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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땀 ㅣ 소설향 앤솔러지 1
김화진 외 지음 / 작가정신 / 2025년 8월
평점 :
매달 작정단 도서를 받아들 때마다
출판사에서 수많은 이야기 중
작가정신과 상통하는 이야기만을 선별하고
세심히 큐레이팅한 결과물을
공작이 자기 꽁지깃을 자랑하듯 하는 것 같아
책을 읽는 일이 깜짝 선물을 풀어보는 것처럼 설레고 기쁘다.
여러 출판사에서 서평단 활동을 해보았지만,
책을 읽으며 책을 펴낸 출판사의 진심과 뚝심을 발견하는 경험은 작정단 활동이 처음이다.
소설향 앤솔러지 시리즈의 첫 번째 책, 『초록 땀』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앤솔러지를 그리 즐겨 읽는 편은 아니다.
앤솔러지는 특정 테마를 주제로 청탁받은 글을 엮은 것이라,
한 작가의 소설관을 낱낱이 톺아볼 수 있는 단편집보다 퀄리티가 낮고
다 읽고 났을 때 결국 앤솔러지에 실린 작품 중
한두 작품 정도만 기억에 남는다는 (개인적인) 선입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초록 땀』은 앤솔러지에 대한 나의 선입견을 기꺼이 배반해준 소설집이었는데,
일단 여섯 편의 소설이 모두 고르게 재밌었다.
아, 매끄러운 필력이 선사하는 보장된 재미란 이런 것이다.
표제작인 김화진 작가의 「초록 땀」은 첫 문단부터 강렬하다.
요즘 내게는 숨 문제가 있다. 숨을 들이쉬는 법을 이상하게 의식하게 되었다. 특히 밤이 되면, 나는 입안에서 공기를 계속 굴렸다. 그러다 삼킨다. 자연스럽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게 아니라 투명 사탕을 녹이지 않고 그대로 삼키는 것처럼 꿀떡 삼킨다. 그러면 배 속에 공기방울들이 쌓여 오글거린다. 불편감은 당연하고 소화도 잘 되지 않고 잠도 잘 오지 않았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 그 현상은 더 심해진다. 입을 다물고 코로 숨을 쉬어야 하는데 그럴 때 혀를 어디다 뒀었지? 입천장에 붙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러면 턱과 이에 힘을 잔뜩 주게 된다.
입안에서 잘은 공기 방울을 굴리듯, 일인칭 화자의 자기 고백이 소설을 촘촘하고 밀도 높게 메운다. 촉감류 클라우드 슬라임을 늘리고 접으며 양껏 공기층을 만든 뒤 손바닥 전체를 이용해 슬라임 내부에 겹겹이 쌓인 공기 방울을 한 번에 와다닥 터트리는 쾌감이 소설 끝까지 지속된달까.
이거 너무 찬양이 아닌가 싶지만
표제작 「초록 땀」의 밀도가 선행되었기에 이어지는 다른 작품들 역시 (기대감이라는 이름의) 버프 효과를 알맞게 받아 찬연하게 재밌었다.
문진영과 김사과의 소설을 읽을 때는 함께 도시를 배회하게 되었다.
어찌할 수 없음을 포착하는 방식에서 작가의 개성이 드러나 좋았다.
이서수의 소설을 읽을 때는 내가 가진 색안경을 의식하게 되었고……
사상과 신념 이전에 나약하고 사랑을 하는 인간이 있음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색은 빛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어떤 빛이 어떤 색을 띠게 되는지,
빛과 색 사이의 인과를 찾으려는 움직임은 무용하기만 하다.
그렇다. 20세기의 이성은 이미 실패했다.
그런데 우리는 왜들 그렇게 상대의 허점을 톺아내어 공격들을 해대는지!
21세기 인간들이여 우리네 인생에 인과 없음을 인정하라.
사상은 미워하되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
그러나 한편으로 인과가 없는 사상이란 그 자체로 무지함의 증거가 아닌가…….
이서수의 소설을 읽으며 내 사상이 개연성은 있으나 인과가 없다는 걸 자각하게 되었다.
인과를 가진 인간이 되려면 공부를 해야 하는구나.
공부하자, 인간들아.
공현진의 소설은 시류에 밝다. 죄책감과 책임의 윤리. 윤리가 가진 회색지대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는 감상이 앞서기는 했으나 이 시대에 필요한 이야기임은 자명하다.
김희선의 소설은 (심지어 작가노트까지) 혼란하고 혼몽하다. 어쩌면 김사과의 소설보다 더.
읽다 잠들면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다. 혼몽하고 아름다운 곧 잊어버릴 꿈을.
어떤 기록 매체로도 완전히 포착할 수 없는 감각을 포착하려는 시도.
그 시도로서의 첫 앤솔러지.
느낌이 좋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요즘 내게는 숨 문제가 있다. 숨을 들이쉬는 법을 이상하게 의식하게 되었다. 특히 밤이 되면, 나는 입안에서 공기를 계속 굴렸다. 그러다 삼킨다. 자연스럽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게 아니라 투명 사탕을 녹이지 않고 그대로 삼키는 것처럼 꿀떡 삼킨다. 그러면 배 속에 공기방울들이 쌓여 오글거린다. 불편감은 당연하고 소화도 잘 되지 않고 잠도 잘 오지 않았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 그 현상은 더 심해진다. 입을 다물고 코로 숨을 쉬어야 하는데 그럴 때 혀를 어디다 뒀었지? 입천장에 붙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러면 턱과 이에 힘을 잔뜩 주게 된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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