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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 기원
천희란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5월
평점 :

영의 기원 - 천희란
(332p / 한국소설 / 현대문학)
삶과 죽음을 담은 천희란의 소설집.
나에겐 삶의 향기보다 죽음의 향기가 짙게 느껴져서 조금 힘들었던 소설이다. 삶을 살아가는 그 자체가 아닌 죽음과 그 죽음 뒤에 기억되는 삶의 흔적, 존재의 증명에 더 포커스가 맞춰진 것처럼 느껴져 아직 내 삶에 대해서도 고찰한 적 없는 깃털같은 나의 내공으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알듯 말듯 하다가 마무리에 가서는 무거움만 남았던 것이 대부분, 부족한 독해력 덕에 맛있게 먹고 체한 느낌과도 같았다. 이와 같은 소설을 대할 때마다 나의 부족함이 한없이 안타깝고, 작가를 세계를 이해할 수 없음에 답답하기만 하다. 그렇다고 멀리 치워두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아닌 것이 꼭 그 내면을 들여다 보고 싶은 오기가 생기고, 곁에 두고 한 번씩 꺼내 읽어 나이를 먹을 때마다, 내공이 쌓일 때마다 한 겹씩 벗겨내고 싶은 소설이었다.
<영의 기원>은 201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고, 2017년 젊은작가상을 수상한 천희란의 소설 여덟 편이 담긴 소설집이다.
앞서 고백했듯 나는 이 소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여성,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는데 <창백한 무영의 정원>에서는 삶과 죽음보다 죽음 뒤에 남겨질 자신이 존재했던 흔적에 더 집착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죽음들이 번져가는 가운데 자살을 결심한 그들. 이름조차 모르는 그들이 서로 모여 순서대로 죽음을 맞이하고자 하지만 결국 그들은 앞선 이의 이름을 기억한다.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업적을 남기고 그런 의미가 아니다. 그저 한 사람이라도 이 세상에 나라는 사람이 존재했음을 기억했으면 하는 바람? 마지막에 본 그 그림자는 그런 염원이 아니었을까...
<영의 기원>은 프리저브드 플라워와 편지지를 남기고 간 영과 영의 삼촌의 말에 집중해 보았다. 가장 아름다울 때 꺾어 만든 프리저브드 플라워. 그 아름다움이 계속 될 것 같지만 꽃잎이 떨어지지 않는 대신 꽃은 빛깔을 잃어 간다. 아름다움은 붙잡거나 가둘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 영이 그것을 남긴 이유는 아름답게만 기억되길 바라서 였을까, 변치 않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을까?
<다섯 개의 프렐류드, 그리고 푸가>는 바흐의 평균률을 떠올리게 하는 제목이라 인상적이었다. 사실 12개의 음을 균등하게 나눈 평균률과 이 소설의 관계가 무얼까? 주고 받는 형식의 푸가를 편지글에 비유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성 소수자의 사랑, 죽음과 진실. 그리고 거짓... 오랜시간에 걸쳐 쌓인 믿음과 신뢰에 대한 배신. 왜 마지막 가는 길에 그런 고백을 한 것일까? 자신이 편하자고? 좋은 사람인 척 한 것에 대한 풀편함? 결국 자신은 솔직해지면서 홀가분해 지고, 남은 사람에게는 묵직한 충격만을 안겨준 그녀. 그렇게 자신은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싶었던 것은 아닐지.
자살이 살인으로 변모하는 <사이렌이 울리지 않고>. 드러나기 전까지는, 겪기 전까지는 그런 입장이었다는 사실을 감지하지 못했다. 그것은 형인도 그랬고 수진도 그랬다. 그러나 어떤 입장이었던 간에 결과적으로는 강자는 강자로, 약자는 약자로 남아버린... 그래서 그런 결정을 했던 형인. 사회적 비난은 사장 혹은 수진의 부모, 수진을 향할 지언정 죄의 무게는 형인이 짊어지고 가게 될 터인데 이를 어쩌나...
죽음 뒤에 남겨진 무언가가 읽는 내내, 그리고 읽고 난 뒤에도 나를 많이 힘들게 했다. 심지어 책을 다 읽고 리뷰를 쓰려던 참에 부고를 듣고 종일 조문을 다녀왔더니 그 묵직함이 더 깊고 무겁기만 했다. 읽고 또 읽어야지. 그리고 오늘 떠나보낸 그 분의 존재를 기억하고 또 기억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