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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락 ㅣ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
은모든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12월
평점 :

안락 - 은모든 소설
아르테 arte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
원고지 300매라는 부담스럽지 않은 분량의 한국 문학을 만날 수 있는 시리즈가 아르테에서 출간되었다. 정통 소설이라는 말을 들으면 일단 내 얕은 문장력으로는 이해 하기 어려울 것만 같고 이 책에서 내가 무언가를 진심으로 공감하거나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싶은 마음이 앞서는데 한 손에 들어오는 작은 소설은 책을 펴는 손을 가볍게 했고, 그 안에 담긴 글은 책장을 끝까지 넘기게 했다. 깊이가 있으면서도 타인의 모습이되 나 역시 쉽게 그 장면에 들어갈 수 있게 하는 내용의 소설. 무게가 있으면서도 멀게 느껴지지 않은 그런 소설이었다.
이번에 만나본 작은책 두 권 중 '은모든' 작가의 소설 <안락>은 남편을 보내고 자신의 수명계획을 세운 할머니와 그 가족의 이야기이다. 할머니의 그런 계획이 가족들에겐 청천벽력과 같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설상가상 국회에서 안락사 합법화 법안이 통과되었다. 할머니는 합법적으로 자신의 수명계획을 실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자연스러운 흐름을 거스르고 스스로 자신의 명을 정하신 할머니. 할머니의 마지막이 점점 다가오는 것을 날마다 느껴야 하는 가족들의 심정은...
할머니의 계획이 실행되기 전까지의 남은 시간들... 할머니와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지혜의 엄마와 지혜에게 똑같이 주어졌지만 그 둘은 그 시간을 상반된 자세로 흘려보낸다. 마음으로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은 가족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겠지만 특히 지혜의 엄마는 할머니의 선택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리고 그런 할머니와 엄마의 모습을 바라보는 딸 지혜의 모습이 소설에 담겨 있다.
갑작스런 사고로 할아버지와 이별을 했던 할머니. 자신의 수명을 계획하고, 담담하게 주변 정리를 한다. 사랑하는 이들에게 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온갖 기계와 약물에 의지했다가 떠나는 마지막은 생각만으로도 끔찍하셨던 것 같다. 점점 자신의 몸이 자신의 의지를 벗어나고 그 무기력함과 고통을 견뎌야 하는 파킨슨병의 무서움을 전혀 모르는 바는 아니기에 할머니의 의지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도 내 가족이 아니니 이런 생각이 드는 거겠지. 내 가족이라면 나도 지혜의 엄마처럼 어떤 순간에도 포기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스스로 선택한 마지막 순간, 할머니의 표정은 편안했다. '개운하게 가겠다'라던 결심이 그대로 이루어진 듯 모든 짐을 내려놓고 떠나는 할머니의 입 끝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p148)
마지막 순간 할머니는 평온한 모습이었고 가족들도 할머니와 한 명 한 명 인사를 나누며 보내드릴 수 있었지만 가족의 곁에 조금 더 계실 수 있었는데, 조금 더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는데 그렇게 가신 할머니의 모습이 평생 남아 상처가 되진 않을까? 과연 서서히 준비를 하고 인사도 한 뒤 이별한다고 해서 갑작스런 이별보다 그 고통이 덜할까? 그렇다면 남겨질 가족을 위해 할머니는 스스로의 고통을 짊어지고 삶을 연장했어야 더 좋았을까? 모든 것은 의문 투성이다. 하지만 이 소설을 통해 삶과 죽음, 인간의 존엄... 그리고 각 세대가 느끼는 감정들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비록 아무리 고민해봐도 아직까진 그 간극이 좁아지지 않고 있지만 그래도 나에게 이 세상에 태어난 누구나가 살아야 하는 삶과 맞아야 하는 죽음에 대해 꽤 많은 생각을 해볼 기회를 준 소설이었다. 작지만 절대 가볍지 않은...
'은모든'의 소설 <안락>은 작은책 시리즈가 기획한 또 하나의 특별함, '소리책'으로도 만나볼 수 있는데 그 음성의 주인공이 배우 '한예리'라고 한다. 타인의 감정이 섞여들어간 목소리를 통해 듣는 소설 <안락> 역시 기대가 된다.
나는 지금까지 한순간도 할머니의 선택을 지지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후에 벌어질 일에 대해 온전히 다 알지 못한 채 말이 앞섰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그 순간 처음으로 했다. (p75)
할머니는 자신의 몸을 여기저기가 해지고 찢긴 옷에 비유했다. 다 떨어진 옷을 억지로 기워 입듯이 매일 자신의 몸을 약으로 기워 나가고 있다는 거였다. (p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