눈에 알아보고 서로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잘 알고 그 곁을 지켜주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알겠냐, 누구든 갖고 태어난 힘은 있다. 그 힘을 최대한 활용해서 살아가는 건 훌륭한 일이야. 하지만 말이다, 잊어선 안 되는 것은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하는가가 아냐. 아무리 강한 힘으로도 이겨내지 못할 크고 무거운 시련이, 살아가는 동안에 반드시 굴러온다."(...)
"무게에 휘둘리지 마라. 같이 가라앉아도 좋으니 한 번 더 떠올라. 알겠냐, 슬픔도 기쁨도 구슬치기와 달라서 끝내기가 없어. 휩쓸리면 지는 거야."(225쪽)

별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남긴 이 말을 여러번 반복해서 읽어본다. 누구나 갖고 있는 힘이 있다는 말, 무게에 휘둘리지 말고 한 번 더 떠오르라는 말. 결국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던 자신만의 힘으로 다시 떠오를 수 있도록, 슬픔과 기쁨이란 감정에 휩쓸리지 않도록 단단하면서도 유연해져야한다는 이야기로 들렸다. 아. 어쩌면 내가 나 스스로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 숨고 피한다고, 감정이란 것이 어느 순간 '이제 됐으니, 그만 끝!' 하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거구나. 오히려 그 감정을 단단히 정비하고, 다시 일어설 힘을 단전에서부터 끌어모아 올려 띄워야한다는 거구나. 아... 이제 그만 비틀거리라는 말로 읽혔다.

아무래도 지나다니면서 지붕을 올려다보고 그 종류나 모양, 색깔을 눈여겨보게 될 것만 같다. 각 지붕의 모습을 통해 그 지붕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가늠해볼 것도 같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지붕도 유심히 보게 된다. 내 집 바로 위에 지붕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이 많은 사람들을 품고 있는 그 꼭대기 지붕은 어떤 마음으로 이 모든 이들을 품고 있을까, 하고. 그리고 또 생각한다. 나중에는 지금처럼 허공에 떠 있는 집 말고, 땅과 최대한 가까이에 집을 짓고 살고 싶다. 그때 집의 지붕은 어떤 지붕으로 할까. 지금부터 곰곰이 구상을 시작해봐야겠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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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밤에
세실 엘마 로제 지음, 파니 뒤카세 그림, 김지희 옮김 / 오후의소묘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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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고 창밖에 짙은 어둠이 깔리는 시간을 골라 읽었다. 파타무아가 이끄는대로 세상 모든 밤을 다니고 돌아와 아침을 맞았다. 그렇게 맞은 아침은 어제와 달랐고, 기꺼이 세상으로 나가 모든 이를 만나겠다는 마음이 되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고 돌아와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파타무아를 따라나설 도전과 용기가 생겨 얼마든지 세상을 돌아보고 올 수 있겠다는 자신이 생겼다. 아주 신나고 기똥찬 밤을 보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내 눈앞에 파타무아가 나타난다면.

'~한다면'의 가정이 가정으로 끝나지 않고, 또 다른 가정과 그 가정의 답으로 또 다른 가정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꼭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에만 마음을 빼앗기는 건 아니니까. 현실과 동떨어져있거나 혹은 현실에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어도, 그런 가정을 머릿속에 떠올려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구석구석이 살짝 붕 떠오르는 느낌이기도 하니까. 그런 느낌만으로도 충분히, '세상 모든 밤'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상상 속 '세상 모든 OO'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래서, 세상을 상대로 한 그 만약에, 나대로의 답을 해보았다.

_세상 모든 도시의 모든 집과 모든 건물의 모든 창문을 세어본다면,
: 똑같아보이는 창문 안에 사실 전혀 다른 사람들의 색깔과 냄새와 모양과 표정을 알아챌 수 있겠지. 그래서 종종 '내맘 같지 않은' 상황에 속상하기도, 시무룩해지기도 하겠지. 창문의 불빛이 하나 둘씩 꺼져가는 것을 세어보며 점점 고요해지는 도시의 침묵 속에서 나도 덩달아 마음 가라앉겠지. 그 와중에 마지막까지 밤과 새벽을 지키는 창문의 불빛을 발견하고는 마음을 담아 간절하게 빌겠지. 불빛이 꺼지지 않기를.

_세상 모든 길의 모든 그림자가 속삭이기 시작한다면,
: 그 속삭임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들어 기억하려 하겠지.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어 모든 것을 다 주어담을 수 있는 커다른 마음 주머니를 준비하겠지. 그러고도 부족하면 친구와 친구, 또 친구의 주머니까지 빌려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다 모아 담겠지. 그리고 이 밤이 끝날 때까지 하나씩 또 하나씩 소중하게 꺼내보고 또 꺼내보겠지. 모든 그림자의 말에 귀기울이고 들어주는 내가 될 수 있을까.

_세상 모든 음악가가 세상 모든 음표를 동시에 연주한다면,
: 세상은 수많은 음표로 가득 차고, 음표로 가득찬 세상에 살고있는 사람들의 마음에까지 음표가 들어가 한자리 차지하게 되겠지. 그럼 마음에 음표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더 큰 자리를 만들어주고 더 많은 음표를 차지하기 위해 세상 모든 음악가를 찾아 나서겠지. 음악가의 음표 연주를 더 많이 듣고 싶어 안달이 나겠지. 그 조바심으로 세상이 들썩일 때까지.

_세상 모든 곳을 잎 가득 달린 나무들이 뒤덮는다면,
: 그 잎 사이사이 새어 들어오는 빛을 밟으며 나무들과 뒤엉켜 지내겠지. 그 나무와 나무의 잎이 내뿜는 향을 온몸에 묻혀 다니겠지. 세상의 모든 곳에서 나무를 만나고, 나무와 숨쉬고, 나무와 살며 나무의 삶을 곧 나의 삶으로 받아들이고, 나의 삶이 나무에게 닿을 수 있도록 나무 곁을 지키겠지. 잎 가득 달린 나무가 내가 되고, 내가 그 나무의 또 하나의 잎이 될 때까지, 그렇게 어우러질 수 있는 나무 그늘 안에서 포근하고 싶다.

_세상 모든 도시에 있는 모든 동물원의 모든 우리를 우리가 열 수 있다면,
: 당장 온 세상의 모든 도시를 다니며 동물원의 우리를 열어 줄 거야. 어떤 동물도 소중하지 않은 생명이 없으며, 그 동물들을 동물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에 가둘 권리란 어떤 인간에게도 없으니까. 그럼 동물들의 우리 주변으로 모여 다시 우리를 열러 가는 우리를 보호해 주겠지. 그 동물들로부터 동물들에게로 이어지는 연대의 힘을 우리도 함께 느끼며, 동물들과 우리가 함께 우리를 열러 다니는 여정을 끊임없이 이어 나가겠지. 그런 날이 꼭 왔으면.

_세상 모든 밤에 사람들이 저마다의 파타무아를 따라간다면
: 저마다의 꿈과 희망과 미래와 삶을 파타무아와 함께 누리고 경험해볼 수 있겠지. 미처 지금까지 생각해보지 못했던 자신에 대해, 그리고 세상에 대해 알아채는 순간이 오겠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세상으로 더 나아갈 수 있는 힘으로 삼겠지. 그 힘들이 쌓이고 쌓여 이 세상은 지금보다 더 크고 더 따뜻한 마음으로 가득 찰 수 있겠지. 그렇게 가득찬 세상의 모든 것들로부터 다시 나를 지탱할 수 있는 기운을 얻을 수 있겠지. 그럼, 다음날 아침 사람들 모두 개운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하루의 시작을 받아들이겠지. 더 환하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상상에 상상을 더해서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매일 밤마다 책장을 넘겨보게 만든다. 이게 무슨 일이야!

바깥 창문을 살짝 열어두고, 밤시간을 기다리고 싶어졌다.
파타무아가 나에게도 찾아와주기를 기다리고 싶어졌다.
그럼 나도 기꺼이 고양이 걸음으로 사뿐사뿐 '세상 모든 밤'으로 들어갈테다.
그리고 기분 좋게 아침을 맞고 싶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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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함을 듣는 일 - Listen to Silence
김혜영 지음 / 오후의소묘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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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작가의 그림들을 책 한 권에서 다 볼 수 있어 행복하다. 그리고 고맙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다 봐도 되나? 싶을 정도의, 과분한 배려를 받은 느낌도 든다.
제목부터가 이 책을 함부로 아무데서나 펼치지 않고 싶게 만들었다. 괜히 환한 대낮, 사람소리 시끌시끌한 소음에서 벗어나는 시간과 장소를 찾고 싶었다. 그리고 책을 펼친 시간은 밤, 어둠 안에서 누구도 나를 방해하지 않을 장소, 작은 스탠드 불빛 안에서 조용히 책을 펼쳤다. 그리고 천천히 책장을 넘겼다.

밝게도 보고 조금 어둡게도 보고 앉아서도 보고 누워서도. 오래 보기 위해 그려진 그림이다.(16쪽)
_<나는 가만히 손을 뻗는다>, 2019. 천에 동양화 물감, 37X52cm.
: 오래 보려고 그려진 그림이라면, 오래 봐주고 싶다. 그럼, 오래 본다는 건 뭘까. 그림 속 그림과 그림 속 그림이 걸린 공간에서 내 시선은 여기에서 저기로, 또 다시 구석에서 가운데로 옮겨다니는 듯하다.

바쁘게 돌아가는 현실 속에 잠식되어 내가 점점 사라진다고 느껴질 때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누구도 없는 공간에서 나 자신과 가까워지는 시간이 되기를.(61쪽)
_<아무도 살지 않는 집>, 2020. 천에 동양화 물감, 유채, 97X138cm.
: 언젠가 숨고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의자를 한없이 내리고 어디에서도 나를 찾지 못하도록 숨고 감추려고 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누구의 시선과 관심조차 아팠던 그 때 필요했던 것이 이런 공간이었구나. 아무도 들이지 않으려 했던 내가 나를 만날 수 있을만한 곳. 이 집 역시 숨기 위한 방어막을 짙게 만들어놓았구나.

날 좋은 날, 무거운 몸을 일으켜서 밖으로 나간 날.(67쪽)
_<초록의 틈에 서>, 2020. 천에 동양화 물감, 72.7X91cm.
: 오늘이 딱 그런 날이었다. 몸이 무겁고 기운이 나지 않는 날. 아침부터 분주히 움직이다 한낮에 지쳐 의자에 파묻힌 날,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가 좋아하는 서점에 다녀왔다. 돌아오는 길 꽃집에서 팔던 후리지아 한 단을 사올 걸, 후회했다. 다음엔 꼭 사와야지.

각기 다른 삶에서 나오는 것들이 다정한 겹을 만들어줄 듯했다. 벽에 그림을 걸고 한 발짝 뒤로 나온다. 팔을 X 자로 만들어 스스로를 안으며 생각한다.(83쪽)
_<고요한 상영회, 두 번째>, 2022. 천에 동양화 물감, 유채, 53X41cm.
_<뒷면에서 만나요>, 2022. 천에 동양화 물감, 유채, 53X40.9cm.
: 저 상영회에 초대받고 싶다. 뒷면에서 마주치게 되는 사적인 만남이 더 매력적이긴 하다. 어쩌면 상영되는 이야기 이면에 숨겨진 은밀한 비밀이 더 마음을 끌어당길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반짝이는 결 따라 다른 삶이 어우러질 때, 이 이야기들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게 되기도 한다. 뭐, 그런 느낌.

물결이 내는 소리는 조용하다. 주의를 기울여 조용함을 듣는 것은 다정한 관심의 방향이다. 사소하지만 부명하게 있는 이야기들을 만나고 싶다.(95쪽)
_<물결이 내는 소리>, 2021. 천에 동양화 물감, 유채, 91X91cm.
: 여행 중 아침 산책을 하다, 바다의 물결을 한참 바라보며 앉아있던 장면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 물결을 향하고 있던 그 시간들이 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좋았는데. 조용함을 듣는다는 것이 참 역설적이지만, 잘 듣고싶어지는 매력적인 말이기도 하다. 조용함을 듣는 것, 조용함을 듣는 일. 작가의 조용함이 작품으로 내게 스미는 느낌이 좋다.

날씨가 크게 두 번 바뀌는 동안 많은 친구들이 그 낡은 의자에 기대 슬픈 날에는 울기도 하고 지친 날엔 짧은 잠을, 또 작은 한숨 같은 말들을 뱉고 가기도 했다.(130쪽)
_<기대 앉는 우리들>, 2021. 천에 동양화 물감, 유채, 90X42cm.
: 예전 사무실에 작은 1인용 소파가 있었다. 가끔 다리까지 올려 앉아서는 쿠션에 머리를 기대고 잠들기도 했었다. 지치고 피곤하고, 마음을 다치게 하던 순간들을 그 소파에서 위로받았었다. 그 소파가 그리워진다.

글그림이란 말이 잘 어울리는 책이다. 어떻게 조용함을 듣을 수 있는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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