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모스크바의 신사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6월
평점 :

모스크바의 신사 - 에이모 토울스
by 현대문학
모스크바의 신사가 정말 이러한 성품을 지녔을까 싶을 정도로 지난 시절의 계급에 얽매이지 않고 소탈한 듯 보이면서도 어떤 환경에서도 몸에 밴 듯한 단정함이 있는 남자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 화려한 파티에서 지적 매력을 발산하며 여인들의 시선을 받을 것만 같은 그는 크렘린 궁전에서 메트로폴 호텔 감금형을 선고 받게 된다.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 이후 귀족사회가 무너졌고 그 역시 처형되어야 할 대상이었지만 혁명에 동조하는 시를 쓴 적이 있다는 이유로 감형되어 모스크바의 메트로폴 호텔을 벗어날 경우 총살에 처한다는 판결을 받는다. 물론 그가 지금껏 지내던 스위트룸이 아닌 혁명 전의 시대에 귀족들의 하인들이 쓰던 다락방으로 옮겨가야 했지만 말이다. 그 어떤 동요 없이 위로 올라가 생활하는 듯 했으나 시간이 길어질수록 벽이 사방에서 밀려들어와 공간이 점점 좁아질 것만 같았다. 그 시기에 만난 꼬마 숙녀 '니나 클리코바'와의 만남을 시작으로 그녀와 함께 자신이 그동안 지내면서 알지 못했던 호텔 곳곳을 누비며 자신의 세계를 점차 넓혀 가게 된다. 메트로폴 호텔은 더이상 감옥이 아닌 그가 살아가는 또 하나의 터전이 되었다. 호텔 직원들의 동료가 되기도 했으며 여배우 '안나 우르바노'와 연애를 하기도 하고, 니나의 딸인 '소피야'의 아버지가 되기도 한다.
밖의 사회적인 분위기와는 전혀 상관 없다는 듯한 분위기의 호텔. 그리고 그 안에서 벗어날 수 없는 백작의 삶도 그가 간신히 사형을 피한 채 감금된 사람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평온하고 우아했다. 무력하게 좁은 공간에서 남은 여생을 하루 하루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또 다른 자신의 삶을 찾은 백작. 적어도 내게는 '자신의 배경을 내세워 갑질을 하고 다닐 게 아니라 이 정도의 품위는 보여야 진짜 신사지!'라는 생각을 들게 했다. 그를 지켜보던 누군가에게는 또 곱지 않게 느껴지기도 했겠지만 말이다.
700페이지가 넘는 가운데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내게는 매우 잔잔한 스토리였지만 그럼에도 시선을 떼지 못하게 만든 것은 이렇게 매력적인 인물을 만들어 낸 작가의 필력 덕분일 것이다. 끝까지 그렇게 흘러갈 것만 같던 스토리가 언제 이렇게 됐을까? 싶을 정도로 의외의 반전을 주기도 한다. 두께에 겁을 먹었던 나에게는 잔잔하면서도 매력적일 수 있다는 이 스토리 자체가 반전이기도 하고 말이다. 아, 내게 있어 또 하나의 재미있는 부분은 소피야의 우승이었다. 러시아에서 차이콥스키의 곡과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곡, 보로딘의 곡을 연주한 연주자들과 모차르트 소나타 1번을 연주한 소피야. 러시아의 거장들의 곡을 모차르트의 소나타로 물리치다니~
곳곳에 흥미를 느낄만한 요소들이 있다. 그래서 백작의 매력에 그 요소들이 더해져 백작 대신 가둬진 누군가의 모습을 보게 만들었다. 두께에 너무 겁먹지 않고 일단 읽어 본다면 에이모 토울스의 매력을 다들 느껴볼 수 있지 않을까?!
"정오까지 잠을 잔 다음에 누군가를 시켜 쟁반에 받친 아침 식사를 가져오도록 하는 것. 약속 시간 직전에 약속을 취소해버리는 것. 한 파티장의 문 앞에 마차를 대기시킴으로써 얘기만 하면 즉시 다른 파티장으로 이동할 수 있게 하는 것. 젊었을 때 결혼을 피하고 아이 갖기를 미루는 것. 이런 것들이야말로 최고의 편리함이에요, 안나. 한때 난 그 모든 걸 누렸었죠. 그런데 결국 나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불편함이었어요." (p5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