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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우면 종말 - 안보윤 산문
안보윤 지음 / 작가정신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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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표지가 마음에 든 책.


 



외로우면 종말은 안보윤 소설가가

작년부터 올해까지 일간지에 연재해온 칼럼들을 엮어낸 산문집이다.

 

이 책의 만듦새는 산문의 배치에서 비롯된다.

 

시간 순으로 배치된 글이 아니라

산문을 쓴 이의 마음의 궤적을 따라 배치되어

 

책을 읽는 동안

지쳐 옹송그렸던 누군가의 발자국 위에 내 발을 대어보는 방식으로 산문을 읽게 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고양이가 돼.

 

눈이 수북하게 쌓인 겨울날

길 고양이들이 자신이 앞 발을 디뎠던 자리에

기가 막히게 뒷발을 넣는 방식으로

과거의 작가와 현재의 내가 한 몸이 되어 걷는 느낌.

 

실은 추워 죽겠어서 어떻게든 체온 보전을 해보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는데

 

남이 보았을 때는 우아한 산책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뭐야 저 사람 예쁜 책을 읽고 있어 수근 수근)

 

작가는

스스로의 지독한 외로움을 인지하는 것으로 시작해

그럼에도 자신을 살게 하는 외부의 풍경을

사탕이나 스티커, 구슬 같은 걸 모으듯 열심히 기록한다.

 

일상의 사소한 풍경 속에서 사소하지 않은 감정을 발견하는 것.

사소한 풍경 뒤의 수많은 시간의 퇴적을 가늠해보는 것.

그것이야말로 일상 에세이의 미덕일 것이다.

 

많은 사람이 오가는 도심 카페에 앉아 안보윤의 산문집을 펼쳐보길 권한다.

책을 읽다 문득 고개를 들면 소란스러운 풍경이 달리 보일 지도,

그래서

지구에 꽝 부딪히는 운석의 마음으로

이 산문을 직접 이어쓰고 싶어질 지도 모른다.



 


(from) 고양이와 사람이 많은 곳에 선 사람이

(to) 외로움 타는 도시 산책자들에게

동시다발로 발신하는 편지

(스팸 아님)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그들 사이에는 지금껏 무수히 많은 소란과 노력과 보답이 존재했을 터였다. 나는 온갖 시행착오 끝에 견고해진 관계의 단면을 구경했을 뿐이고, 관계의 지속을 위해 앞으로도 저들은 끊임없이 몸과 마음을 내던져야 할 것이었다. -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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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땀 소설향 앤솔러지 1
김화진 외 지음 / 작가정신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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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 작정단 도서를 받아들 때마다

출판사에서 수많은 이야기 중

작가정신과 상통하는 이야기만을 선별하고

세심히 큐레이팅한 결과물을

공작이 자기 꽁지깃을 자랑하듯 하는 것 같아

책을 읽는 일이 깜짝 선물을 풀어보는 것처럼 설레고 기쁘다.

여러 출판사에서 서평단 활동을 해보았지만,

책을 읽으며 책을 펴낸 출판사의 진심과 뚝심을 발견하는 경험은 작정단 활동이 처음이다.

 

소설향 앤솔러지 시리즈의 첫 번째 책, 초록 땀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앤솔러지를 그리 즐겨 읽는 편은 아니다.

앤솔러지는 특정 테마를 주제로 청탁받은 글을 엮은 것이라,

한 작가의 소설관을 낱낱이 톺아볼 수 있는 단편집보다 퀄리티가 낮고

다 읽고 났을 때 결국 앤솔러지에 실린 작품 중

한두 작품 정도만 기억에 남는다는 (개인적인) 선입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초록 땀은 앤솔러지에 대한 나의 선입견을 기꺼이 배반해준 소설집이었는데,

일단 여섯 편의 소설이 모두 고르게 재밌었다.

, 매끄러운 필력이 선사하는 보장된 재미란 이런 것이다.

 

표제작인 김화진 작가의 초록 땀은 첫 문단부터 강렬하다.

 

요즘 내게는 숨 문제가 있다. 숨을 들이쉬는 법을 이상하게 의식하게 되었다. 특히 밤이 되면, 나는 입안에서 공기를 계속 굴렸다. 그러다 삼킨다. 자연스럽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게 아니라 투명 사탕을 녹이지 않고 그대로 삼키는 것처럼 꿀떡 삼킨다. 그러면 배 속에 공기방울들이 쌓여 오글거린다. 불편감은 당연하고 소화도 잘 되지 않고 잠도 잘 오지 않았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 그 현상은 더 심해진다. 입을 다물고 코로 숨을 쉬어야 하는데 그럴 때 혀를 어디다 뒀었지? 입천장에 붙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러면 턱과 이에 힘을 잔뜩 주게 된다.

 

입안에서 잘은 공기 방울을 굴리듯, 일인칭 화자의 자기 고백이 소설을 촘촘하고 밀도 높게 메운다. 촉감류 클라우드 슬라임을 늘리고 접으며 양껏 공기층을 만든 뒤 손바닥 전체를 이용해 슬라임 내부에 겹겹이 쌓인 공기 방울을 한 번에 와다닥 터트리는 쾌감이 소설 끝까지 지속된달까.

 

이거 너무 찬양이 아닌가 싶지만

표제작 초록 땀의 밀도가 선행되었기에 이어지는 다른 작품들 역시 (기대감이라는 이름의) 버프 효과를 알맞게 받아 찬연하게 재밌었다.

 

문진영김사과의 소설을 읽을 때는 함께 도시를 배회하게 되었다.

어찌할 수 없음을 포착하는 방식에서 작가의 개성이 드러나 좋았다.

 

이서수의 소설을 읽을 때는 내가 가진 색안경을 의식하게 되었고……

사상과 신념 이전에 나약하고 사랑을 하는 인간이 있음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색은 빛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어떤 빛이 어떤 색을 띠게 되는지,

빛과 색 사이의 인과를 찾으려는 움직임은 무용하기만 하다.

그렇다. 20세기의 이성은 이미 실패했다.

그런데 우리는 왜들 그렇게 상대의 허점을 톺아내어 공격들을 해대는지!

21세기 인간들이여 우리네 인생에 인과 없음을 인정하라.

사상은 미워하되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

그러나 한편으로 인과가 없는 사상이란 그 자체로 무지함의 증거가 아닌가…….

이서수의 소설을 읽으며 내 사상이 개연성은 있으나 인과가 없다는 걸 자각하게 되었다.

인과를 가진 인간이 되려면 공부를 해야 하는구나.

공부하자, 인간들아.

 

공현진의 소설은 시류에 밝다. 죄책감과 책임의 윤리. 윤리가 가진 회색지대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는 감상이 앞서기는 했으나 이 시대에 필요한 이야기임은 자명하다.

 

김희선의 소설은 (심지어 작가노트까지) 혼란하고 혼몽하다. 어쩌면 김사과의 소설보다 더.

읽다 잠들면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다. 혼몽하고 아름다운 곧 잊어버릴 꿈을.

 

어떤 기록 매체로도 완전히 포착할 수 없는 감각을 포착하려는 시도.

그 시도로서의 첫 앤솔러지.

느낌이 좋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요즘 내게는 숨 문제가 있다. 숨을 들이쉬는 법을 이상하게 의식하게 되었다. 특히 밤이 되면, 나는 입안에서 공기를 계속 굴렸다. 그러다 삼킨다. 자연스럽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게 아니라 투명 사탕을 녹이지 않고 그대로 삼키는 것처럼 꿀떡 삼킨다. 그러면 배 속에 공기방울들이 쌓여 오글거린다. 불편감은 당연하고 소화도 잘 되지 않고 잠도 잘 오지 않았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 그 현상은 더 심해진다. 입을 다물고 코로 숨을 쉬어야 하는데 그럴 때 혀를 어디다 뒀었지? 입천장에 붙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러면 턱과 이에 힘을 잔뜩 주게 된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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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면허 - 이동하는 인류의 자유와 통제의 역사
패트릭 빅스비 지음, 박중서 옮김 / 작가정신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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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데믹은 미국 여권 소지자들과 그 정부에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즉 자국을 떠날, 자유롭게 여행할, 제지를 당하지 않고 돌아올 권리란 인간으로서의 우리에게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특정 국민국가의 시민으로서 생기며, 그런 권리는 언제든지 철회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p.366)

 

면허는 특정한 일을 할 수 있는 공식적인 자격을 행정 기관이 허가해주는 일이다. 그러므로 여행 면허인 여권은 국민의 (타국으로의) “이동권을 국가가 허가해주었음을 증명하는 공문서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민족주의자든 아나키스트든 출신 국가에 귀속되어 평생을 출신 국가의 영향 아래에서 살아간다.

 

경제적·정치적으로 상당한 가치를 지닌 서류를 향유하는 사람들은 정작 그 가치를 무시해버리기 일쑤인 반면, 다른 이유도 아니고 단지 시민권이나 출신 국가를 근거로 여행과 이주에 압도적인 장애를 직면하는 사람들은 그 가치를 뼈저리게 실감할 수밖에 없다. (p.353)

 

저자가 강조하는 건 우리의 삶이 우연성에 기반한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우연성을 (책의 주제에 맞추어) “출신 국가에 한정하여 이야기하지만, 독자인 우리는 이 우연성을 무한히 확장하여 스스로의 삶에 적용해볼 수 있다. 특정 시대에 태어난 것, 생물학적 여성이나 남성으로 태어난 것, 특정 성 지향성을 가진 것, 누군가의 아들이나 딸로 태어난 것, 누군가의 언니나 누나, 형이나 오빠, 혹은 동생으로 태어난 것, 특정 외모나 질병, 신체적 장애가 있는 것. 기실 우리의 삶은 수많은 우연으로 구성된다.

 

어떤 신체는 이방인이나 외지인으로 인식되는 반면, “어떤 신체자연스러운것으로 인식되어 이들의 여권은 이동성을 향상시키거나 확장시킨다. (p.359)

 

우연성으로 이루어진 삶의 아이러니를 되짚으며 저자는 말한다. 특정 국가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왜 서로를 적대시해야 하느냐고. 그건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니냐고. 특정 국가, 특정 성별, 특정 성 지향성, 특정 신체를 이유로 우리가 서로를 적대시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은 우리의 의지로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경이나 국가가 허구라는 것을 물리적 영토도 없고, 기존의 어떤 국민국가와도 동일시되지 않는 유토피아적 구성체로 고안된예술 프로젝트인 NSK 국가에서 발행한 여권을 사례로 들어 설명한 지점은 특히 흥미롭다. 현대인은 우연성이 일구어낸 허구의 개념으로 보호받거나 배척당한다. 21세기 현대인의 신원은 존재 밖에서 정의된다.

 

갑자기 그는 자신의 신원이 더 이상 자신의 통제 하에 있지 않음을, 이제는 전적으로 자신의 서류에 의존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가 손에 들고 있는 물건이 그를사물로 만든다.” (p.40)

 

저자는 인류의 이동성에 관한 억압의 사례를 살피며 독자가 스스로를 증명하려고 애쓸 필요 없이, 그저 존재만으로 환대받는 유토피아의 도래를 상상해보도록 판을 깐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요원한 사고실험일 뿐이라는 것도 인정한다. 순수한 환대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더 넓은 공동체를 환대하기 위한 법률을 만드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 이 책을 추천해주고 싶은 사람 1: 에렌 예거

 

화성 외국인보호소는 법무부 산하 국가안보 시설이에요. 외국인이 아니라 국경을 보호하고 있죠. 국경은 첨예하게 모든 차별이 응축된 공간이에요. 우리가 사는 사회의 윤곽이 있어요. 난민은 우리 사회의 윤곽을 그리는 사람들이죠. 이들이 제대로 된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을 못 받으면 국민도 못 받아요. 저는 점차적으로 개선, 나중에, 이런 말 안 믿어요. 가장자리에 있는 걸 바꾸면 저절로 안쪽도 좋아지죠.”

(은유, <뭐라도 같이 먹으면 나의 편견이 깨져요>, 시사in, 2025.03.23.)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펜데믹은 미국 여권 소지자들과 그 정부에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즉 자국을 떠날, 자유롭게 여행할, 제지를 당하지 않고 돌아올 권리란 인간으로서의 우리에게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특정 국민국가의 시민으로서 생기며, 그런 권리는 언제든지 철회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 P366

경제적·정치적으로 상당한 가치를 지닌 서류를 향유하는 사람들은 정작 그 가치를 무시해버리기 일쑤인 반면, 다른 이유도 아니고 단지 시민권이나 출신 국가를 근거로 여행과 이주에 압도적인 장애를 직면하는 사람들은 그 가치를 뼈저리게 실감할 수밖에 없다. - P353

"어떤 신체"는 이방인이나 외지인으로 인식되는 반면, "어떤 신체"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되어 이들의 여권은 이동성을 향상시키거나 확장시킨다. - P359

갑자기 그는 자신의 신원이 더 이상 자신의 통제 하에 있지 않음을, 이제는 전적으로 자신의 서류에 의존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가 손에 들고 있는 물건이 ‘그를’ 사물로 만든다."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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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억 번째 여름 (양장) 소설Y
청예 지음 / 창비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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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 요약:

환상적인 총천연색 여름의 행성. 그곳에서 우리의 후손들이 *뺑이치는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청예의 일억 번째 여름은 멸종을 앞둔 세계에서 펼쳐지는 청춘 SF로 보이지만, 그 본질은 철저히 디아스포라의 이야기다. 소설 속 인물들은 정착하지 못한다. 인류의 후손에게는 고향이 없다. 지배층으로 보이는 두두족도 사실 다를 바 없는 처지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일억 번째 여름앞에서 전전긍긍하는 이들은 모두 유랑자이며, 피난민이며, 예언과 재난의 틈에서 유예된 존재들이다.

 

어째서 선조들은 우리를 이렇게나 힘들게 창조한 것일까. 왜 우리는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것들로 인해서 고통받아야 하는 걸까. 삶이라는 게, 가끔은 내 것이 아닌 남의 불행까지 억지로 나눠 받는 일처럼 버거웠다. (59)

 

정착할 수 없는 삶이야말로 디아스포라의 핵심이다. 일억 번째 여름의 다섯 아이들은 누구 하나 제자리에 머물지 못한다. 떠밀리듯 행성을 전전하고, 정체성을 부여받기보다 찾아야 한다. 이들은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묻는 대신, ‘무엇을 위해 살아남을 것인가를 묻는다. 그것은 생존의 이유이자, 사랑의 이유다.

 

형의 쓰임새는 살아남는 거야.”

우리에게는 살리고 싶은 사람이 있다. 나는 지금 이 형을 살려야겠다. 이 형이 살아서, 끝까지 살아남아서, 행성의 어딘가에서 멸종이라는 차가운 단어를 영원히 피해 줬으면 한다. 평생토록 피난자의 신분이 되더라도. 두두족의 매서운 재앙을 얄미울 정도로 노련히 피해 다니며. 끈질긴 바퀴벌레처럼. 징그러운 지네처럼. 죽여도 절대 죽지 않는 마음처럼. (153)

 

디아스포라 서사에서 공동체가 존속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희생자가 있어야 한다. 청예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서사를 추동하는 다섯 명의 아이들은 어린 나이에 채집자, 해독가, 족장이라는 책임을 멍에처럼 뒤집어쓴 희생양들이다. 그 와중에도 아이들은 서로를 믿고, 지키고, 사랑한다.

 

어려도 삶은 힘들었다. 사는 것이 생각보다 기쁘지가 않았다. 내 곁의 누나도 사는 게 고단하다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두꺼운 진심을 얄팍하게 으깨며 미소 지었고, 내가 자신의 쓰임을 완성한다고 말해줬다. 어쩌면 거짓말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믿고 싶다는 소망이 추동하며 나를 흔드니, 나는 그 순간에 타인의 말을 믿을 수 있는 바보가 되었다. (165)

 

이 소설이 빛나는 이유는, 디아스포라적 서사를 뜨겁게 감정화한다는 데 있다. 피난의 고통, 실향의 슬픔, 기원의 상실은 있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다. 청예는 그 틈에 새로운 연대를 심는다. 고통을 전가 받은 세대가 서로의 사는 이유가 되어주며 끝내 다가올 계절을 맞이하는 이야기로.

 

무언가로 산다는 거 이토록 큰 책임을 지고 사는 일이다. () 그러니 희생을 오직 슬픔으로만 생각하지 않기로 하자. 힘들지만.” (243)

 

선택받지 못한 자들, 뿌리내릴 곳을 잃은 자들, 죽음의 예언 속에서도 서로의 온기를 간신히 붙잡은 자들. 그들의 서사는 일억 번째 여름이라는 이름으로 피어난다. 꽃은 어두웠지만 마음은 끝내 푸르렀다.

 

죽여도 절대 죽지 않는 마음처럼.”

이 마음은 우리가 그토록 잃지 않으려 했던 고향일지도 모른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어째서 선조들은 우리를 이렇게나 힘들게 창조한 것일까. 왜 우리는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것들로 인해서 고통받아야 하는 걸까. 삶이라는 게, 가끔은 내 것이 아닌 남의 불행까지 억지로 나눠 받는 일처럼 버거웠다. - P59

"형의 쓰임새는 살아남는 거야."

우리에게는 살리고 싶은 사람이 있다. 나는 지금 이 형을 살려야겠다. 이 형이 살아서, 끝까지 살아남아서, 행성의 어딘가에서 멸종이라는 차가운 단어를 영원히 피해 줬으면 한다. 평생토록 피난자의 신분이 되더라도. 두두족의 매서운 재앙을 얄미울 정도로 노련히 피해 다니며. 끈질긴 바퀴벌레처럼. 징그러운 지네처럼. 죽여도 절대 죽지 않는 마음처럼. - P153

어려도 삶은 힘들었다. 사는 것이 생각보다 기쁘지가 않았다. 내 곁의 누나도 사는 게 고단하다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두꺼운 진심을 얄팍하게 으깨며 미소 지었고, 내가 자신의 쓰임을 완성한다고 말해줬다. 어쩌면 거짓말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믿고 싶다는 소망이 추동하며 나를 흔드니, 나는 그 순간에 타인의 말을 믿을 수 있는 바보가 되었다. - P165

"무언가로 산다는 거 이토록 큰 책임을 지고 사는 일이다. (…) 그러니 희생을 오직 슬픔으로만 생각하지 않기로 하자. 힘들지만." -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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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주의 인사 소설, 향
장은진 지음 / 작가정신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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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휴가 동안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겠다는 계획은 이미 무산되고 말았다. 이 작고 여린 새순 때문에. (26)

 

하루 종일 같이 돌아다니다 집으로 돌아오자 괜히 문샤인을 잘 기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31)

 

여느 때와 다름없이 퇴근한 동하는 책이 든 붉은 COSTEL 사 냉장고와 새순이 자란 화분이 자신의 침대 옆에 자리를 꿰차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1년 전에 헤어진 전 여자친구 세주가 연락도, 허락을 구하는 일도 없이 두고 간 것이었다. 냉장고에 부탁한다는 쪽지 한 장만을 붙여둔 채.

 

동하는 그 뜬금없는 침범에 당혹스러워하는 것도 잠시, 근처 꽃집에 가서 그 새순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배우고, 냉장고에 있던 책들도 한 권씩 꺼내어 밑줄까지 그어가며 전부 읽는다.

수동적인 책임감이나 의무감 때문은 아니었다. 글쎄, 어쩌면 세주의 유품일지도 모르니 더 마음을 써 돌보기도 했겠지만(동하는 기본적으로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다) 그보다는 순전한 즐거움의 능동성으로 세주가 두고 간 책과 식물에서 소소한 기쁨을 누린다.

 

거창한 이유가 있다기보다 그저 좋으니까 하는 것,

소설 속 세계가 그런 자연스러움으로 이루어져 있어 읽는 내내 마음이 편했다.

 

차경희 고요서사 대표가 추천사에 적어둔 반그늘에서 자라는 소설이라는 분석과 작가의 말 첫 단락이 마음에 와닿았다.

 

작가의 말은 이렇게 시작한다.

 

내 문장은 외로움을 잘 알고 있을까. 고통을 잘 담아내고 있을까.

 

이것은 책을 쓴 작가의 진심일 테다. 소설을 다 읽고서 작가의 말을 읽으니 비로소 이 책이 왜 좋았는지 완전히 설명된 기분이었다.

 

책 속에는 내가 밑줄 그으며 동의했던 문장이 있었고, 다 읽고 난 뒤에 나는 동하와 세주를 좋아하게 되었으며,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읽은 뒤에도 이 소설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음을 믿게 되었다. 왜냐하면 세주가 동하의 집에 침범하여 화분과 책을 부탁하고 간 이후, 그들이 서로를 보지 않았던 이 년여의 공백 동안 그들의 삶에 이전과 다른 사랑이 깃들게 되었으므로 나는 이들의 헤어짐이 문자 그대로의 헤어짐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 식물, . 모두 세주가 좋아하던 것들인데 이제 세주의 삶에서 필요가 없어지고 말았다. 지나간 시절. 그러나 필요가 없어졌다는 건 충분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98)

 

동하와 세주는 그들 인생의 내력, 버릇, 성격과는 별개로 따뜻한 사람들이다.

또한 능동적으로 자기 삶을 결정하는 인물들이다.

(이것이 진정한 인간 찬가 아닐까?)

덕분에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차분한데도 웃겼고 큰 파동 없이 잠잠했는데도 지루하지 않았다.

그것이 좋았다.

오래도록 삶을 응시해온 작가의 연륜 덕에 책 읽는 시간이 즐거웠다.

 

냉장고에서 세주의 책을 꺼내 읽었던 동하가 그랬듯

나도 초중반부터는 편한 마음으로 원하는 야식과 음료를 먹고 마시며 책을 읽었다.

나에게 이 책은 달고 시큼하고 쌉쌀한 하이트 제로의 맛으로 기억될 것이다.

 

작가님께,

덕분에 불 켜진 옆 빌라의 창문과 노랗게 뜬 상현달을 볼 수 있었습니다.

사는 재미 몇 가지를 일러주셔서 감사해요.



작가정신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된 서평입니다.

여름휴가 동안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겠다는 계획은 이미 무산되고 말았다. 이 작고 여린 새순 때문에. - P26

하루 종일 같이 돌아다니다 집으로 돌아오자 괜히 문샤인을 잘 기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 P31

책, 식물, 술. 모두 세주가 좋아하던 것들인데 이제 세주의 삶에서 필요가 없어지고 말았다. 지나간 시절. 그러나 필요가 없어졌다는 건 충분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 P98

세주가 살림살이를 주면서 함께 부탁했던 식물은 이미 죽어서 화분째 버려졌거나 병든 상태로 어두운 곳에 방치되어 있었다. 친구가 아무리 잘 대해줘도 식물이 건강하게 자라지 않거나 식물을 정성껏 돌보지 않은 집에는 오래 머물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친구를 원망하거나 탓하지는 않았다. 그저 죽어버린 식물의 꽃말에 대해 되뇌고 곱씹었다. 그러자 친구 이름은 희미하게 잊히고 대신 꽃말로 친구의 이미지가 새롭게 각인되었다. - P50

위로의 대상이 사진인지 자신인지는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그 문장이 사진을 계속 지켜줬다는 것이었다. - P53

밤에 질문을 던지면 그들은 반드시 너에게 답을 줄 거라고. 할아버지가 진짜 그들이 답을 준다는 의미로 한 말이 아니란 걸 세주는 조금 커서 알았다. 질문은 답을 듣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마음의 무게를 덜기 위해 던지는 거란 걸. 세주는 삶의 무게를 내려놓기 위해 눈 뜬 창문을 향해 말을 걸었고, 말은 빛으로 되돌아와 어둠 속 불안을 물리쳐주었다. -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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