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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스
워푸 지음, 유카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6월
평점 :

픽스 FIX _ 워푸
타이완 추리소설 / 현대문학
타이완 소설은 처음 접하는 것 같은데 되게 묘하고 재밌었다. 소설 속 소설, 실제 사건의 재구성, 작가와 독자의 대결 등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컨셉들이 흥미를 끌어내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이런 컨셉이라면 사실 반전이나 스릴감이 훨씬 더 클 것이라 생각했는데 예상을 뒤집고 의외로 잔잔하게 흘러간다. 물론 소설 속 소설, 그러니까 그 실제 일어났던 억울한 누명 사건이라는 것들이 보통 사망 사건이긴 하지만 그 사건 자체를 다이나믹하게 그려내기 보다는 작가와 독자 '아귀'와의 설전에 중점을 두고 있으니 사건의 현장감은 별로 느껴지지 않는 게 사실이다. 대신 작가와 아귀가 메일을 통해 주고받는 설전은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로서 매우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다. 지루한 가르침이 아닌 작가가 생각지 못한 부분을 찌르고 들어가는 아귀의 예리함이 추리 독자들의 흥미를 끌어내고, 그것을 감정적으로 대처하기 보다는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고민하는 작가의 태도가 소설을 읽는 데 쓸데없는 방해를 불러 일으키지 않는다. 그래서 바짝 긴장감이 솟아 오르지 않지만 그 흥미로운 대화만으로도 끝까지 가독성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이야기는 국내 문단에서 꽤 이름을 떨친 한 작가에게 도착한 메일 한 통으로 시작된다. '아귀'로 부터 온 작가의 소설에 중대한 결함이 있다는 내용의 메일이었다. 인기 좀 있는, 소위 말해 잘나가는 작가인데 이 얼마나 어이가 없고 자존심이 상한단 말인가? 게다가 아직 출간도 되지 않은 소설의 내용을 지적하다니 정체가 의심스럽다. 하지만 메일을 주고 받을 수록 아귀의 논리에 이끌리며 당장 출간을 앞둔 소설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에 빠진다. 결국 이 작가의 소설은 엄청난 판매고를 올리게 되는데... 솟아오른 어깨, 뻣뻣한 목, 자만과 아집이 가득한 작가였다면 아귀의 메일 따위는 무시했을테지만 처음에 받은 메일이 기분 좋지 않았음에도 작품을 위해 한 번 더 고민하는 태도가 높은 완성도로 이어졌을 게 분명하다.
이어서 작고한 작가의 작품을 이어 쓰게 된 대필 작가, 경찰인 아버지에게 들은 내용을 토대로 작품을 써나가는 아들, 판타지와 SF소설을 좋아하는 은행원, 단편소설로 문학상 대상을 받게 된 수상자, 로맨스 소설 작가, 베스트셀러 작가 등이 '아귀'의 메일을 받게 된다. 각 소설들은 일어났던 사건들을 재구성 하여 이를 바탕으로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에 워푸 작가의 이 <픽스>가 발표되었을 때 꽤 동요가 있었을 것 같다. 우리나라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가 개봉하면 그 실화 자체가 이슈화 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었으니까... 소설 속 소설이 실제 사건과 얼마나 닮아있는지 모르겠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하였기에 가볍지 않고, 해당 작품의 작가에게 송곳같이 날카로운 지적을 보여주는 아귀의 메일이 뻔하지 않아 일곱 번 반복되는 패턴에도 지루함이 있을 수 없었다. 시대적, 정치적 배경이 되는 요소까지 파고드는 아귀의 작품 분석을 읽고 있노라면 마치 추리 소설을 쓰는 요령을 배우는 느낌이 든다. 추리소설을 좋아해서 종종 읽지만 중간 과정을 빼먹은 약간은 막연한 추측을 해볼 뿐 작가의 글을 의심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아귀의 지적을 읽으면서 인물의 성격, 스치는 의미없는 한 마디, 아주 사소한 움직임 하나까지도 작품의 방향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확인하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당연한 것이지만 분명 내가 읽을 때에는 어떤 의심을 품을만한 여지가 없었던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전후가 동일선상에 연결되지 않으면 반전이 반전이 아닌 억지가 될 수 있다는 것도 보여주었고...
난 분명히 재밌는 책을 한 권 읽었는데 어쩐지 소설을 쓰는 요령 혹은 추리소설을 읽는 요령에 대해 배운 것 같아 웃음이 난다. 앞으로는 추리소설을 많이 접해본 독자로서의 감각으로 추측하기 보다는 합리적 의심을 하는 독자가 되어 볼까 싶다. 물론 잘 될지 모르겠지만... ^^
인물 설정과 플롯이 어긋나면, 인물이 일부러 어떤 행위를 해서 어떤 플롯을 끌어내는 상황이 벌어진다. 독자는 작가의 손이 이야기 속으로 뻗어 들어와 인물을 강압적으로 억누르고 있음을 똑똑히 알아차리게 되고, 이야기도 비합리적으로 흘러가게 된다. 독자가 읽을 때 플롯은 '작가가 써낸 것'이 아니라 실은 '인물이 연기해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